홀로 선 나의 80대, 위로와 기쁨의 열매들
< 다시 찾은 장림 교회와 신앙의 안식 >
여든이 되던 2010년, 남편과 함께 다니던 대신동 교회가 혼자 다니니 너무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국 예전에 장림에 살 때 새벽 예배를 다니던 가까운 교회로 옮기기로 했다. 거의 50년을 다닌 교회를 옮긴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것도 온 가족이 다니다 이젠 나 혼자 다니니 끈 떨어진 주머니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주일 아침이면 교회 차가 집 앞까지 데리러 오니 참 편리했다.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뒤, 또래들이 모이는 구역 모임까지 참석하고 나면 오후 3시쯤 집에 도착했다.
잠시 쉬었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와 사는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 테레비(TV)를 보다 일기를 쓰고 잠드는 평화로운 주일이었다. 일기는 남편이 천국에 가신 날부터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수요일 저녁에도 잊지 않고 교회 차를 타고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 딸이 서울서 내려오면 손녀들과 같이 예배드리러 갔는데 함께 가니 참 좋았다.
< 노인대학교와 복지관, 일주일이 모자란 배움의 길 >
본교회와 집 근처 복지관, 그리고 또 다른 작지만 고급스럽고 알찬 가까운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교까지 일주일에 사흘은 꼬박 노인대학에 나갔다.
두 교회의 노인대학교는 빨간색과 회색의 셔틀버스를 타고 11시쯤 가면, 노래도 불러주고 선물도 챙겨주었다. 정성껏 준비한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집까지 데려다 주니 참으로 고마운 곳이었다.
'늘 내가 대접하던 교회생활이었는데 이제 내가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감사했다.
절에서 운영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복지관에도 노인대학 주 1회 수업에 꼭 참여했다. 오후 2시부터는 춤과 체조로 몸을 풀고, 그리기와 만들기 같은 미술 수업이나 노래 부르기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다양한 배움을 즐기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늘 가벼웠다. 열심히 하고 나니 최우수상, 봉사상등 상도 많이 받았다. 보건소교육 수료증도 나의 열심이 준 선물이라 여기고 고이 보관했다.
<치료실에서 피어난 우정과 소풍의 설렘>
노인대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도 복지관은 나의 놀이터였다. 복지관에 가서 매일 점심을 먹고 나면 치료실로 향했다. 물리치료 기구로 굳은 몸을 풀어주며 곁에 있는 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다른 방에서는 화투 놀이가 한창이었지만, 나는 주로 치료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역시 사연들도 다양했다.
가끔씩 그들의 자녀들이 다녀가면 간식들이 넘쳐나기도 했다. 나도 한 번씩 아이들이 주는 용돈으로 요구르트나 커피를 쏘았다. 떡이라도 대접하면 잔치분위기가 들어 웃음꽃이 피곤했다. 나중에는 치료실의 고참이 되어 처음 오는 이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등 봉사를 하고 뒷마무리도 단정히 했다.
봄가을이면 소풍을 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버스를 대절해 꽃놀이와 단풍놀이를 다녔는데, 나는 노래는 잘 못 불러도 박수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치며 그 분위기를 누렸다.
특히 복지관에서는 1년에 한 번 불교 재단 고등학교 학생들과 짝을 지어 나들이를 가는 행사가 있었다. 옛적 고향에서 남동생을 데려와 입학시킨 학교여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어찌나 잘생기고 착한지, 일정이 마치고 나면 손주 같은 녀석들에게 꼭 만 원씩 용돈을 쥐어주곤 했다. 그 동행 소풍은 4년 동안 지속되었다.
교회 갈 때는 물론이고 노인대학에 가거나 소풍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나는 옷차림에 늘 신경을 썼다. 딸이 기념일마다 잊지 않고 보내준 옷과 신발, 가방 등을 꺼내, 색깔과 디자인을 잘 맞춰 입고 나갔다. 밥 먹으러 가거나 치료실 갈 때와는 다른 복장이었다. 사람들은 내 옷차림을 보고 "딸이 사준 거죠? 참 예쁘다!"라며 부러워했다. 그럴 때면 내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나만의 작은 사치였다. 딸은 "어머니는 사드린 옷과 신발을 잘 맞춰 입으시니 더 멋있고 보람 있어요."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달라진 옷차림을 늘 바로 알아보는 또 한 사람은 나의 막내아들이다. 세심하고 자상해서 나를 늘 미소 짓게 한다.
<13년의 성실함이 빚어낸 열 세장의 졸업장>
복지관에서는 봉사 활동도 시작했다. 몸이 불편해 나오지 못하는 할머니 댁을 찾아가 과자를 전하고 말동무가 되어드렸다. 복지관에서는 봉사하는 내 모습을 담아 작은 달력을 만들어 주었고,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은 복지관 게시판에 예쁘게 붙여두기도 했다.
본교회 노인대학은 4년을, 가까운 교회 노인대학은 3년을 부지런히 다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80대 10년을 오롯이 함께한 곳은 바로 복지관 노인대학이었다.
일흔아홉에 시작해 아흔이 다 돼 가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한 결과, 2019년 '코로나19' 전염병으로 휴관하기 전까지 매년 졸업장을 받았다. 그 후 다시 개관하여 90이 넘어서도 3년을 더 다녔으니 복지관에 몸담은 시간만 총 13년이다. 내 손에는 그 성실함을 증명하듯 13장의 졸업장이 귀하게 남아있다. 다른 상장도 5장이나 되니 참으로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쁜 소식과 간절한 기도>
서울에 사는 딸은 거의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와 한 시간이 넘도록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들도 자주 안부를 물어오니,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늘 곁에 있는 듯 든든했다.
2010년, 내가 여든이 되던 해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건축학을 공부하던 둘째 손녀가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대학을 졸업한 첫째 손녀도 동생이 있는 유럽으로 건너가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첫째는 교수님의 추천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신문사 인턴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경영학과 대학생이 된 막내 손녀까지 언니와 엄마를 따라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알뜰하게 세 아이를 키우며 학교 근무와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하느라, 좁은 집에서 고생만 하던 내 딸이, 아이들의 권유로 생애 첫 유럽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에 내 마음이 다 시원해졌다.
여행을 유독 좋아하며 "여행은 배움의 길"이라 말하던 남편도 아마 하늘에서 흐뭇해했을 것이다. 아들과 사위는 일 때문에 해외를 제집 드나들듯 다녔지만, 딸의 먼 여행은 처음이라 걱정도 앞섰다. 나는 그들이 무사히 다녀오기를 매일같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 승진의 기쁨 그리고 나와 막내의 동거 두 달 >
이듬해에는 정치경제부장으로 애쓰던 막내아들이 보도국장으로 승진했다는 경사가 있었다. 기자로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올랐으니 우리 가족 모두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2012년에는 아들이 회사 일로 잠시 어려움을 겪으며 세 달간 휴직을 하게 되었다. 그중 두 달을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보냈다.
아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엄마 마음이 애틋해 기도를 더 많이 올린 시간이었다.
아들은 바다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에서 내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답답한 시간을 오히려 나와 함께 장도 보러 다니며 재밌게 잘 이겨내주었다.
장 보러 다닐 때 아들은 나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세요? 메모도 안 했는데 그렇게 척척 필요한 걸 잘 사세요?"라고.
나는 예전부터 장을 볼 때, 망설이거나 깎거나 하지를 않았다. 필요한 것을 시비 없이 그냥 조용히 사곤 했다.
아들은 또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컴퓨터라고 하시더니 그 이유를 알겠네요!"라며 껄껄껄 웃었다.
그렇게 얘기하며 집에 돌아오면 나는 선걸음에 후다닥 음식을 만들어 한 상 차려 주었는데, 아들은 늘 감탄하며 사진을 찍곤 했다.
한 번은 납세미(갈가자미)를 구워주었더니 사진을 찍어 서울 누나에게 보냈다, 제목은 < 밥상 위의 납선생 >이라고 했던가? 손녀들까지도 그 사진을 보고 재밌다고 웃으며 전화를 걸어왔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늘, 비록 걱정이 있어도 짜증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평화롭게 살아왔다. 이번에도 막내아들은 그 시간을 이용해 책을 집필했다.
<제국의 습격>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1편을 냈었는데, 내 집에 있으며 <탐욕과 생존>이라는 2편을 썼다. 영화로 풀어낸 제국의 역사이야기였다. 나는 아들이 쓰던 모습을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 아들을 위로하듯 그해 막내아들의 장남인 나의 첫 손자가 가고 싶어 하던 외국어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할아버지의 밥상 앞 기도에 늘 큰소리로 "아멘." 하더니 언제 이렇게 컸는지, 기특하기만 하다. 나는 그동안 수고한 막내며느리에게도 축하를 전했다.
< 하나님의 은혜로 핀 세 손녀의 꽃길 >
2012년 11월에는 또 한 번 서울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나의 '종달새' 첫째 손녀가 10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서울에서 방송국 편성기획피디로 당당히 합격했다는 것이다.
인턴 생활을 거치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그 해에는 편성피디를 뽑지 않아, 다시 1년간 공부하여 거둔 귀한 결실이었다.
어릴 적 외삼촌처럼 기자가 되겠다던 손녀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 편성 피디라는 꿈을 이룬 것이 대견해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그 당시 나는 기도와 함께 많은 꿈을 꾸었다. 좋은 꿈을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다. 딸과 손녀들이 늘 기도를 부탁할 때마다 쌓아온 간구들이 첫 번째 열매를 맺은 것이라 믿었다.
그 후 나는 손주가 다니는 회사의 방송을 아침저녁으로 시청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많이 듣고 배웠다.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서로의 다른 생각을 듣게 되어 혼자 내 생각을 말해보기도 하니 제법 재미도 있었다.
2013년에는 나의 첫 손자가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둘째 손녀가 건축학과 5년 과정 졸업을 앞두고 '아산서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 귀한 교육을 받으며, 미국 인턴십까지 경험하게 된다니 참으로 장한 일이었다. 유학을 열망하면서도 형편상 교환학생으로 만족해야 했던 손녀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1년간의 연수를 마친 둘째는 취업대신 법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로스쿨에 지원했는데 단번에 합격했다. 손녀는 등록을 할지 취업을 할지 많은 고민 끝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건축학과 출신으로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나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둘째 손녀의 그 용기가 가상했다. 그리고 넉넉지 않은 살림에 뒷바라지를 결정한 딸의 믿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같은 해에 경영학과를 졸업한 막내 손녀도 곧장 취업에 성공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더니 대중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큰 회사에 합격했다. 유명한 가수가 세우고 관여하는 큰 회사인데 거기서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한 어린 가수들의 모든 활동을 맡아 관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손녀는 가수들의 음악을 담당하는 에이앤알이라는 나는 처음 듣는 생소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테레비(TV) 나오는 어리고 춤도 잘 추는 가수들의 노래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전공과는 다르지만 하고 싶은 일을 빨리 찾아 즐겁게 일하는 막내손녀의 모습이 그저 기특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 모든 경사는 손녀들의 노력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넘치는 은혜이자, 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 온 내 딸의 진지한 기도가 맺은 결실임도 잘 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 눈가에는 늘 감동의 눈물이 고이곤 한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내 80대도 절반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돌아보니, 외롭다 생각했던 길이 가장 따뜻한 길이 되어 있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