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회사의 기억

by 강명재

2003년 1월.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공기업의 신입사원이 되었다. 사회생활은 일보다 사람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르는 업무를 진행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것은 더욱 긴장되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기나긴 사회생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입사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한 중소기업을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 입장에서 고객사가 되는 기업이다. 회사 내부의 선배들을 넘어 외부 고객과의 만남이 다가왔구나. 새로운 긴장감이 몰려왔다.


방문하게 된 기업은 인형을 수출하는 기업이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사무실에서의 드레스 코드가 엄격한 시절이었다.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잔뜩 긴장하여 고객사의 문을 두드렸다. 40대 후반 정도되는 이사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사무실은 자그마했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사무실에는 이사님 혼자 근무하고 계셨다. 여러 개의 책상이 있었지만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즘에는 바이어 주문이 거의 없어서 혼자 근무하고 있어요." 이사님이 살짝 웃으며 말씀하셨다. 말씀 내용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시니컬한 뉘앙스도 아니었다. 이사님의 미소는 반가사유상이나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불가사의한 미소였다.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그러시군요..."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한국은 70-80년대, 인형 수출 대국이었다. 임금이 낮았던 시절이었고 한국인은 손재주가 야무진 데다 센스도 좋았다. 세련된 스타일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컬처를 떠올려보면 한국인이 얼마나 인형을 잘 만들었을지 짐작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신흥국에 밀려 인형 산업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인형을 제조해서 수출하는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곳곳에 인형이 놓여있었다. 미국 시장을 석권하였던 테디 베어도 있었다. 찾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귀여운 인형들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픽사의 '토이스토리'에 등장했던 버림받은 인형들이 떠올랐다.


어쨌든 이사님과 업무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다. 주로 수출하는 지역은 어디인지, 도와드릴 점은 무엇인 지를 물어보았다. 이사님은 물량이 많지 않지만 미국으로 수출 중이라고 하시면서 혹시 선진국 바이어 중 품질이 좋은 인형을 찾는 바이어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셨다. 사실 이사님은 크게 기대하시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공기업 신입사원이 속 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사님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와 차분한 말투로 상담에 응해주셨다. 취업준비 시절에 읽었던 경영서적을 상기하며 기업문을 두드렸는데 막상 머리에 떠오른 것은 문학이었다. 시련에 맞서는 인간의 존엄성.


거침없는 시대의 흐름. 류하는 매출. 당시 이사님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급류 속에서 허우적대거나 좌초한 보트 옆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조난자의 이미지가 떠오를 법하지만 그분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갯벌에 빠진 보트를 천천히 밀고 나가는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물가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솔직히 말해서 이사님께 바이어를 소개해 드리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한국에서 인형을 수입하려는 바이어는 만나보지 못했다. 중공업, 정보산업, 4차 산업혁명, AI. 시대의 물결이 휩쓸고 가는 와중에 인형을 포함한 많은 상품들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최근 들어서는 화장품, 식품 같은 한국의 소비재가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형 바이어는 찾기 힘들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장난감 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세상은 복잡하고 가차 없다. 거친 시대의 물결이 몰아닥칠 때, 우리는 허우적대거나 그 물결에 신나게 올라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파도를 맞으면서도 조금씩 나아가는 선택지도 있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당시 만났던 이사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요 몇 년간 여러 가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당시 이사님이 맞이하였던 위기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사님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허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 바꿔서 말해 보고 싶다.


인간은 실패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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