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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재 Aug 22. 2021

술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네 단계

옛 유럽의 마을축제와 스테판 그라펠리의 After you’ve gone

- 동물은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사람은 동물이 될 수 있다.


원숭이, 사자, 양, 돼지. 술을 마시면 동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술 마시면 견공(?)이 된다.”라는 말을 쓴다. 알코올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동물처럼 되어간다고 비유한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이 과정을 좀 더 세분화하였다. 빅토르 위고의 위대한 걸작, 레 미제라블에서는 부르고뉴와 상파뉴 지방의 풍습 한 가지를 소개한다.


“혁명 전에는 어떤 고관대작이... 상파뉴나 부르고뉴의 어떤 도시를 통과할 적에... 네 가지의 포도주를 따른 네 개의 은잔을 바쳤다는 것이다. 첫 째 잔에는 원숭이의 포도주라고 씌어있고, 둘째 잔에는 사자의 포도주라고 씌어있고 셋째 잔에는 양의 포도주라고 씌어 있고 넷째 잔에는 돼지의 포라고 씌어 있었다.... 즉 첫 단계의 취기는 즐겁게 하고 둘째 단계는 흥분시키고 셋째 단계는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끝으로 넷 째는 바보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 레미제라블 2권 (민음사)

   

첫 잔을 마시면 나무 가지 사이를 누비는 원숭이처럼 즐거워하다가 둘째 잔에는 사자처럼 으르렁 거리게 되고 셋째 잔에는 양처럼 조용해졌다가 – 이 정도에서라도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 좋을 것을 – 끝내 네 잔까지 마시면 돼지처럼 어리석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돼지는 상당히 영리한 동물이라고 한다. 옛 프랑스인은 어디까지나 겉 모습을 보고 애기한 것이다. 16, 17세기의 저지대 화가들은 서민들의 축제 현장을 풍속화로 남겼다. 그들이 남긴 그림 속에서 동물처럼 되어가는 취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한 잔 술과 왕게임이 어우러지니 즐겁지 않을쏜가


< 야콥 요르단스 - 왕게임 축제 >

터질 듯한 축제의 에너지가 그림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 그림은 아무런 기술장치 없이도 4D 체험의 신세계를 선물한다. 귓 가에는 함성이, 코 끝에는 와인향이, 혀 끝에는 안주 맛이 맴돈다. 이 그림은 야콥 요르단스(Jacob jordaens)가 그린 ‘왕 게임 축제’이다. ‘왕 게임’이라면 혹시 진실게임과 함께 술자리 게임을 양분하고 있는 그 게임? 맞다. 바로 그 왕 게임이다. 이 게임의 역사는 생각보다 유구하다.


가톨릭 축제 중에 ‘십이야’라는 것이 있다. 성탄절인 12월 25일부터 시작하여 12번째 밤, 즉 1월 5일 밤에 열리는 축제이다. 1월 5일은 동방박사의 날(1월 6일) 이브이기도하다. 축제에는 즐거운 놀이가 필요한 법. 십이야 축제에서는 왕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룰은 간단하다. 케이크 속에 콩을 한 알 숨겨 두고 구운 후 참가자 수 대로 케이크를 자른다. 자신에게 배정된 케이크 속에 콩이 숨겨진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날 밤의 왕(콩왕, Bean King이라 부른다.)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히 신하가 되어 왕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 그림 속에서 왕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화면 오른쪽에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풍채 좋은 할아버지를 보라. 시원하게 한 잔 드시고 계신데 이 잔이 비워지는 대로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는 비록 왕은 아니지만 이 날 밤 최고의 패셔니스트라 할 만하다. 큰맘 먹고 오직 이 날을 위해 빨간 부츠를 구입했으리라. 화면 좌측에는 이미 오바이토 단계까지 넘어간 취객도 있다.


< 뭘 그리 보고만 있어요? 어서 빨리 여기 와서 한 잔 해요 >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제 각각 흥미롭지만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우리를 향해 살짝 돌아보고 있는 여인이다. 은은하지만 매혹적인 눈빛과 웃음으로 우리를 이 즐거운 술자리에 초대하는 듯하다. “뭘 그리 보고만 있어요? 어서 빨리 여기 와서 한 잔 해요.” 이 여인의 시선은 우리를 고전회화 앞에 선 감상자가 아니라 흥겨운 축제의 참석자로 만든다. 이 그림은 놀랍도록 현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종교나 신화, 역사가 아닌 서민의 삶을 묘사한 주제, 인물들로 화면을 가득 매운 클로즈업 구도, 이상화되지 않은 진솔한 모습의 사람들.

 

이 그림을 그린 야콥 요르단스는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의 거장 중 한 명이다. 루벤스, 반 다이크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당시 예술계에 몸 담았던 사람 대부분은 이탈리아 순례를 다녀왔지만 요르단스는 생의 대부분을 고향 근처에서만 보냈다. 그는 고향선배인 루벤스를 무척 존경했다. 당시 루벤스의 명성은 어마어마하여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대가들 못 지 않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분명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작품 주제는 사뭇 다르다. 루벤스가 이탈리아 풍의 종교화, 신화화를 다수 남긴 것에 반해 요르단스는 - 저지대 화가들의 특기였던- 장르화(풍속화)를 즐겨 그렸다. 그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지만 자기 주변을 눈여겨 보았고 선배를 존경했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요르단스의 그림을 보면 화가로서의 단단한 자존감이 느껴진다.


야콥 요르단스의 ‘왕 게임 축제’는 음주의 1단계, 즉 원숭이처럼 즐거운 단계를 보여준다. 원숭이 단계에서는 술이 순기능을 한다. 안타깝게도 단계가 올라갈수록 우려스러운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사자의 단계가 시작된다.     



- 성인을 기리는 축제는 어느새 광란의 과음으로 이어지고


< 대 피테르 브뤼헬 - 산 마르틴 포도주 축제 >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중앙에 있는 거대한 물체에 올라타고 있다. 짐작하겠지만 물체의 정체는 와인통이다. 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산 마르틴 포도주 축제’라는 그림이다. 피터르 브뤼헐은 야콥 요르단스보다 60여 년 앞 서 태어난 선배이다. 아들 피터르 브뤼헐도 화가였으므로 아들과 구분하여 대 피터르 브뤼헐( Peter Bruegel‘The Elder’)라고 부른다.


마을 사람 모두가 원숭이를 넘어 사자가 된 것 같다. 이쯤 되면 슬슬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산 마르틴 축제’는 11월 11일이다. (빼빼로 데이라 외우기 쉽다.) 이 즈음에는 보통 그 해의 첫 와인이 생산되는 시기이다. 어느 축제이든 술이 빠질 수 없는 법이지만 산 마르틴 축제는 더더욱 포도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참고로 산 마르틴은 천주교 초기의 성인으로 로마 장군 시절 헐벗은 걸인에게 옷을 잘라 건네준 일화로 유명하다. 그림 우측 하단, 백마에 올라탄 귀족 차림의 인물이 바로 산 마르틴이다. 한 손에는 걸인에게 옷을 잘라줬을 때 사용했던 검을 쥐고 있다. 거대한 와인 통과 산 마르틴의 모습에서 이 그림이 산 마르틴 축제를 묘사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마구잡이로 싸우는 두 남자와 산 마르틴 성인 >


너나없이 흥분해 있는 가운데 그 흥분이 지나쳐 싸움으로까지 이어진 사람도 있다. 화면 좌측을 보면 머리 끄댕이를 잡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일 것이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술이 들어간 김에 싸우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술에 취해 아무나 잡고 싸우는 것일 수도 있다. 고전 회화 속에서 싸움이란 장중하고 비장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리얼한 ‘스트리트 파이트’를 접하니 살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야콥 요르단스의 그림과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은 둘 다 마을 축제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요르단스 그림 속 인물들이 즐거운 애주가라면 브뤼헐 그림 속 무리들은 흥분한 폭도에 가깝다. 요르단스의 그림이 술자리를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브뤼헐의 그림은 조금 떨어져 과열된 축제 현장을 관망하는 느낌을 준다. 각각의 그림이 애기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다. 요르단스 그림이 즐거운 축제 현장을 기념사진처럼 보여주는 것이라면 브뤼헐의 그림은 과음이 만들어내는 어리석은 장면을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브뤼헐의 그림에는 한 방울의 교훈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림 한 구석 성인의 모습은 맹목적으로 쾌락을 좇기보다 이웃과 나누는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미 충분히 술을 마신 것 같지만 알다시피 두 단계가 더 남아있다. 양의 단계와 돼지의 단계로 넘어가자.



- 술독에 빠진 로마인들, 머지않은 제국의 몰락


< 토마 쿠튀르 - 타락한 로마인들 >


술의 마지막 3,4단계는 19세기 프랑스 그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의 ‘타락한 로마인들’은 얼핏 보기에는 술의 해악을 떠올리기 힘들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신고전주의 화가의 솜씨를 보여주는 이 그림에서 화창한 하늘과 장엄한 조각상이 먼저 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과 기념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요르단스 그림에서는 활기찬 건배사가 들려오는 듯하고 브뤼헐 그림에서는 흥분한 군중의 비속어가 들리는 것 같다면 이 그림에서는 골아떨어진 취객의 웅얼거리는 소리나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 정신이 몽롱해지면 상체가 앞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


술이 많이 들어갈수록 정신은 몽롱해지고 상체는 앞으로 고꾸라진다. 술잔을 높이 쳐들고 있는 청년 앞의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졸음에 빠졌고 탁자 앞에 주저앉은 남자는 상체가 완전히 꺾였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3단계, 즉 양의 단계에 접어든 사람들이다.


< 꽃을 들고 흐느적거리는 여인과 조각상에게 술을 권하는 청년 >

이 정도만 되어도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돼지의 단계에 접어든 사람도 있다. 화폭 뒷부분에는 넋 나간 사람처럼 화관을 들고 춤을 추는 여인이 있다. 화들짝 놀란 두 여인이 그녀를 끌어내리려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화면 우측을 보면 한 젊은이가 조각상에게 술잔을 권하고 있다. 망토가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니 왼 손으로 조각상의 어깨를 부여잡고서는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고 한 잔 하라니까.” 젊은이의 혀 꼬인 음성이 상상된다.      


< 로마의 타락을 바라보는 이민족과 로마인 >

한 편 이 그림의 좌우에는 로마 말기의 처연함을 상기시켜주는 인물군이 있다. 우측에는 두 명의 남자가 매서운 - 혹은 한심하다는 - 눈빛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이 남자들은 머지않아 로마를 무너뜨릴 게르만족 청년들이다. 좌측에는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과 그녀를 둘러싼 두 명의 남자가 있다. 이들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로마인으로 쾌락에 찌든 조국의 모습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직감하고 있다. 그토록 위대했던 로마가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 취한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

무엇이든 적당히 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음주만큼 ‘적당히’를 상기해야 하는 행위도 드물다. 술자리의 유쾌함을 담아낸 요르단스의 그림에는 과음을 경고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높이 치켜든 술잔 사이의 라틴어 문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취한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고단한 인생에서 종종 술의 힘을 빌어 원숭이처럼 즐겁게 노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돼지처럼 되는 것은 곤란하리라.



- 집시 음악의 흥겨운 리듬, 마을 축제의 서막을 올리다     


축제에 술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야콥 요르단스 그림 속, 17세기 유럽의 마을 축제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을까. 단순한 악기 구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흥겨움. 이러한 요소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마침 이에 딱 맞는 아티스트가 있다. 바로 스테판 그라펠리(Stephane Grappelli)와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다.

    

그라펠리와 라인하르트 콤비는 20세기 초중반, 재즈와 집시음악을 접목하여 음악의 지평을 넓혔다. 재즈와 집시음악의 결합도 혁신적이지만 재즈에 잘 사용하지 않는 바이올린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도 선구적이다. 그라펠리는 바이올리니스트라기보다 피들러(Fiddler)에 가깝다. 동일한 현악기라도 클래식에 사용하면 바이올린, 흥겨운 축제음악에 사용하면 피들이라고 부른다.


이 들 두 사람의 연주는 지금도 감상할 수 있으나 오래된 음원이라 듣기에 조금 불편할 수 있다. 대신 스테판 그라펠리가 디즈 디슬레이(Diz Disley)와 호흡을 맞춘 샌프란시스코 라이브 앨범에서 한 곡 추천하고 싶다. After You’ve gone이라는 곡으로 연주 시간이 6분 정도라 조금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급적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 구성의 묘미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음악이 시작하고 40초 정도는 바이올린과 기타가 합주한다. 이후에는 기타 솔로 연주가 이어지다가 3분 25초 정도가 되면 바이올린이 고음을 내지르며 솔로에 대한 찬사를 바침과 동시에 연주에 복귀할 것을 예고한다. 이후 3분 50초 경에 바이올린이 합류하여 연주가 끝날 때까지 말 그대로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흥분의 도가니는 클럽과 EDM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 축제와 집시 재즈 속에도 아드레날린이 있다. 비록 콩이 들어간 빵을 고르지 못했더라도 원숭이 술잔과 흥겨운 음악이 있는 한 나는 세상의 왕이다.


https://youtu.be/dMCfFwNq8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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