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은퇴가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자연스레'라는 표현을 썼지만 정말이지 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뒤늦게서야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쨌든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고하다 보니 '커피 값'을 아끼라는 조언을 많이 듣게 되었다. 작은 돈, 매일 지출하게 되는 돈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뜻인데... 일리 있는 조언이지만 슬며시 반항심이 올라오르기도 한다. 커피 값을 아낄 자세가 안 되어 있으니 역시 나는 돈을 모으기 힘든 건가.
커피에 조예가 깊거나 평소 커피를 애찬하고 다닐 만큼 푹 빠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커피를 꽤나 좋아한다. 커피에 왜 이렇게 끌리는 것일까.
첫 째, 커피는 '여가활동'이다. 인간이 하는 활동은 크게 '생존활동'과 '여가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쪽은 말할 필요 없이 후자이고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여가활동의 대표주자이다. 커피는 여유가 있을 때 혹은 여유를 찾고 싶을 때 마신다. 앞서 애기한 재테크부터 시작해서 노동, 운동, 외국어, 인맥관리. 이제는 AI 시대에 살아남기까지. 온종일, 365일 생존활동에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잔의 커피, 한 잔의 여유이다.
둘째. 커피는 '동반자'이다. 사무실에서 한 창 일 할 때이든 기차 창가에 앉아 여행을 할 때이든.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이든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이든. 조용히 책을 읽을 때이든 차분하게 음악을 들을 때이든. 커피 한 잔이 곁들여진다면 모든 순간이 더욱 특별해진다.
커피에 동반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것은 다른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고 잘 녹아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악을 들으며 산책할 수는 있지만 음악을 들으며 보고서를 쓸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있으나 좋은 결과는 장담 못한다.) 밥을 먹으며 대화할 수는 있지만 밥을 먹으며 공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커피라면 모두 가능하다. 커피는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줄 뿐, 자기에게 집중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셋째, 커피는 '대화'이다. 커피는 따뜻한 대화, 진솔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적격이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거나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싶다면. 술자리를 가지려 하기보다 커피 한 잔을 나누는 것이 더 좋다.
술자리에서는 대화가 과장되기 쉽다. 취중진담이 아니라 취중과장이 되는 것이다. 너무 애절하고. 너무 분하고. 너무 기쁘고. 그런 톤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알코올 성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안주로 먹는 삼겹살이나 치킨도 과장된 분위기 조성에 일조한다. 하지만 커피는 그렇지 않다. 커피잔은 따뜻하고 커피 맛은 그윽하다. 곁들여 먹는 케이크는 달콤하고 푹신하다. 커피 한 모금에 케이크 한 입이면 마음은 몽글해지고 기분은 차분해진다. 자기 마음을 담백하게 털어놓게 되고 상대분의 애기도 차분하게 들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커피는 대화를 넘어 평화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넷째, 커피는 '바로 지금'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식사나 술자리는 미리 약속을 해야 하지만 커피 한 잔은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식사 한 번 합시다.", "언제 술 한 잔 해요."가 얼마나 공허한 약속인지 한국인이라면 다 알 것이다. '언제가 한 번'은 결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커피는 '바로 지금' 함께 할 수 있다!
사무실에서 힘들어하는 후배가 있다면 커피 한 잔 하자고 제안해 보시기 바란다. 같이 술 한잔 하자고 얘기할 때보다 훨씬 좋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혹은 유달리 스트레스로 힘들어 보이는 팀장이 있다면 커피 한 잔 하자고 용기를 내어 애기해 보기 바란다. 그 어떤 아부(?) 보다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힘들어할 때 즉시 여유를 선물할 수 있는 있다는 것이 커피의 강점이다. 시간이나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것 역시도 "커피 한 잔 해요"라는 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요인이기도 하다.
다섯째, 커피는 '각성'이다. 다들 알다시피 커피는 각성 효과가 있다. 불면증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커피의 각성 효과는 꽤나 유용하다. 점심식사 후에 졸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있다면 든든하다. 셀러리 맨으로 일하다 보니 세미나나 포럼에 자주 참석하게 된다. 그런 행사장 앞에는 반드시 커피가 있다. 열심히 강의해 주시는 연사분에게는 미안하지만 세미나 장에서 졸리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다. 그럴 때는 입구 앞에 비치해 둔 커피 한 잔이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커피 값을 아끼라는 재테크 관점의 조언에도 나름의 의견을 남기고 싶다. 과도하지 않은 정도라면 커피 한 잔 정도는 합리적인 지출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아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면 커피보다는 명품이나 해외여행 쪽일 것이다. 일상 속에서 돈을 아껴야 한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커피값보다는 식비를 관리하는 것이 낫다. 식비는 커비값과 달리 필수지출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으나 비싼 음식, 뜨는 음식을 자주 먹다 보면 식비야말로 사치가 된다.
부자들은 커피 한 잔도 함부로 마시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자 중 상당수는 부자가 되기 전에도 커피를 마셨고 부자가 된 후에도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인 워런 버핏은 평생 콜라를 마시고 있다고 한다. 버핏이 콜라 값을 아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하루 커피 한 잔 정도는 죄책 감 없이 편안하게 마셔도 괜찮을 듯하다.
언젠가부터 직장인들이 식사 후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염려(?)하는 분들이 있다. 본인의 직장 주변에도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카페가 생겼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것은 사치스러워서가 아니다. 유달리 꽉 짜인 인생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나름의 낭만과 여유를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직장인의 식사시간은 보통 1시간이다. 식당과 직장 사이를 왕복하고 식사를 주문해서 먹고 하다 보면 1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런 와중에도 기어코 시간을 쪼개어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한. 점심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