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정윤수 교수님이 진행하는 '도시극장'에 출연하게 되었다. 도시극장은 팟빵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다. 매거진 형태로 운영되는데 매달 한 개의 도시를 정해 역사, 예술, 음식 등 다양한 주제를 두고 심도 깊은 인터뷰를 진행한다. 2월의 도시는 바로 마드리드. 피디님이 본인이 출판하였던 '예술의 정원 마드리드 산책'이라는 책과 여기 브런치에 남긴 글들을 보시고 출연을 제의해 주셨다.
마드리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자칭 '마드리드 명예시민'이라 자부하며 마드리드의 예술을 알리는 것이 일생의 사명이자 즐거움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제안이었다. 문제는 현재 파나마에서 근무 중이라는 것. 얼핏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제안할까 싶었지만 음질 문제상 힘들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쉬운 마음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다. 아내는 쉽게 포기해 버린 나를 꾸짖었다. 지례 안 될 것이라 짐작하지 말고 화상 인터뷰를 적극 제안하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말투는 손가락으로 쿡 지르는 넛지가 아니라 등짝을 내리치는 죽도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와 전화를 끊고 즉시 이메일을 썼다. 마드리드의 예술에 대해서 꼭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화상 인터뷰는 어떨까요?
며칠 후 화상 인터뷰로 진행해 보자는 피디님의 답변을 받았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절감했다. 물론 두드릴 수 있는 용기는 아내가 주었다. 대체로 신중한 나와 달리 아내는 과감하다. 기회를 만드는 데는 신중함이 필요하지만 기회를 잡는 데는 과감함이 필요한 법.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고 칭찬을 들었다. 남편의 가장 큰 기쁨은 아내의 칭찬이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그간 도시극장에 출연했던 분들을 살펴보았다. 런던 편에는 유시민 작가님, 뉴욕 편에는 김현준 평론가님, 교토 편에는 이다혜 기자님. 그 외에도 대부분 교수님이나 유명 작가, 전문 기자 분들이 출연했다. 그야말로 쟁쟁한 분들이었다. 본인은 회사원이다. 중소기업의 수출을 지원하는 공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방송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부담감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묘한 자신감도 올라왔다. 시중에 있는 서점에서 마드리드의 예술을 집중 분석한 책은 본인 책 밖에 보지 못했다. ('마드리드'가 아니라 '스페인' 예술을 분석한 책이라든지 마드리드의 '예술'이 아니라 '관광' 관점에서 쓴 책은 많다.) 마드리드에서 3년 6개월간 근무하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미술관, 퇴근 후면 어김없이 집어 들었던 예술과 역사책. 교수님들이 쌓아 올린 경험과 학문에 비하면 당연히 부족하지만 아마추어로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아마추어란 무엇일까. 아마추어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평소 '정열적인 아마추어'가 많아야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이 올라간다고 생각해 왔다. 정열적인 아마추어란 요즘 유행하는 '부캐'라는 개념과도 비슷할 것이다. 샐러리맨도 퇴근하면 미술책에 빠져들고 자영업자도 휴무일에는 밴드 활동을 하고 운동선수도 주말에는 바리스타에 도전하고. 마드리드에 대해서라면, 미술에 대해서라면. 본인은 어엿한 아마추어다. 아마추어 스피릿으로 방송에 출연하리라.
피디님으로부터 인터뷰 질문지를 받았다. 퇴근 후 밤늦게까지 답변을 작성했다. 평소 잘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방송으로 나갈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 한번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미술관, 왕궁, 콘서트, 산책로. 할 애기가 너무 많았다. 어차피 방송에서 하고 싶은 애기를 다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성실히 준비했다. 100을 준비해야 10을 말할 수 있는 법이다.
다음 단계는 피디님과의 리허설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해보니 말투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문 방송인이 아니다 보니 매끄럽게 얘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녹음 내용을 듣고 스스로 말투를 바꿔 보기도 하고 아들 앞에서 얘기해보면서 코칭을 받기도 했다. 원고 내용도 좀 더 가다듬었다.
드디어 방송일이 되었다. 현지 시각으로 밤 9시. 정윤수 교수님과의 본방 녹음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방송 경험이 많으시고 지적이신데다 성품도 온화하셔서 편안한 분위기로 이끌어주셨다. 미처 예상치 못 한 질문도 하셨지만 평소 갖고 있던 지식으로 무난히 대답했다. 처음에는 조금 긴장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는 교수님과의 대화 자체가 재밌게 느껴졌고 계속해서 더 얘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 가까이 흘러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인터뷰가 끝나니 밤 11시가 되어 있었다. 곧바로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캄캄한 밤하늘을 내다보았다. 흥분된 마음과 대조적으로 파나마의 밤은 고요했다.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후 보름 가까이 지나 방송이 업데이트되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단숨에 방송을 들었다. 일단 녹음이 제대로 되었는지가 염려되었다. 아무래도 화상 인터뷰이다 보니 음질이 열악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또렷하게 들렸다. 앞서 얘기했듯 방송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방송인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으나 이 부분 또한 피디님이 애써주신 덕에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된 것 같았다. 금강산 청산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뒷 산 계곡물 정도의 흐름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방송 내용 관련해서는 꼭 하고 싶었던 애기 중 세 가지가 잘 담긴 것 같다. 첫 째는 '마드리드 왕궁(팔라시오 레알)의 진가'이다. 유럽에서 마드리드 왕궁보다 대단한 왕궁은 본 적이 없다. 왕궁 내부의 미술 수준만 본다면 마드리드 왕궁은 베르사유보다 훌륭하다고 믿고 있다. (정원은 베르사유가 단연 압권이다.)
둘 째는 '프라도 미술관의 숨겨진 보석'이다.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 중에는 '시녀들'과 '쾌락의 정원', '옷 벗은 마야, 옷 입은 마야'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해설이 있다. 따라서 대부분 설명을 지나치는 벨라스케스의 '이솝'과 수르바란의 '성 베드로의 환영을 보는 성 베드로 놀라스코'를 소개했다.
셋 째는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의 가치'이다. 티센은 소위 마드리드의 골든 트라이앵글 중 하나이지만 프라도의 명성이 워낙 높고 견고하다 보니 다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티센의 컬렉션은 세계 최일류 수준이다. 작품 수준과 함께 놀라운 점은 작품의 '다양성'이다.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유럽 미술에서 미국 미술까지. (서양 미술에 관한 한) 시간과 장소를 총망라한 티센의 컬렉션은 마드리드를 서양 예술의 수도 중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애기가 무엇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청취자분들이 재밌게 들었느냐일 것이다. 최대한 냉정하게 재미있는지 아닌 지를 판가름 하려 애써 봤지만 역시 나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청취자분들이 즐겁게 들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예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흔히 과학은 답을 찾고 예술은 질문을 찾는다고 한다. 예술이 건네주는 질문지를 받아 볼 때면 남들과 대화하고 싶어 근질근질 해 진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자비로 프라도 미술관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설명회를 하기도 했고 일산에 있는 서점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직장 특성상 한국과 해외를 번갈아가며 근무하다 보니 지금처럼 해외에 있는 동안에는 직접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신 브런치에 글을 남기곤 한다.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다시 많은 분들과 예술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팟빵으로 방송을 들으신 분들이 마드리드를 그리고 미술을 좀 더 사랑하게 되셨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지만 만일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그 여행지는 마드리드가 될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 왠디 수녀의 '유럽미술 산책'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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