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후반의 취미, 간병과 호국원에 울려 퍼진 예포(禮砲)
<다대포 항구 앞 18평 아파트>
다대포항구 앞바다가 보이는 18평 아파트는 온전히 우리 부부만의 공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드리고 돌아와 거실밖을 바라보면 고기잡이배들이 불을 환하게 켜고 줄지어 수평선을 향해 나간다. 나는 어느새 배들을 세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스물, 스물 하나,..."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장림에 일궈놓은 밭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나의 취미생활인 셈이다.
저녁이 되면 먼 하늘에서 큰 별이 반짝인다. 자세히 쳐다보면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오다 어느덧 비행기가 되어 옆으로 지나간다. "아!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구나!"
주일에는 여전히 둘이서 버스 타고 대신동까지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내가 음식을 준비해 두면 모두 모여 함께 먹거나, 때론 아들부부와 손자들과 외식을 하기도 했다. 방학이면 서울에서 딸과 사위와 손녀들이 와서 북적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퇴직한 남편과의 시간들>
장림에서 이사 온 지 6개월이 되는 이듬해 3월, 여든이 된 남편은 일을 내려놓게 되었다. 남편은 여든이 되도록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했다. 나는 남편이 이젠 좀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어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막내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딸과 둘째 손녀를 데리고 내 고향 장항에 다녀왔다. 나와 남편이 정성껏 선산에 모신 나의 부모님 산소에 들러 성묘를 하고, 언니와 조카들을 만나 웃으며 식사를 나누었다. 그때만 해도 손주들이 방학 때 서울에서 내려오면 함께 해운대에 숙소를 얻어 나들이를 다녀왔다.
남편의 도시락 쌀 일이 없어진 나는, 새벽이면 버스를 타고 장림에 있는 밭으로 갔다. 흙을 일구고, 계절마다 자라는 채소를 돌보는 농사꾼의 일이 정겨웠다. 수확물을 팔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와 가족들의 반찬으로 그리고 밭을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고추와 가지, 오이와 호박등을 심었고, 늙은 호박은 수십 통이나 거두어들였다.
채칼로 썰어 서울에 있는 딸에게 보내면, 부침개로 부쳐 먹기 좋았다. 사위와 손녀들도 그 맛을 좋아해 반찬 걱정을 덜었다고 고마워했다.
열무도 따로 길렀다. 남편이 특히 좋아하는 물김치를 담기 위해서였다. 삼 년 동안 철마다 열무를 길러 김치를 담갔다. 돋보기를 끼고 혼자 앉아 야채에 혹시 벌레가 있을까 봐 꼼꼼히 다듬고 있으면, 소파에 앉아 있던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 작은 잎까지 어떻게 다듬어? 잘 보여?”
“어떻게 그렇게 농사를 잘 지어?”
“농사가 그렇게 재미있어?”
남편은 함께 다듬기보다는 그렇게 물으며 곁을 지켰다. 내가 밭 이야기를 하면 신기한 듯 듣고, 또 묻곤 했다. 하루는 장림 밭까지 직접 찾아와 한참을 둘러보고 같이 돌아오기도 했다. 쌔리골에서도 처음 몇 년간 밭을 일구었는데 그때는 남편도 같이 했었다. 남편은 농촌 출신인 나에게 배웠다.
농사가 잘되는 나만의 비법이 있었다. 대신동 시장에 있는 단골 약다리는 집에서 푹 다린 장어 찌꺼기를 얻어다가 거름으로 주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좋은 양분이 되어 식물들이 잘 자랐다. 내손으로 정성껏 일군 밭은 해마다 더 넉넉한 열매를 내어주었다. 상추와 여러 나물도 길러 딸에게 보냈다.
김장이든 호박이든, 서울로 보내는 일은 늘 남편의 몫이었다. 예전만큼 힘은 없었지만 즐거이 그 일을 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딸은 우리 부부의 정성을 생각해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잘 챙겨 먹는다고 고마워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의 전조들>
돌이켜보면, 그 평안한 시간 속에서도 이미 남편의 몸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장림으로 오기 1년쯤 전, 남편은 경비실에서 잠을 자다 연탄가스를 마시는 사고를 당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위생병원에 입원했고, 11일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때는 거의 돌아가실 뻔한 상태였다. 서울에서 딸네 가족이 내려왔을 때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흘 만에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았고, 11일 만에 회복해 퇴원했다. 나는 그 11일 동안 온전히 그 곁을 지키며 간병을 했는데, 그 후로 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종종 느끼기도 했다.
퇴원 후에도 남편은 그 병원의 의사를 계속 주치의로 삼으며 건강관리를 했다. 우리는 이 일을 겪은 후, 남편의 회복에 더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 위에 장림에서의 삶이 이어졌지만, 몇 해가 지나면서 남편의 몸은 다시 아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아파도 아침이 되면 내가 싸준 도시락을 배낭에 넣어 메고 어김없이 출근했다. 직장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가파른 길을 쉬어가며 내려가야 했고, 내려가서는 택시를 타고 일터로 향해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 역시 몸이 조금씩 늙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내 몸이 뭔가 이상하게 아프고 힘이 빠졌다. 마침 전화를 걸어온 올케가 서둘러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검사결과 내가 고혈압과 당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케는 병원 근처에서 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있는 병원으로 오시라고 했다. 그런데 잘 아프지 않던 내가 아프다는 말에 놀랐는지, 남편이 근처에 있는 동산병원으로 오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부산대학병원으로 갔다. 거기서 내가 없으니 당황한 남편은 큰일을 당한 줄 알고 영안실 건물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막내아들이 찾아 내가 있는 병원으로 모셔왔다.
남편을 본 의사는 당장 입원시켜 링거를 처방할 정도로 남편은 사색이 되어있었고 나와 함께 사흘 동안 입원해서 안정을 취해야 했다. 나는 그날부터 고혈압약과 당뇨약을 먹어야 했다.
<고단했던 삶의 마지막 페이지>
그 후로 남편은 본인의 건강에 더 신경을 썼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부황을 뜨고, 수시로 주치의가 개업한 병원에 가 링거 주사를 맞으며 건강을 관리해 나갔다. 술, 담배도 안 하며 몸을 늘 청결하게 관리하는 깔끔한 사람이었고, 초기에 박카스나 판피린등으로 병이 깊어지지 않게 다스리며 늘 상비약을 챙겨두었다.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서서히 귀도 어두워졌다. 기자인 아들이 나오는 방송국 뉴스도 잘 보지 않고 라디오에 더 귀를 기울였다. 어느 해에는 서울 손주들이 방학을 맞아 내려와 북적거리는데도 혼자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 만큼 몸이 눈에 띄게 약해져 갔다.
그렇게 2년 좀 지난 어느 날, 나에게 주치의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진료를 본 의사는 입원할 수 있는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처음으로 주례 보훈병원에 가서 11일 동안 검사를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설사가 계속되어 결국 부산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환자가 많아 이틀 밤을 응급실 바닥 박스 위에서 보내고 나서야 입원을 할 수 있었다. 겨우 입원을 한 뒤에도 설사가 계속되어, 내가 조심스레 의사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내과에서 먹던 약을 먹으니 차도가 좀 있었어요." 내가 남편이 먹던 약의 색깔과 특징을 하나하나 꿰고 있는 것을 보고 의학박사는 깜짝 놀랐다. 나보고 박사라고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그 약은 아주 귀하고 비싼 약이었다. 그 약을 먹고 설사병은 치료가 되었다.
그러나 쏙쏙 쑤시는 남편의 통증의 원인은 찾지 못해 마지막으로 대장내시경검사를 하자고 했다. 담당 의사가 내시경 화면 속 깨끗하고 건강한 장 상태를 보여주었다. "장에 좋은 세균이 이렇게나 많은 걸 보니 그동안 아내분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는지 알겠습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환자 중에 이렇게 관리를 잘 한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남편에게 결혼 잘하셨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여러 검사 끝에 병의 원인이 밝혀졌다. 전쟁 중 전투를 하며 근육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던 후유증과, 허리부상을 입고도 후방 큰 병원으로 가지 않고 전방에서 버티며 치료받은 상처가 남아 생긴 통증이었다. 그때의 일이 평생 몸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24일간의 입원을 마치고 퇴원할 때는 장도 근육도 다 나았다고 했다. < 전쟁의 통증을 벗고 영원한 안식으로, 소천(召天) >
이후 9일이 지나자 남편은 침대가 없는 집이 불편하고 힘들다며 보훈병원에 입원하길원했다. 이전까지는 원인을 찾기 위해 휠체어에 태우고 검사받으러 다니느라 많이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준 생활비나 용돈, 그리고 우리가 모은 돈으로 제일 비싼 주사를 맞히며 최선 다해 요양했다.
바쁜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간병은 오롯이 내가 맡아왔다. 그러나 정작 남편은 날이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입원한 지 넉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남편이 잠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서울서 내려온 딸에게는 "엄마 고생하는 게 안쓰럽다"라고 말했다면서, 어떻게 그 찰나에 나를 못 알아볼 수가 있는지 서운함과 허망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옆에 있던 막내아들도 내손을 꼭 잡아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남편은 그 후, 혀가 말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해 서울에서 대학교에 입학해 첫여름방학을 맞은 둘째 손녀가 가족과 함께 부산에 내려왔다. 할아버지가 자기 이상형이라며 유독 따랐던 아이였다.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손녀는 혼자 남아 나와 함께 병원을 오가며 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딸의 간곡한 권유로 열흘간 간병인을 쓰기로 하고 겨우 한숨을 돌렸는데, 남편의 노환은 패혈증으로 이어졌다. 간병인이 “돌아가실 것 같아요. 어서 오세요!”라는 연락이 오기시작했다. 내가 손녀와 함께 부랴 부랴 택시 타고 가면 그는 다시 안정이 되어 깨어나곤 했다. 간병인은 말했다. "할머니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면 다시 호흡이 정상이 되세요. 신기해요." 그렇게 불려 가기를 다섯 번째 되던 날이었다. 연락받고 손녀와 함께 병원에 갔다가, 안정되는 남편을 보고 돌아온 날, 2008년 7월 18일 오후 1시 45분에 남편은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떠났다.
나와 손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가서 그를 보았다. 어린아이 같이 맑고 평안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손녀가 눈물을 흘리며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할머니, 제가 '할아버지를 다섯 번은 더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그게 이렇게 다섯 번이 될 줄은... 그래도 제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날 밤, 꿈속에 시어머니가 나타나셨다. 신혼 초 꿈에서 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단정하게 한복을 차려입으신 채였다. 시어머니는 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절을 하셨다. 마치 "고맙다!"라고 말하시는 것 같았다. 그 인사는 남편을 보내는 병원생활 4개월 나의 고된 수고를 어루만져 주는 위로와 감사였다.
그때가 남편은 83세, 나는 78세 여름이었다.
<현충원의 예포 소리와 그가 남긴 선물>
남편의 마지막 길은 외롭지 않고 장엄했다. 보훈병원의 72평 넓은 빈소는 조문객들로 쉼 없이 채워졌다. 남편의 마지막을 기리며 53만 원을 들여 정성껏 마련한 크고 화려한 재단 꽃장식이 빈소를 환히 밝혔다.
장례식에는 두 아들의 친구들과 막내아들의 방송국 동료들 그리고 부산시장을 비롯한 부산의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발걸음을 해주었다. 밤에 잠이 안 와 나가서 세어보니, 서있는 화환만도 43개였다. 서울에서도 딸이 근무하는 학교와 교회 식구들이 내려와 추모하고 예배를 인도해 주니 넓은 방이 온기로 가득 찼다.
국제시장과 자유시장에서 사업했던 남편의 친구들도 고령의 몸을 이끌고 찾아와 남편의 마지막을 지키며 함께했던 시절을 추억했다.
내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이 장례예배를 주관해 주셨다.
두 아들과 두 손자는 상주 자리를 지키고 막내아들이 장례절차를 총괄하고 큰며느리는 주방도우미 두 명과 함께 음식을 관리했다. 딸과 손녀들 그리고 막내며느리는 음식을 나르며 다 함께 소리 없이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내 형제들 가족이 와도 거들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저녁에는 넓은 빈소에서 내 자녀들과 다섯 손주들이 다 같이 자면서 서로 더 친밀해지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625 참전용사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공을 인정받아 영천호국원에 모시게 되었다. 영결식에서는 사열한 군군인들이 예포 7번을 쏘았다. 깔끔하게 잘 단장한 호국원의 야외묘지에 항아리를 묻고 비석을 세웠다. 딸은 눈물을 많이 흘리더니 편두통이 와 보호자인 사위와 병원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남편이 남긴 마지막 재물, 사랑으로 나누다> 성경을 많이 읽던 남편은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된다."라고 나와 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에게는 칭찬을 자녀들에겐 "고맙다"는 말을 잘했고, 손주들에겐 넓고 따뜻한 품이 되어주었다. 하나님껜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고 아프거나 힘든 일이 생겨도 "나는 괜찮다"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집에 와서 가족에게 큰소리치는 남자는 못난 남자라고 생각했고 그걸 실천하며 살은 사람이었다.
내 형제들을 다 품고 살아갈 수 있게 언덕이 되어주고도 생색 한번 안 낸 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것 아닐까? 살면서 만난 이웃들에게 까지 흘러넘친 그의 사랑의 마음과 행동은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참 신앙인으로 살았다.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고비가 있었지만 소신대로 믿음대로 멋있게 살았다! 이제, 그는 내 곁에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 예수님 품에 안겨 우리를 늘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날 저녁, 나는 삼 남매 부부와 손주들을 안방에 모두 불러 모았다. 장례 비용을 다 지불하고 남은 부조금을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식들에게 남겨줄 집이나 모아둔 돈이 별로 없었다. 남편이 남긴 마지막 재물을 나는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내 앞에 놓인 작은 상에 남은 부조금을 네 등분하여 가지런히 놓았다. 나와 삼 남매의 몫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리곤 내 몫에서 다섯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주시는 마지막 용돈이다”라며 50만 원씩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주방에서 수고한 두 며느리와 딸에게도 블라우스 사 입으라며 10만 원씩 주었다. 끝으로 남은 돈을 똑같이 세 자녀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나의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았다. 그리곤 먼저 생각이 깊은 큰아들이, 나와 많은 손님을 치른 막내아들에게 자기 몫의 절반이 넘게 떼어주었고, 딸도 나와 막내아들에게 그리고 다섯 아이들과 두 올케에게 자기 몫의 대부분을 떼어 나눠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큰아들과 딸의 의견을 존중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사위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놀라고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남편도 당신의 가훈처럼 화목한 우리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할 것 같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 같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녁을 먹었다.
< 손주들의 재능으로 치유받은 첫 번째 가을과 겨울>
4개월의 간병으로 내 몸은 무척 쇠약해 있었다. 막내아들이 지어준 한약을 먹으며 몸을 회복시키고, 딸이 산뜻하게 꾸며준 집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석 달을 보냈다. 허전한 마음을 기도와 일기를 쓰며 다독였고, 교회만 잠시 다니며 지친 몸을 쉬게 했다. 아이들은 수시로 전화하여 내 안부를 살폈다. 그사이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더 친해진 손주들이 서울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자랑을 들으며 나도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난 10월의 어느 날, 첫째 손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트남에서 찍어온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게 되었으니 꼭 오라는 초대였다.
휴학하며 처음 배운 사진인데, 같이 배운 팀과 함께 여는 첫 전시회라고 했다. 똑똑하고 야무진 우리 첫째 손녀의 목소리에 신기하게도 불끈 힘이 났다. 혼자 가는 길은 자신이 없었지만, 막내아들이 흔쾌히 동행해 주어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과 내가 직접 싼 유부초밥을 아들과 함께 먹으며 서울로 향하는 길은, '야호' 소리가 날 만큼 설레는 소풍길이었다.
전시관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첫째 손녀가 나를 안내해 주었다. 사진 속에는 베트남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와 고향을 떠나온 베트남여인들의 그리움을 달래줄 고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실력 있는 선생님과 가장 어린 우리 손녀부터 60대 어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1년을 준비한 이번 작업은, 방송국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손녀에게도 참 귀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전시회의 포스터 사진도 손녀의 솜씨라니 어찌나 대견하던지.
나는 손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30만 원을 주고 꽃이 있는 사진 한 점을 샀다. 기뻐하는 손녀의 모습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둘째 손녀의 오케스트라 첫 연주회도 있어서 참석했는데 큰 감동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송국 교향악단 출신 할아버지선생님께 기초를 배우고, 중학교 때는 독일 유학파 전공자인 교회 집사님께 배우며 실력을 키워온 아이였다.
특히 손녀가 쓰는 바이올린은 그 선생님의 친구분이 정성껏 만든 귀한 악기였는데, 피아노보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가보로 생각하고 딸이 사주었다.
주말이 되자 온 가족이 모여 대학교 대강당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연주하는 손녀딸의 모습이 멋있었고, 음악소리는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단풍 든 교정의 모습은 참으로 근사했다. 손녀의 학교를 보고 싶었던 내 소원도 하나님은 들어주신 것이다.
'내가 당신 몫까지 잘 보고 갑니다.'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건네니, 천국에 있는 남편도 화목한 우리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할 것만 같았다.
그 해 겨울방학에는 딸과 손녀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함께 지내주어 큰 힘이 되었다. 가족들의 정성 속에서 나의 건강도 점점 회복되어 갔다.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일흔아홉의 홀로서기>
그렇게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내 나이가 일흔아홉이 되었다. 노인대학에 등록하며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를 했고, 3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근처 복지관에 나가 점심을 먹고 치료실에서 친구도 사귀었으며, 세 곳의 노인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남편이 도맡아 했던 은행 일 등도 이제는 내가 직접 하며 나만의 시간을 꾸려나가야 했다. 나는 비로소 내 이름 석 자로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일흔아홉의 봄, 슬픔을 털고 일어선 나의 홀로서기는 새로운 생의 문을 열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