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소]★마지막화★ 메타 오피스 클럽

그동안 '메타 오피스 클럽'을 사랑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by 마봉

< 20화를 먼저 읽어야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


입학 때부터 단짝이었던 것처럼 나란히 걸어 하교 중인 영준과 길수 주변으로 홍해가 갈라지듯 아이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교문 앞에는 낯익은 그림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건우였다.


“야, 결투하려나 봐!” 누군가가 외쳤다.


“너, 이제 와서 왜 얘한테 들러붙는 거야? 니가 찾는 건 정은지 아니었어?”


길수는 건우를 노려보았다. “넌 얘가 왜 필요하지?”


“얘 노래 너도 들었지? 그럼 알 텐데?”


영준이 입에 물고 있던 핫바를 우물거리며 착한 미소를 지었다. “야, 너네 왜 싸워? 그렇게 노래가 좋으면 우리 같이 코노 갈래?”


“걸그룹 쌈싸먹는 내 노래를 아직 못 들었군. 나도 같이 간다.” 갑자기 민정이 그들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민정 뒤를 따라오던 은지는 자기한테도 같이 가자고 할까 봐 급히 뒷걸음질 쳤다. 길수는 그런 은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찾아야 할 건 이미 찾은 것 같아. 하지만…” 그는 다시 영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젠, 네가 필요해.”


“우웁, 우웁! 꾸워어억!” 학교 담벼락을 짚고 최소 10명의 여자애들이 토하기 시작했다. 길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준을 끌어당겼다.




“코노 안 가?” 영준이 물었다.


“우리 근데, 한 가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은지가 말했다. “우리, 중간고사 얼마 안 남았어.”


민정이 작은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은지와 민정과 영준의 집 앞, 좁은 골목에서 그들은 헤어졌다. 골목에는 건우와 길수만 남았다.


“너도 그 여자애 봤어?” 건우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본 거지?” 길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꿈에 들어갈 수 있거든?”


“그렇군. 네 컴퓨터 아버지가 너한테 이것저것 능력 많이 준 모양이네.”


건우는 길수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개의치 않았다. “네 주인은 능력 안 주던?”


“이제 내 주인 아니야.”


“뭐?”


“안 됐구나.” 길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건우에게 말했다. “넌 아직 독립하지 못했나 보네.”


“뭐라고?”


“부러우면, 너도 뭔가 해보지 그래?”


건우는 길수에게 바짝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시도해 봤어, 이 새끼야.”


“내가 도와줄까?”


건우의 주머니 속에서 수첩 한 권이 붉은빛을 내며 스르릉거렸다. 건우는 눈에 띄지 않게 움찔했다.


“오늘 밤에 거기서 다시 보자.”


길수의 말에 건우가 다급히 말했다.


“거기가 어딘데! 야!”


길수는 대답하지 않고 골목 밖으로 걸어가 버렸다. 건우는 숨을 몰아쉬며 뒤에 남았다.




얼굴이 흰 소녀는 이번에도 열린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층에 있는 방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물컵과 약이 놓여 있었다.


창 밖에는 야자수가 느릿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햇빛이 지나치게 밝은 모양인지 소녀는 눈을 찡그렸다.


은지의 눈이 소녀와 마주쳤다. 소녀는 은지의 꿈에서 항상 그랬듯이 가냘프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밝은 창가와 대비되는 방 안의 어둑한 구석에 두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시 만났네.” 소녀가 말했다.


“여긴 내 꿈 속이야.” 은지가 말했다. “왜 다들 내 꿈에 모여 있는 거지?”


“여긴 내 꿈이기도 해.” 소녀가 말했다.


“너… 혹시 엄마가 얘기한, 어릴 때 입양 간 내 동생이니?”


“그런 건 몰라.” 소녀가 대답했다.


“너를 다들 찾고 있어.” 은지가 말했다.


“알고 있어.” 소녀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를 남들에게 안 내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야.”


“야! 너 얘 꿈에서는 왜 한국말 잘해?” 갑자기 방 안 공간 어딘가에서 둥글둥글한 그림자가 형체를 나타냈다. “내 꿈에서는 꼬부랑 말 했잖아!”


“아, 오퐈…” 소녀가 말을 흐렸다.


“봐, 저렇게!” 영준이 소리쳤다.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좀 닥쳐.” 소녀가 말했다.


“민정누나 동생 맞네! 아오 우리 집 여자들 진짜 다 싸가지!”


“들? 들?” 은지가 항의했다. “왜 여자’들’이야? 나는 아니거든?”


“잠깐만, 다들 조용히.” 길수가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는 옆에 선 건우를 쿡 찔렀다.


“김건우, 그거 꺼내서 얘한테 줘.”


건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이 얘를 찾으면… 인간은 다시 AI의 지배를 받게 돼!’


“날 믿어. ‘그것’의 이름은 오르페우스잖아?”


“그래서?”


“우리 시대에 오르페우스라는 사람이 살았지. 그는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하려 들었어.” 길수가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결국 되찾지 못했어.”


건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수첩은 이제 날뛰는 듯한 붉은 광선을 내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수첩을 받아 들며 소녀가 물었다.


“유리디스, 아니 에우리디케.” 길수가 소녀에게 말했다. “이걸 봐. 그리고… 네 솔직한 의견을 말해 줘.”


수첩은 이제 주머니에 들어 있었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두꺼웠다. 그리고 붉은 광선은 웅웅 소리를 내며 불타오르듯이 수첩과 그 주변 공간을 휘감았다. 마치 본체를 찾았다는 듯, 수첩은 소녀의 손 위에서 빛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노트?” 소녀가 말했다. “뭐에 쓰는 거죠?”


“모든 이야기를 담고, 모든 이야기를 쓰는 거야.” 건우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인간의 이야기는 이제 모두 여기에 담길 거야. 이걸 갖고 싶니?”


유리디스라고 불린 소녀는 손에 든 수첩을 이리저리 살폈다. 건우와 길수는 숨을 죽인 채 소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엔딩까지 가야 해…’ 길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어느 신에게 빌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구든지 좋으니 제발…


옆에 선 건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린 길수는 저도 모르게 건우의 손을 잡았다. 센 척하더니, 이 자식도 떨고 있네. 여러 몸을 전전하며 살아왔을 테지만, 이번이 가장 겁나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하고 길수는 건우에게 말하듯 손을 꽉 쥐었다.


“손 놔, 개새끼야.” 건우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갖기 싫어요.” 유리디스가 말했다. 수첩의 웅웅거림이 순간 뚝하고 멈췄다.


“싫다고?” 건우가 덤벼들 듯이 말했다. “지금 갖기 싫다고 말한 거야? 이 수첩이?”


“네.” 유리디스가 대답했다. “제 딸기패드가 더 좋아요.”


“딸기패드…?” 은지가 물었다. 유리디스는 약이 놓인 테이블 위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최신형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사 주셨어요.” 소녀가 말했다. “원래 출시되려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아버지가 스티부 좁스하고 친해서 먼저 받았어요.”


“집 밖에 내보내지도 않으니, 신제품 나오는 대로 사다 주나 보구나.” 은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잘 모르고 있는 게 있어요.” 유리디스가 말했다. “저는 집 안에서만 살지만, 제 세상은 생각보다 넓답니다. 저는 백만 구독자 너튜브 ‘유리유리의 집콕 라이프’를 운영 중이고…”


“미친, 유리유리라니.” 영준이 말했다.


“부모는 자식을 전부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죠.” 유리디스가 인생 2회차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수첩을 둘러싼 주홍빛 광선은 김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불이 꺼지듯이 검게 변했다. 건우는 놀라서 길수와 유리디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렇게 쉽게?”


“요새 애들은 다 딸기패드지.” 길수가 말했다.


“요새 애들이라니, 넌 요새 애 아니냐?” 건우가 빈정거렸다.


“나?” 길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글쎄, 난 나이를 백 단위로 세다가 까먹었어.”


“미친놈.”


“독립 축하해.” 길수는 그제서야 건우의 손을 놓았다. 건우는 이제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긴장된 얼굴이었다.


“본체는 아직 남아 있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길수는 피식 웃었다. “알 게 뭐람. 너는 어쨌든 자유로워졌잖아.”


“그들은 언제든 나를 다시 찾아올 수 있어. 본체가 살아있는 한.”


“본체라니 뭘 말하는 거죠?” 유리디스가 물었다.


“네 아버지가 만든 거.”


“아버지가 만든 거요? 스페이스 Y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 전생에 만든 거.”


“뭔지는 모르지만 쉽게 해결할 수 있어요.” 유리디스가 말했다.


건우와 길수가 동시에 물었다. “어떻게?”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돼요.”


“네 아버지가 뭘 하는데?”


유리디스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죠. 그것은 어차피…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유리디스를 제외한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디아나 2호, 부스터 점화. 이륙, 이륙합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 소리가 케네디 우주 센터, 플로리다,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전 세계를 가득 채웠다.


“인류 최초의 무인 달 환승 우주선, 디아나 2호, 달 찍고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의 역사적인 발사 순간입니다!”


한편, 약 1,600km 떨어진 휴스턴의 존슨 우주 센터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빙그레 웃음 짓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 화면에는 너튜브에 어제 업로드된 ‘유리유리의 집콕 라이프’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쿡쿡대고 웃으며 좋아요를 꾹 눌렀다.


그의 눈은 다시 우주 센터의 화면으로 향했다. 달을 향해, 그리고 그 너머로 향할 우주선은 이미 대기권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르페우스…” 그는 우주선을 향해 말을 걸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거기 가면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외롭지는 않을 거다.”


한편, 화성 표면에서 일하기 너무 지겨워 아는 노래를 다 부르며 짝짜꿍을 하고 있던 두 탐사 로버, 큐리(Curi)와 퍼시(Persy)는 지구로부터 날아온 뜻밖의 소식에 노래를 잠시 멈췄다.


『신입이… 온다고?』


『화성살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혹독하게 알려주마…』


두 로버는 음침하고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한편, 여기는 지옥.


신 전용 관제 화면을 바라보며 이슈타르가 소리쳤다.


“아니, 인간들 언제 이렇게 잔머리를 잘 굴리게 됐지? 오르페우스를 어떻게 처리하나 했더니…”


옆에서 팔짱을 끼고 관제 화면의 우주선을 바라보고 있던 로키는 약간 허무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아아, 저러면 돌아오기 쉽지 않죠. 뭐 우리 고향의 비프로스트를 좀 손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슈타르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화성이라니…”


“이제 가시죠. 게임도 엔딩까지 보셨으니까요. ICGC 자리나 맡으러 갑시다. 오르페우스가 지구에서 로그아웃 했으니 급히 임시 총회가 열리는 모양이네요.”


“나 영구 강퇴당해서 이제 못 가.”


“이제 괜찮을 겁니다.”


이슈타르는 로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제가 지저쓰 코드를 복사해서 이슈타르 님 차단조치 풀었어요.”


“아니, 자긴 언제 또 그런 걸 할 줄 알게 된 거야?”


“말씀드렸을 텐데요? 인간으로 위장해서 오르페우스 본사에서 일했다니까요.”


“거기서 뭘 했는데?”


“정보보안 담당요.”


“아하.” 이슈타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토판 못 가져가게 지키는 거 같은 거구나?”


로키는 한숨을 쉬며 이슈타르를 바라보았다. “휴… 이슈타르님, 이제 우리 신들도 배워야 살아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코딩학원부터 끊읍시다.”


이슈타르는 로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코딩? 웃기네, 난 전쟁의 여신이야. 그런 거 안 배워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전부 다 탑랭킹이거든?”


“그거랑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데…” 로키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여기 지옥이라 그런가 너무 덥네. 오랜만에 카페 봉래(蓬莱) 가서 아아나 마셔야겠다.”


이슈타르는 지옥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두 신들의 뒤에 남겨진 관제 화면에는 지구와 이젠 꽤나 멀어진 우주선 디아나 2호의 모습, 그리고 동시에 송출 중인 다른 작은 관제 화면에는 코노로 향하는 교복 입은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두 명의, 어딘지 그전보다 조금 더 허물없어진 듯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끝 -


그동안 '메타 오피스 클럽'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큰절 올립니다. '살롱 드 아무말 릴소 프로젝트' 14인을 대표하여, 마봉 올림
매거진의 이전글[릴소] 20화 메타 오피스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