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와 문제집

by 강명재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 중에서)

어릴 때는 종종 "너희 앞에 놓인 인생은 백지다, 마음껏 꿈을 그려나가라"와 같은 말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글을 읽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80, 90년대 어른 중에서 실제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분은 없었지만 책이나 TV에서는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도 어렴풋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인생은 백지가 아니라 문제집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시지프스는 무거운 바위를 산정상까지 밀어 올리지만 또다시 굴러 떨어진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은희경 작가의 표현을 빌려보면 우리 모두는 '끝없이 문제집을 풀어나가는 시지프스'다. 다행히 내가 잘하는 과목이라면 그나마 낫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좀체 답을 구할 수 없는 과목이 문제집으로 주어지면 더욱 고통스럽다.


< 백지냐, 문제집이냐 >

어른들의 말씀이 완전히 틀렸던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백지로 된 스케치 북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백지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도 않다.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재능을 그려나가도 된다. 다만 스케치북이 한 권이라면 문제집은 백 권쯤 되는 것 같고 백지를 채워나가다 보면 문제집을 풀지 못할까 두려울 뿐.




문제집을 풀어나간다. 잠시 스케치북 펼쳐 슥슥 그려본다. 고개를 들고 둘러본다.

남들은 계속 문제집을 풀고 있다. 겁지겁 문제지로 돌아온다.

팬 끝은 문제집에 있지만 시선은 스케치북에서 좀 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스케치북이 적지 않게 채워져 있다. 그래, 다음에 다시 또 그리자.

조금씩이라도.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 애니메이션 '룩백' 포스터. 계속 그리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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