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벚꽃 아래의 즐거운 마음

by 강명재


벚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현재 파나마에서 근무 중이라 벚꽃을 볼 수는 없다. 파나마시티 도처에 꽃들이 피어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보던 벚꽃과는 느낌이 다르다. 일 년 내내 무더운 곳이다 보니 꽃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없다. 집 근처 편의점 앞에 있던 벚나무가 그리워진다.


일본은 예로부터 벚꽃을 좋아했고 전국에 걸쳐 수백 개의 벚꽃 명소가 있다. 자연히 많은 화가들이 벚꽃을 화폭에 담았다. 가츠시카 오이가 그린 '야앵미인도'라는 작품이 있다. 가츠시카 오이는 일본 우키요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셋째 딸이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 발생한 다색 목판화다.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제작한 '가나가와 해변 아래의 높은 파도'는 미술사에서 빼놓지 않는 걸작이다.




< 가츠시카 오이 - 야앵미인도 >

'야앵미인도'는 제목 그대로 밤벚꽃 아래 서 있는 미인을 그린 작품이다. 오른쪽 높이 솟은 소나무와 왼쪽 기다란 석등 사이에 호리호리한 여인을 그려 넣었다. 일반적으로 보아오던 우키요에와 비교하면 세로가 확연히 길다. 이 작품은 '육필 우키요에'이다. 판화로 찍어낸 그림이 아니라 붓으로 종이나 비단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림의 첫인상은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이다. 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키아로스쿠로'가 떠오른다. 카츠시카 오이는 밤풍경에 스며든 빛을 그리는 데 능숙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미술학자들이 그녀의 그림을 램브란트나 라투르의 작품과 비교해 왔다. 석등의 빛은 따뜻한 노란색 계열이고 석등의 빛을 받은 벚꽃은 새하얗다. 여성의 얼굴 역시 일본 미인화의 전통대로 순백에 가깝다. 발치에 있는 낮은 석등과 치맛자락에 비친 불빛은 운치 있다. 까만 밤하늘에는 별빛이 점점이 박혀있고 소나무는 밤하늘보다 더 짙은 어둠에 잠겨 있다.


< 조르주 라투르 - 촛불 앞의 마리아 막달레나 >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나무와 벚꽃의 대비에도 눈길이 간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 그에 비해 벚꽃은 보름 남짓 꽃을 피운 후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조선의 선비들이 찬탄했듯 겨울이 오면 소나무의 푸르름이 빛나겠지만 지금은 벚꽃의 시간이다.


이 그림 속의 여성은 누구일까? 미술학자들은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 '슈시키죠'로 추청 한다. 그 녀는 13세 때 우에노에 꽃놀이를 갔다가 '우물가 벚꽃에 취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13세에 이미 술맛을?!) 우에노 공원은 지금도 도쿄의 대표적인 벚꽃 명소이다. 우키요에 속 미인들은 유곽 여성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카츠시카 오이는 밤벚꽃 아래의 미인으로 선배 예술인 격인 슈시키죠를 선택했다. 슈시키죠는 17세기 후반 무렵의 뛰어난 여성 가인을 통칭하는 '겐로쿠사배녀' 중 한 명이었다.


< 밤하늘로 올라가는 벚꽃잎, 불티 >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가츠시카 오이는 벚꽃과 시인의 손을 굉장히 근접하게 배치해 뒀다. 마치 시인의 손끝에서 벚꽃이 피어나는 듯하다. 한편 화가는 벚꽃과 밤하늘의 별도 아주 가깝게 그렸다. 그러다 보니 별빛이 벚꽃잎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닥불이 공중에 불티를 뿌리듯 시인의 손 끝에서 뻗어 나온 벚꽃이 밤하늘에 하얀 꽃잎을 흩뿌리는 중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의식으로 '모노노아와레'와 '오카시'가 꼽힌다. 모노노아와레가 슬픔, 무상감, 체념이 스며들어 있는 비애미라면 오카시는 밝고 즐거운 멋을 말한다. 벚꽃은 화려하게 피어났다가 얼마 가지 않아 쓸쓸히 꽃잎을 떨구기에 '모노노아와레'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카츠시카 오이의 작품은 무척 서정적이지만 비애미가 깃들어 있지는 않다. 야앵미인도 속 벚나무와 시인의 모습에서는 밝은 기운, 즉 오카시가 느껴진다.


어느새 오십이 되다 보니 일상에서 괜히 울적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세상만사를 덧없이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슈시키조가 13살에 취하는 맛을 알았듯 중년의 나이에도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오카시'의 관점에서 보면 벚꽃이 지는 것은 슬픔기만 한 것이 아니다. 매년 때가 되면 꽃은 피고 진다. 밤에 바라보는 하얀 벚꽃 잎은 별빛인 듯싶다. 세상은 즐겁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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