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의 벚꽃 향기

by 강명재

한국은 벚꽃이 한창인 듯하다. 올해도 파나마에서 근무하고 있는 중이라 벚꽃을 볼 수 없다. 대신 사진이나 유튜브로 벚꽃이 흐드러진 풍경을 찾아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벚꽃을 보면 롤모델이 한 명 떠오른다. 무라사키 시키부. 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녀이자 문인이다. 벚꽃을 보며 롤모델을 떠올리는 것도 뜬금없을 텐데 그 롤모델이 일본 중세 시대의 문인이라니. 하지만 무라사키 시키부는 분명 직장인 - 특히 관리자 -의 롤모델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일본의 전통 시, '와카' 한 수 덕이다.



(아래의 내용은 임찬수 교수님의 '백인일수'에서 인용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1007년의 늦은 봄, 교토. 한 궁녀가 천황에게 여덟겹 벚꽃을 헌상하는 의식이 치러진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벚꽃은 '소메이 요시노'로 꽃잎이 다섯 장이다. 꽃잎이 더욱 풍성한 벚꽃은 '야에자쿠라(여덟겹 벚꽃)'라고 부른다. 당시 교토에서는 여덟겹 벚꽃을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 날 헌상한 여덟겹 벚꽃은 교토 이전의 도성이었던 '나라'에서 공수해 온 귀한 존재였다.


< 여덟겹 벚꽃, 야에자쿠라 >


벚꽃을 헌상한 궁녀의 이름은 '이세노 다이후'. 비교적 궁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이었다. 좌대신이었던 미치나가는 시를 한 수 읊어보라고 명한다. 천황을 비롯한 대신들, 궁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세노 다이후에게 꽂혔을 것이다. '어디 신인의 솜씨 한 번 들어봅시다.' 팽팽한 긴장감.


새내기 궁녀는 낭랑하게 시 한 수를 읊는다.


いにしへの 奈良ならの都みやこの 八重桜やへざくら けふ九重ここのへに 匂にほひぬるかな

그 옛날 나라 도성의 여덟 겹 풍성한 벚꽃.

오늘 이 구중궁궐 안에 그 향기 풍기누나.


짧은 시 낭송이 끝나는 순간, 궁궐 안이 소란스러울 정도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중세 시대의 일본 시를 읽으며 그 옛날 일본의 궁정인처럼 감탄하기는 힘들다. 일단 일본어에 정통하지 않는 이상 운율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시의 구조와 기법, 분위기는 음미해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시인 '와카'는 31자로 구성된다. (1,2자 차이 나기도 한다.) 이세노 다이후의 시도 일본어 발음 기준으로 딱 31자다. 이 여성 가인은 31자를 두 문장으로 나눈 후 두 문장 속의 모든 단어를 대조 형식으로 배치한다. 이토록 짧은 두 문장 속에 무려 4번의 대조가 이어진다.


'그 옛날 - 오늘',

'나라 도성 - 이 궁궐',

'여덟겹 - 구중궁궐(아홉 개 담 속의 궁궐)',

'풍성한 벚꽃 - 향기'


앞의 두 가지 대조는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옛 도성이었던 나라에서 오늘 궁궐이 있는 교토로'.


세 번째 대조는 숫자를 이용한다. '여덟겹 벚꽃이 아홉 개 담으로 둘러싸인 궁궐 속으로'. 이 부분은 자연과 인공(인간이 만든 궁궐)의 대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산과 들에 핀 벚꽃이 인간이 만든 깊숙한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시각과 후각을 대조시킨다. '풍성한 벚꽃'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향기'는 말할 필요 없이 후각을 자극한다. 31자 안에 과거에서 현재로의 흐름, 옛 도성에 대한 향수와 현 도성에 대한 애찬, 자연의 아름다음과 궁궐의 위엄(은밀함), 시각적인 화사함과 코를 간지럽히는 후각이 모두 들어가 있다. 와인으로 치면 (외래어 남발 주의) 플루랄, 후르티, 너티, 스파이시, 얼시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와카계의 '신의 물방울'인 셈이다.


총명한 신입사원의 활약 덕에 궁궐 안 분위기는 봄볕보다 따뜻해졌을 것이다. 물론 공기 중에는 '시기'와 '질투'도 떠돌아다니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 천황의 거처였던 교토 고쇼 >




이렇게 얘기하고 보면, 도대체 이 이야기가 '무라사키 시키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 지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천황에게 벚꽃을 헌상하는 의식은 무라사키 시키부의 담당이었다고 한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이세노 다이후보다 먼저 궁궐에 들어온 선배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대단했던 그녀는 훗날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도 일컫어지는 '겐지 모노가타리'의 저자이기도 하다.


< 왼쪽, 무라사키 시키부 / 오른쪽 이세노 다이후 >


선배이기도 하고 글재주도 남달랐던 무라사키 시키부이기에 벚꽃 헌상 의식은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시 한 수를 읆었더라도 분명 멋진 작품이 나왔을 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라사키 시키부는 이렇게나 좋은 기회를 후배에게 양보했다. 직장 생활로 치자면 사장님을 비롯한 최고위 임원들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


회사를 다니다 보면 무라사키 시키부 같이 행동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기도 힘들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실천하기 힘들다. 좋은 기회를 양보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성과 가로채기, 책임 회피만 하지 않아도 나쁘지 않은 상사라 평가받을 것이다.


이세노 다이후의 와카는 시 자체가 주는 풍류도 좋지만 선배는 후배에게 좋은 기회를 양보하고 후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멋지게 살려내는 훈훈한 사무실 분위기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회사에서 꽤나 나이를 먹고 나서 이 고사를 읽으니 무라사키 시키부가 롤모델로 여겨졌다.


물론 그 당시 상황이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본인의 재능이 뛰어났던 만큼 라이벌에 대한 질투도 컸다고 한다. 그 녀와 함께 근무했으며 역시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세이 쇼나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이세노 다이후에게 좋은 기회를 양보한 것은 재능 있는 후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소위 '사내 정치'의 일환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훈훈하게 다가온다. 굳이 좋은 기회를 후배에게 양보하지 않고 기회를 독차지하면서 보스로 군림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가. 무라사키 시키부 역시 기회를 양보하지 않더라도 잘 나가는 선배라는 지위를 이용해 후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녀는 분명 좋은 상사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여름은 소리의 계절이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소리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 가을은 빛깔의 계절이다. 파란 하늘과 붉은 단풍. 겨울은 촉각의 계절이다. 살에 닿는 싸늘한 공기. 그렇다면 봄은? 봄은 누가 뭐라 해도 향기의 계절이다. 사방에 가득한 꽃 향기.


바야흐르 향기의 계절, 봄. 사무실에는 어떤 향기가 감도는 걸까.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전쟁터의 탄피 냄새, 인사 발령이라도 나는 날에는 짭조름한 피눈물 냄새가 풍겨올 것이다. 지리한 일상 속 권태로 아예 무취의 상태가 이어질 수도 있고. 성과와 경쟁으로 작동하는 사무실에서 좋은 향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점심 식사 후에 뿌리는 패브리즈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무실에도 좋은 향기가 날 수 있다. 선배는 후배에게 좋은 기회를 양보하고, 후배는 그 기회를 살려 좋은 성과를 내고, 동료들은 다 같이 그 성과를 축하해 준다면. 꽃 한송이 없는 사무실에도 꽃 향기가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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