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의 재즈 그리고 커피

일요일 밤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

by 강명재
< 커피숍, 파라곤 내부 >

일요일 밤 10시. 대부분의 사람이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 어느 커피숍에 들어섰다. 가게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서부터 터질듯한 하드 밥 재즈 연주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둑한 조명 아래, 몇몇 손님이 음악에 빠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볼륨이 컸기 때문에 스피커와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커피숍 전체를 둘러보기에 좋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커피숍 이름은 '파라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커피를 파는 곳이다. 만약 이 가게를 '재즈 카페'라고 소개하면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파라곤은 한 밤에도 커피를 마시는 장소이다. 주류도 일부 판매하지만 어디까지나 커피가 메인이다.


파라곤은 매주 일요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풀 볼륨'으로 재즈를 틀어준다. 굳이 일요일 밤에 이곳을 찾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일요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는 '태풍의 눈' 속에 머무는 시간이다. 월요일부터 몰아닥칠 광풍을 앞두고 긴장된 고요가 찾아오는 시간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얼마 남지 않은 평화를 즐기려 몸부림치지만 마음의 평화는 갈구할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법이다. 결국 몸은 아직 편안한 집안에 있지만 정신은 이미 태풍 속으로 뛰어들고야 마는 비극이 벌어진다.


일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던 나에게 파라곤이라는 존재는 강력한 유혹이었다. 파라곤은 일요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를 '풀 볼륨 재즈 오디오 타임'이라고 부른다. 일요일 밤에 이곳을 찾고야 말리라. 얼핏 월요일에 휴가를 내고 찾아갈까,라고도 생각했으나 그런 나약한 생각은 던져 버렸다.


다음 날이 휴가인 상황에서 파라곤을 찾는 것은 토요일 밤에 외출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궁극의 일요일 밤'을 찾아가는 취지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시험을 목적에 두고 만화방을 찾았던 10대 시절의 객기를 중년에 되살려 보고 싶기도 했다.


< 파라곤의 카운터 석 >


워낙 볼륨이 커서 주문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는 마스터에게 '카페오레' 한 잔을 주문했다. 스피커에서는 페즈(Pe'z)의 'Hey! Jordu!'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페즈는 일본의 스트리트 재즈 밴드이다. 본인들은 재즈라는 틀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지만 틀에 갇히기 싫다는 그런 스피릿이 역설적이게도 재즈스럽다.


페즈의 연주는 에너지가 가득하다 못해 폭발하는 듯하다. 평소 헤비메탈도 자주 듣기에 웬만한 박력에는 놀라지 않지만 페즈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움찔했다. 일요일 밤에 페즈라니. 매주 일요일 밤에 풀 볼륨을 선사하는 마스터답게 선곡에서 호기로움이 느껴진다.


카페오레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콩의 씁쓸함과 우유의 고소함이 기분 좋게 퍼져나간다. 파라곤은 자가배전 커피숍이다. 커피콩을 직접 볶은 후 핸드 드립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판매하는 라테 대신 카페오레를 마실 수 있다.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하는 라테에 비해 드립커피를 베이스로 하는 카페오레는 쓴 맛이 덜하고 고소한 편이다.


일요일 밤의 커피는 일요일 밤의 풀볼륨 재즈만큼이나 일탈스럽다. 각성 효과와 이뇨 작용이 있는 커피는 일요일 밤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뭐 어떤가. 10시간 후면 사무실에 앉아있게 되든가 말든가 그냥 재즈를 듣고 싶고 커피를 마시고 싶을 뿐이다. 새까만 밤하늘에 재즈 선율이 녹아들듯이 칠흑같은 커피에 순백의 우유가 섞여 들어간다. 지금 이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음료는 위스키도 아니고 칵테일도 아니고 바로 카페오레다. 내친김에 치즈 케이크도 주문한다.


정면에 JBL의 전설적인 스피커, 파라곤이 보인다. 가게 이름, 파라곤은 이 스피커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1957년에 탄생한 파라곤은 당시 퍼져나가던 신기술, 스트레오 사운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디자인 관점에서도 아름답게 제작한 명기이다. 마스터는 손님이 앉았을 때의 귀 높이에 맞춰 스피커를 설치해 뒀다. 커피도 음향도 음악도. 모두 세심하다.


< 손님 귀 높이에 설계한 전설의 스피커, 파라곤 >


스피커를 둘러싼 벽면에는 재즈 음반이 빼곡히 꽂혀 있다. LP가 5,000여 장 CD가 3,000여 장이라고 한다. 시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웬만한 취향은 다 맞출 수 있는 컬렉션이다. 마스터가 수많은 음반 중에서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에 올리는 모습에 괜스레 뭉클해졌다. 음악 앱에서 클릭 한 번으로 듣고 싶은 음악을 재생하는 것에 비해 분명 느리고 불편하지만 그런 느림과 불편함에는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키스 자렛의 'My Song'이 흘러나왔다. 키스 자렛이 그저 흘러가듯 피아노 반주를 깔아주면 얀 가바렉은 읊조리듯 색소폰 멜로디를 얹어놓는다. 앨범 재킷도 그렇고 멜로디도 그렇고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아홉살 인생을 살았던 40년 전 부산시 광안리의 골목들을 헤매어 본다.


가게 안의 몇몇 손님들은 대부분 홀로 앉아있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대화를 하기 위해 파라곤을 방문하는 사람은 없다. 볼륨이 너무 커서 대화하기도 힘들고 억지로 대화를 하려다 보면 주변 재즈팬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 나 역시 홀로 앉아 음악도 듣고 이런저런 공상도 하였다.


어느새 11시 30분이 되었다. 스피커에서는 미셸 페트루치아니 트리오의 'Cantabil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Cantabile(칸타빌레)는 '노래하듯이'라는 뜻의 음악 용어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바이올린으로 Cantabile를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노래하는 음색과 가장 비슷한 악기가 바이올린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노래하듯이'는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듯이'에 가까운 의미이다.


하지만 미셸 페트루치아니는 재즈 피아니스트다. 페트루치아니의 Cantabile는 '자유분방한 콧노래'에 가깝다.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이나 기쁨을 노래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분식집을 찾아갈 때의 발걸음. 그 발걸음을 닮은 리듬.


Cantabile 연주가 끝났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가게 문을 열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일요일 밤을 즐겁게 보냈는가. 그렇다. 월요일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는가. 솔직히 그렇진 않다. 하지만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진다고들 하지 않나. 페트루치아니의 Cantabile를 떠올리며 콧노래를 불러보았다. 조금씩 어깨가 들썩거리고 입꼬리는 올라가고 마음은 유쾌해졌다. 일요일 밤이든 월요일 아침이든.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세상은 꽤나 즐거운 곳이 된다.


< 페즈, 키스 쟈렛, 미셀 페트루치아니 트리 >




'파라곤'은 일본에 있는 커피숍이다. 나는 이곳을 가본 적이 없다. 너무 가고 싶어지다 보니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게 되었고 그 상상을 글로 풀어봤다. 파라곤을 줄곧 커피숍이라고 호칭했지만 정확히 얘기하면 '킷사텐'이다. 일본의 커피숍은 '카페'와 '킷사텐'으로 나뉜다. 카페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그와 유사한 매장을 말한다.


이에 반해 킷사텐은 카페보다 좀 더 어둡고 좀 더 개인적인 취향이 묻어나며 에스프레소보다는 자가배전을 기본으로 한 드립커피를 제공한다. 일본에서는 무언가에 대해 자기만의 철저한 신념이나 고집, 룰이 있는 경우 '코다와리'가 있다고 한다. 킷사텐은 커피와 공간에 대한 주인장의 코다와리가 묻어나는 가게이다.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끈끈하고 가게의 역사도 오래된 경우가 많다.


파라곤은 일본 본토의 최남단이라는 가고시마 현, 이치키쿠시키노시에 있다. 1976년에 개업했으니 50년 가까이 흘렀다. 이치키쿠시키노시는 웬만큼 일본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지명일 것이다. 이 도시는 인구가 26,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재즈에 관한 한 최고 수준의 킷사텐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일본은 재즈 애호가가 무척 많고 그만큼 재즈 카페, 재즈 킷사텐도 무수히 많다. 각 분야의 애호가들이 만들어가는 일본 문화의 저변이 솔직히 부럽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빌보드 차트로만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한 밤의 파라곤 입구 >


파라곤에 대한 정보는 일본 잡지에서 접하게 되었다. '&Premium'에서 발행한 '킷사텐에 대한 것, 그리고 커피 이야기'라는 무크지에서 보았는데 인테리어, 커피, 찻잔, 디저트 등 다양한 테마에서 바라본 훌륭한 킷사텐을 소개하고 있었다. 파라곤은 'Soundscapes'이라는 테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앞서 얘기했듯 인구 3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고 이런 작은 도시의 재즈 킷사텐이 50년 넘게 이어지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으며 일요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풀 볼륨으로 재즈를 틀어준다는 과감한 아이디어에 세 번째로 놀랐다.


< &Premium 특별호 >


파라곤 사장님과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평소에는 손님들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음악을 크게 틀지 않지만 일요일 밤에는 재즈 팬을 위해 풀 볼륨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모험에 가까웠을 이 시도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가게가 있는 가고시마뿐 아니라 규슈 내 다른 도 혹은 더 먼 곳에 거주하는 재즈팬들도 일요일 밤에 파라곤을 찾는다고 한다. 전국의 재즈팬이 사장님의 '코다와리'에 공명한 것이다.




평소 킷사텐에 관심이 많았던 데다 재즈를 좋아하고 거기다 '일요일 밤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 헤매는 본인으로서는 풀 볼륨 타임에 파라곤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쉽게도 몸은 중남미의 파나마에 있다. 언젠가 그곳에 가고야 말리라고 버킷 리스트에 등재해 놓았으나 그 외의 방법은 없는 걸까.


'와유'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 화가인 종병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종병은 젊을 적 산수를 두루 구경하였으나 늙고 병들어 여행이 힘들어지자 산수화를 보며 상상 속에서 산과 물 사이를 거닐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누워서 유람하기, 즉 와유라고 불렀다. 일요일 밤이면 재즈를 틀어놓고 파라곤의 사진을 보며 와유에 나선다. 마지막 곡은 물론 미셀 페투르치아니 트리오의 Cantabili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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