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조금 각진 모서리가 있는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몽돌해수욕장에 갔다가 널려있는 동글동글한 돌을 보고 우리 회사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호텔 밥을 먹는 일은 모난 외모와 성격을 깎고 깎아 모서리진 곳 없이 말끔한 모습을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고객들의 편안한 휴식과 힐링을 댓가로 돈을 받는 일이기에 내 기분에 상관없이 일정한 정도의 미소와 친절을 공급해야 하는 것이 호텔직원들의 일이었다. 고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 또한 있지만,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미소와 친절을 공급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미소짓는 법과 용모, 말투를 다듬는 서비스 교육 따위를 받아야 했다.
나는 사실 프런트 직원들을 고객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하는 직원이었던 까닭에 고객과 직접적으로 만날 일은 많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에 다니는 이상 언제라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했으므로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교육에 참여해야 했다. 여기에 여자 직원들은 시간을 따로내어 화장과 머리스타일에 대한 교육을 추가로 받았다. 각 직별의 여자 최선임 직원들이 나서서 좀 더 생기 있어 보이는 화장법을 알려주고, 얼굴형 마다 각각의 단점을 보완하는 헤어스타일을 가르쳤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지만, 누군가의 잔머리가 거슬리는 곳, 내 화장법이 다른 누군가에게 불편을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호텔이므로 주의깊게 들어야하는 교육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직원들은 서로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다. 직업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음을 가장한 외모품평도 공공연했다. 직원들은 ‘용모단정’의 필요를 앞세워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는 점들을 찾아내기 바빴다. 특히 호텔에 오래 근무했던 같은 사무실 선배의 기준은 엄격했기에 나도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해서 너무 튀는 부분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확인 해야 했다. 내가 나를 검열하는 일은 피곤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지니 다른 직원들의 튀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동료들이 하고 오는 귀걸이 반짝임 정도와 치마길이, 신발 모양이 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매일 컴퓨터만 잡고 있던 터라 안경을 써야 하나 싶을 만큼 눈이 나빠졌지만, 거슬리는 것을 찾아내는 일에 있어서는 내 눈은 갈수록 밝아지는 것 같았다. 급기야 엄격했던 선배의 기준이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내가 찾지 못했던 것이 있다. 프런트에 신입사원이 사무실에 인사를 하러 온 날이었다. 단정한 차림인 신입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는데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앞자리에 앉던 선배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너도 알지?’하는 눈빛을 보냈기에 무언가 정말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림짐작했을 뿐이었다. 팀장님이 ‘안경 썼네’하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서야 ‘잘못된 안경’이 눈에 반짝하고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여직원들끼리 모여 화장과 머리스타일에 대한 교육을 들을 때에도 안경을 쓴 사람이 없었다. 안경은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암묵적인 금기사항이었지만, 완벽한 서비스직이라고 할 수 없었던 나만 잘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남자직원들은 안경을 쓰는 경우도 많아서 안경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내 안에 스며들어온 후천적 남녀차별 본능이 신입사원의 차림이 어색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이 많이 안 좋아서요’하고 해맑게 웃는 신입사원은 그 사무실에서 혼자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내남녀평등교육을 받은 사무실 사람들이 대놓고 지적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금테안경은 참 반짝거렸다.
지극히 성차별적이지만 모두가 지키고 있던 이 안경에 대한 규칙은 그 이후로 내가 타인의 용모단정을 확인하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누가 안경을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체크했다. 얼마나 집착적이었는지 심지어 안경을 쓰는 남자 직원들이 무테안경만 쓰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누가 안경을 쓰는 게 무슨 상관인가’하는 나의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이 이상한 규칙은 내 마음으로 들어와 칼같이 안경을 쓰는 직원과 쓰지 않는 직원들을 구별해냈다. 영화 연가시에서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처럼 내 몸에 붙은 눈과 내 생각은 따로였다. 그런데 정작 어떤 고객도 내 직장동료의 몇 가닥 잔머리와 금테 안경에 별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안경이 내 눈에 띄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하나는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줄자와 가위를 들고 이리저리 재단하듯 동료들을 보던 눈은 오히려 내 행동들까지 재어가며 잘라내고 있었다. 컴퓨터를 보며 나빠진 눈 때문에 안경을 맞출까 고민하다가 귀찮다는 핑계로 안경점에 가지 않고 버텼는데, 암묵적인 규율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그런 고민도 포기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규율을 잘 지키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더 나빠지는 눈과 여성차별적인 규율까지 잘 지키는 사원이라는 알량한 타이틀. 결코 달가운 명예는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경악한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남의 얼굴에서 안경을 찾는 일을 그만둘 필요를 느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이름표 위치, 솟아 나온 잔머리들이 눈에 밟혔지만 애써 무시했다. 바싹 긴장하며 거슬리는 것들을 찾던 에너지가 줄어들다 보니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프런트 신입 직원의 금테 안경 속에 약간 긴장한 눈빛이 보였고, 매일 뿌리는 헤어스프레이에 질식되어 반짝거리는 프런트 직원들의 심각한 두피 상태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짠하고 미안한 마음도 생겼다.
잘 꾸며진 고통을 볼 수 있었음에도 나는 정작 퇴사 할 때까지 내 안경은 맞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무서웠고, 안경을 쓰고 난 후의 구설수가 두려웠다. 어쩌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팀장님이 신입사원에게 한 것처럼 ‘안경 맞췄네’하고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을 재단하던 눈으로 스스로를 검열하고 검열해서 바닷가 몽돌처럼 동그랗게 만들다보니 내가 너무 작아져서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예전의 모난 나였으면 그런 압박을 훌훌 털어 넘겨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호텔에서 만들어진 나는 그렇게 하다가는 모래처럼 부셔져 없어질 가루가 될 것 같았다. 다시 조금 각진 모서리가 있는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사라져 없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돌맹이같은 사람은 되고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