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마라 -
(아래 글에는 스포가 있습니다.)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마라'
최근에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의 아카자를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다. 악인도 나쁜 짓을 하게 된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행보다 사연에 더 무게추를 올려놓다 보면 정의의 저울은 '무죄' 쪽으로 기울게 된다. 피해자는 더 큰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허탈함을 감추기 힘들 것이다. 아카자는 아픈 과거를 핑계로 용서받을 수 있는 수준의 악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들인 연출에 힘입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거듭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귀멸의 칼날에 대한 평은 '액션과 미장센은 압권이지만 스토리는 빈약하다'로 요약된다. 확실히 귀칼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기록적인 흥행은 액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공의 또 다른 비결은 바로 '캐릭터'에 있다. 일본 만화나 애니의 강점이 바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귀칼에서도 일본 만화산업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무한성편 1장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캐릭터는 '아카자'인 듯하다. 부제에서 이미 어느 캐릭터에 악센트가 찍혀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아!카!자! 재!래!'.
'탄지로와 기유, 상현을 넘어서라!', '렌고쿠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같은 제목을 기대했다면 갸우뚱했을 수도.
아카자의 인기는 애절한 사연에 있다. 악당이 나쁜 짓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식의 묘사 방식은 앞서 애기한대로 '악인에게 서사를 주자 마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소년점프 - 원작이 연재된 잡지이다 -는 '논란의 여지'를 '성공의 동력'으로 만들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아카자라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는 작가 못지않게 편집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소년점프'는 편집부의 입김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흔히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라고 한다. 나쁜 사람을 충분히 만나보지 못 한 어린 시절에는 이 말에 수긍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직간접적으로) 무수히 많은 악인을 만나다 보면 이 문장에 공감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다다르기 쉽다.
그런데. 귀멸의 칼날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현 5 루이가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겨 죽어갈 때, 상현 6 다키와 규타로가 남매의 인연을 되새길 때, 우리는 '너희들의 죄는 사악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애처롭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죄와 사람을 분리하든 죄와 사람을 함께 고려하든. 어쨌든 '죄'와 '사람'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유독 아카자에 대해서는 균형 유지에 실패한 듯하다. 아카자의 스토리를 보고 있으면 죄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불쌍한 사람만 남는다. 아카자는 '죄는 밉지만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착한 사람'으로 비친다. 물론 곰곰이 뜯어보면 아카자에게도 입체적인 서사를 부여한다. (스승은 아카자에게 천국에 데려갈 수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착한 사람' 묘사가 너무 길고 강렬한 바람에 하현 5나 상현 6에 비하면 아카자 측이 압도적으로 강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재미있게 관람했다. 하지만 아카자에게는 몰입할 수 없었다.
아카자의 사연과 악행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아카자의 비겁한 태도부터 얘기해보자. 아카자는 약자를 혐오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가난하다 보니 아빠를 지키지 못했다는 과거사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물에 독을 탄 이웃집 도장 탓이 큰 것 같다. 즉 약자는 비겁한 짓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상월이 된 아카자는 자신이 그렇게 혐오한다는 비겁한 존재가 되어있다. (목을 베거나 햇볕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죽지도 않고 상처도 즉시 치료되고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지니고서는 상처 입고 죽어가고 체력도 금세 바닥나는 인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염주 렌고쿠가 죽어갈 때, 탄지로는 아카자에게 악을 쓰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도망가지 마, 이 비겁자야! 우리 귀살대는 언제나 너희에게 유리한 밤의 어둠 속에서 싸우고 있어! 살아있는 인간이! 상처도 쉽게 아물지 않는데!"
아카자는 도망가면서도 태양 때문에 물러가는 것이지 약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고 억울(?)해 한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유형의 악당이 적지 않다. 자신이 가진 특혜에 대해서는 아예 무감각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점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사람 말이다. 자신의 승리가 무엇 덕분인 지, 상대의 패배는 무슨 탓인지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
헤비급 선수가 미니멈 급 선수를 KO 시키고서는 방송국 카메라에 대고 약자는 혐오스럽다고 소리 질러대는 꼴이다. 만약 아카자가 "나는 약자가 싫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지기로 했고 마침내 상현이 되었다."라고 했다면 - 찬성은 못해도 - 이해는 갔을 텐데 "나는 비겁한 약자가 싫다. 그래서 비겁한 강자가 되었다.(?)"라는 논리는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아카자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유사한 면이 있다. 불행한 한 남자가 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자기 합리화를 한다. 마지막에는 순수한 여성에 의해 구원받는다.
아카자에게 쿄유키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소피야와 비슷한 존재이다. 두 인물이 구원받는 방식도 유사하다. 아카자나 라스콜니코프 모두 악행에 대한 반성이나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은 없고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평온을 되찾는다.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느닷없이 소피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라스콜니코프에 당혹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카자를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순수한 여성만 있다면 악당이나 악행은 덮어지는 건가.'
아카자는 바스러지지 직전에 쿄우키에게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는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용서해 줘!" 솔직히 이 장면에서는 살짝 얼굴을 감싸 쥐고 외면하고 싶어졌다. 마지막 순간에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해야 할 대상은 아카자에게 희생당한 무수한 사람들이지 않나.
아카자가 저질렀던 악행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고 봐야 한다. 불행한 과거나 순수한 여인의 사랑으로 덮어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철저한 악당으로 묘사한 도우마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아카자는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죽은 사람의 가족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애니메이션에 뭘 그리 정색하고 달려드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귀칼의 팬이고 팬이 된 이유는 액션을 넘어 깊게 생각할 거리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한성 편 이전에 작가가 보여준 훌륭한 균형감각과 입체적인 시각이 아카자 편에서는 다소 빛바랜 것처럼 느껴져 아쉬움이 들뿐이다.
아카자 최후의 순간에 쿄우키가 등장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다양한 인물이 다양한 각도에서 아카자에게 말을 건네었더라면 훨씬 풍성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승인 케이조가 '상현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너의 대답이었냐'라고 준엄하게 묻거나 우물에 독을 푼 검술도장 당주의 아들이 '너도 나랑 별다를 바 없구나'라고 비꼬아준다면. 단순한 애잔함을 넘어 복잡한 심경을 전해줬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레이어가 두터워야 한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아카자에 대한 묘사는 작가보다 편집부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앞서도 얘기했듯 귀멸의 칼날이 연재된 '소년점프'지는 편집자의 입김이 세기로 유명하다. 독자들이 어떤 요소를 좋아하는지 면밀히 파악한 후 그를 바탕으로 작가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작가인 고토게 코요하루는 거의 신인에 가까우니 더욱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무한열차 편에서 탄지로가 아카자를 비겁자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떠올려 볼 때, 작가는 아카자에게 순수한 피해자 역할을 부여하려 한 것 같지 않다. 무한성 이전에 악역들을 묘사하는 입체적인 방식을 떠올려봐도 역시 그러한 추측을 하게 된다. 즉 '죄'와 '사람'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아카자를 만들어 나가려 했으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편집부의 영향이 강해진 것은 아닐지.
십이 귀월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악하다. 하현 1 엔무는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사디스트이고 상현 4 한텐구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가해자이다. 상현2 도우마는 윤리가 실종된 엘리트주의자이고 상현1 고쿠시보는 콤플렉스에 짓눌린 존재이다.
그럼 아카자는 어떤 콘셉트이었을까? 아카자는 당초 '미워할 수 없는 언더독'으로 설정된 것 같다. 하지만 아카자에 대한 묘사는 선을 넘었다.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수준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지닌 효자이자 사랑꾼'이 되어버렸다.
과연 악인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서사를 주면 안 되는 걸까?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르는 요인으로는 구조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이 있다. 만약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 요인이 사회 구조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면 정상 참작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있다.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에게 가혹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아카자도 애절한 사연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자의 악행은 이해 가능한 수준을 까마득히 넘어버렸다. 장발장이 아무리 굶주린 조카들을 위한다지만 연쇄 살인을 하면서 빵을 훔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중죄이다.
여담이자만 개인적으로는 2장과 3장을 주도해 나갈 인물들에 더 애정이 간다. 아카자와 쿄우키의 사랑보다는 사주(이구로 오바나이)와 연주(칸로지 미츠리)의 사랑이 더 애절하게 다가왔다. 엄청난 비극을 겪은 후의 다짐으로 보자면 충주, 쿄츄우 시노부의 이야기가 더 심금을 울린다. 충주가 겪은 비극은 아카자가 겪은 비극 이상이지만 충주는 무차별적인 분노가 아니라 정의로운 분노에 목숨을 건다. 2장에서는 시노부의 희생이 어떤 의미인 지 드러날 것이다. (벌써부터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한편 상현 1 고쿠시보는 아카자에 비해 인기가 없지만 자칫 신파 일색이 될 수도 있었던 소년만화에 묵직한 무게를 실어줬다. 앞서 애기한 일본 만화 속 캐릭터가 가진 힘은 아카자가 아니라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