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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지 않는 위로

[Lyrics] 6: 권진아 - 위로

by 민석

ⓒ 멜로가 체질 (2019)


드라마 '멜로가 체질' 정주행을 시작했다.


아껴두고 아껴두던 드라마였다. 독백의 대사가 좋다, 정봉이랑 천우희가 나온다 정도로만 떠오를 정도로 기억에서 멀어지던 찰나에, 미룰 이유가 없다며, 자신의 인생작이라며 각본집까지 사두었다는 S의 말을 듣고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역시나, 대사 하나하나가 좋아서 필사를 해두고 있다.


권진아의 위로가 이 드라마의 ost인줄 전혀 몰랐다. 그래서인지 극 중에서 노래가 나올 때마다 진폭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첫 회사 생활에 힘들어하던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위로하려 하지 않는 그대 모습, 옆에 있어주려 하는 그대 모습이 가장 큰 위로라는 가사가 마음을 울린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나를 사랑하는
세상과 다른 맘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런 그대가 나는 정말 좋다

나를 안아주려 하는 그대 그 품이
나를 잠재우고 나를 쉬게 한다
위로하려 하지 않는 그대 모습이
나에게 큰 위로였다

나의 어제에 그대가 있고
나의 오늘에 그대가 있고
나의 내일에 그대가 있다
그댄 나의 미래다

나와 걸어주려 하는 그대 모습이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쉬게 한다
옆에 있어주려 하는 그대 모습이
나에게 큰 위로였다

나의 어제에 그대가 있고
나의 오늘에 그대가 있고
나의 내일에 그대가 있다
그댄 나의 미래다

권진아 <위로>




잔나비 2집 <전설>

노래는 상황을 환기(recall)할 때가 많다.


힘들었던 시절에 들었던 노래를 몇 년 뒤에 들으면 그 때의 감정과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이어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치게 만드는 그런 곡들이 나에게도 세 곡 정도 있다. 위로는 그 중 한 곡이다.


잔나비 - 꿈과 책과 힘과 벽
짙은 - 잘 지내자 우리
권진아 - 위로


잔나비의 꿈책힘벽이 나에게는 가장 상징적인 노래다. 최정훈과 김도형도 잔나비의 노래 중 가사가 가장 좋은 노래 1위로 꼽을 정도로 가사가 주는 여운과 울림이 깊다. 어른이 가져야 할 책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을 이렇게도 덤덤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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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잔나비 콘서트를 갔을 때 첫 곡으로 편곡 버전의 꿈책힘벽이 나왔고, 나는 정말 과장 없이 첫 곡부터 무너져내려서 펑펑 울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세상에 나와서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었달까. 후렴과 아우트로 파트만 들으면 그렇게도 서럽게 눈물이 난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갈거야

잔나비 <꿈과 책과 힘과 벽>



ⓒ 미 비포 유 (2016)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은 힘든 순간에 곁을 내어준 채로 말없이 다독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해결해야하는 사람은 본인이고, 타인은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옆에서 다독여주면 나에게는 그걸로 충분하다.


회복 탄력성을 이야기하거나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꼭 등장하는 말들 중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 는 말이 항상 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더 힘들어지고 더 옥죄어오는 문제들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훌훌 털고 일어내라는 말은 마치 일말의 기만이나 조롱처럼 폭력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물론 상대에게 티를 내진 않겠지만 말이다.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갖지 않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무심코 던진 돌 따위에도 쉽사리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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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로가 체질 (2019)


우리는 절대 타인을 100% 이해할 수 없다. 직접 그 상황을 온전히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상황을 알기 전에 (알고 난 이후에도) 그리 쉽게 고통의 범위나 경험의 총량을 단정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다. 아니, 싫다기보다 그냥 정말 다른 부류 정도로 해석하고 더 이상 라포를 형성하지 않는다. arm's length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대문자 NFJ (요즘 P를 점점 장착해나가고 있지만) 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관찰력이 꽤 오랫동안 뛰어났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그들에게 관심이 많거나 그렇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상처를 받고 기분이 나쁘거나 속상했는지 되뇌어보는 과정에서 관찰하려는 습관이 자연스레 생겨났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기분 나쁜 행동과 말들은 타인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이므로, 타인들에게 스스로 같은 행동을 전하기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상극에 있는 인간 군상들의 말본새에 나도 모르는 새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상대가 기분 나쁘겠다 하고 무조건 반사처럼 마음 속에서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하지만 구태여 내가 계몽하거나 교화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들의 방식은 그들의 방식대로 의미가 있고 존중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예의 없이 상대에게 쉬운 말을 던지지 못 하는 성향이고, 점점 더 그렇게 변해왔다. 말은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고, 두 번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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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관식당 (2025)


흑백요리사 방영 이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셰프 중 한 분인 최강록 님.


나는 최강록 님을 보고 무해한 사람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꽤 오래 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한 지점을 모두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의 무게를 아는 것이다.


절대 본인의 전문성이나 자신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타인을 하대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프레이밍될지언정 항상 꾸밈없이 진솔하고 담백한 문체와 어투로 일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식당을 보면서 최강록님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 하며 몇 번을 생각했다.


자신의 전문성을 갖고서도 항상 겸손하고 성실하며, 타인에게 섬세하고 상냥하며, 말의 무게를 알기에 절대 쉽게 입을 떼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런 담백하고 진솔한 태도가 자신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난 사람.


그런 삶을 사는 어른이 되어야겠다.



ⓒ 나의 아저씨 (2018)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말없이 그저 곁을 내어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포용의 방식이다.


상대의 호흡을 다그치지 않아야 하고,

상대의 경험을 순전히 내 상황에 빗대어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하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힘든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보살피려 하거나(돌봄 반응), 피하려 하거나(회피 반응)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로하려 않은 채 그저 옆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섣부른 위로의 말들이 상대에게 다그침으로 돌아가는 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절대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우선하지 않고, 상대의 존엄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내가 당신의 곁에 있으니, 스스로의 속도에 맞춰서 회복할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포용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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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비포 유 (2016)


연애든 결혼이든,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좋을 때보다 나쁠 때를 극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연애 초반의 설렘과 긴장이 걷히고 나면, 둘은 필연적으로 갈등 혹은 시련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힘든 상황을 함께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믿음이 커질 것인지 작아질 것인지 명확해지고, 사랑을 앞으로도 계속 줄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게 된다.


나는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서, 내 마음이 빨리 편해지고, 불편한 상황이 빨리 해소되기만을 바라며 갈등을 대처하려고 했던 적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쉽사리 상대의 상황을 이해한답시고 공감의 말들을 내뱉고, 내 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해결방안을 제시해보고.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나의 힘듦을 기다려주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내 이야기를 하면 더 힘들어하거나, 들어주지 않으려 하니 나 역시 입을 닫고 혼자 마음을 졸이는 결론에 항상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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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서로의 상처를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하고 고귀한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세상과 다른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위로하려 하지 않아도 위로를 받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말보다 깊은 위로는,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사랑임을 다시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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