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소] 20화 메타 오피스 클럽

삼각김밥 아니고, 삼각관계

by 마봉

제길, 또 시작이다. 눈부신 금빛 선들이 하늘로 뛰어오르듯 솟구치고, 부서진 벽돌 조각들이 누군가의 손짓을 따라 어둠 속으로 쏟아져 내린다. 매서운 검날의 파편들이 쌩하니 날아와 영준의 볼을 스치고 사라진다. 아, 그것은 검이 아니었다. 유리보다 더 날카롭고 불꽃보다 더 뜨거운 그것은, 한 장 한 장마다 1억 원이라고 쓰여 있는 수표였다.


수표를 향해 뻗은 영준의 무기력한 손은 마치 자기 손이 아닌 것 같다. 아, 다시 이 꿈이다. 하지만 꿈이니까 이 모습도 나야. 영준은 허공에 덧없이 허우적거리던 자기 손을 바라본다. 그 손은 통통하고 짤뚱한 원래의 영준의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더 길고, 혈관이 살짝 도드라진, 날씬하고 긴 손가락이다. 마치 꿈속의 영준의 모습처럼.


어딘가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모습을 보고 싶다. 퉁퉁하고 둥글둥글하고 떡볶이 먹다가 떡이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한, 쌍둥이 누나조차 야, 돼지! 라고 부르는 두툼한 모습이 아니라, 가끔 꿈에서 나 자신으로 나타나는 날렵하고 탄탄한 몸에 큰 키의 잘생긴 어른 남자의 모습을.


“오퐈, 여기 커울!”


꿈속에서 누군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앞에 거울을 가져다 놓는다. 발음에 꼬부랑 말투가 섞인 걸로 보아 교포인 것 같다. 이상하다, 나는 교포 중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거울 속에는 차은*처럼 이목구비 대칭이 수학적으로 완벽한 잘생남이 서 있다. 등 뒤에는 천사처럼 날개가 펄럭인다. 그는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건 좀 이따 하고 거울부터 본다. 그게 더 중요하다.


“이게… 나?”


영준은 저도 모르게 날렵한 턱선의 자기 얼굴을 손으로 쓸어본다. 바지 단추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터지는 퉁퉁한 배 대신 초콜릿 같은 복근이 선명한 배도 쓸어본다. 꿈인 거 알지만, 깨고 싶지 않다. 영원히, 포에버, 에이엔니, 이 얼굴과 이 몸으로 살고파…


“야! 돼지!”


아시발꿈. 현실은 쓰고 초콜릿은 달다.


“야, 너 또 밥 처먹다 말고 멍 따냐? 또 꿈꿨냐?”


민정은 밥상머리에서 젓가락을 손에 든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영준에게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누가 보면 저 남매 사이 디게 나쁘네,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영준은 안다. 진짜 사이 나쁜 남매는 밥을 먹다 엎어져 죽지 않는 한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민정은 말은 저따위로 하지만 사실은 친절한 누나다. 좀 무식하게 힘이 세고, 싸가지없게 말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 우억!


“야, 씹냐?” 영준의 등짝에 퍽 소리가 나며 민정의 매서운 손이 내리쳐 온다. 꿈에서 본 그 수표 조각들도 이렇게 매서웠다. 왠지 그 수표들도 민정의 손에서 날아왔을 것 같다.


“등에 날개 돋고 잘생긴 남자 되는 꿈?”


“신경 끄셈!”


“그러니까 꿈이지 돼지야, 밥이나 빨리 처먹고 학교나 가!”


민정은 이미 다 먹고 일어났다. 영준은 시계를 보고 재빨리 밥과 반찬을 입 속에 욱여넣었다. 밥상 너머를 보니 은지도 왠지 오늘따라 퀭하다. 민정은 현관에 둔 가방을 어깨에 메며 소리쳤다.


“야, 넌 또 왜 멍 때려? 너도 꿈꿨어?”


“응.”


“뭐, 너도 등에 뭐 돋았냐? 가지가지하네 진짜.”


민정은 현관문을 쾅 닫고 사라져 버렸다. 조용해진 집안에는 엄마가 출근 전에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만이 두 사람의 귓가를 때렸다.


“굿모오오오닝~ 에브리바디! 아우, 아직도 눈이 반쯤 감겨 계신 거 아니죠? 헤이, 웨이크 업! 지금 꿈에서 본 멋진 남자 생각에 설레서 멍 따며 출근하시는 거 다 알아요! 텐션 업! 에너지 업! 자, 다 같이 외쳐볼까요? 따르릉 따르릉 내가 니 오빠야~ 여러분 출근길은 내가 책임진다아아악!"


‘그 얼굴이 흰 여자아이가 또 꿈에 나왔다.’ 은지는 김에 밥을 싸서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어. 어제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야.’


“야, 나 먼저 간다!”


영준마저 한 입에 밥 세 숟갈씩 먹어 밥공기를 다 비우고 뛰어나가 버렸다. 마지막에 밥 먹는 사람이 밥상을 치우고 가야 한다. 젠장, 또 나네. 은지는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밥공기를 설거지통에 넣으면서 꿈에 나왔던 또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래.’ 현관문을 나서며 은지는 중얼거렸다. ‘그건 길수였어. 모습과 목소리까지. 길수가 맞아.’


길수는 은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하얀 그 여자아이를 보고 있었다. 길수는 그 여자아이를 보더니 “찾았다.”하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야, 오늘도 앞 안 보고 다니냐?”


눈앞에 웬 벽이 나타났다. 아, 이건 건우다. 3학년 8반의 신적인 존재. 잘 생기기로도, 190센티가 넘는 피지컬로도, 못하는 운동이 없는 운동신경으로도, 붙박이 전교 1등으로도, 싸가지는 집에 두고 나오기로도 유명한 김건우.


며칠 전에 분식집에 같이 간 이후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건우는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은지에게 말을 걸곤 했다. 부담스럽다. 너무 부담스럽다. 김건우의 팬클럽 ‘거누마누라’ 회원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쉬는 시간에 교실 뒷문이 열리면 들이닥치는 여자애들 10명 중 8명은 나길수 보러 오는 애들이고 나머지 2명은 정은지가 누구냐고 눈을 부라리며 찾아오는 애들이다. 1학년도 2학년도 감히 3학년 교실에 겁대가리도 없이 막 쳐들어온다. 요새 애들은 진짜 무섭다.


다행히도, 그 두 명 여자애들조차 대부분 나길수를 보고 갑자기 통신사 앞 풍선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져서 실려 나갔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얼굴이네.”


“오늘은 아침부터 왜 다들 꿈 얘기만 하지?”


주변에 거누마누라 회원들이 있는지 본능적으로 둘러보며 은지는 대답했다.


“진짜로 꿈이야?” 건우가 멈춰 섰다. “무슨 꿈꿨는데?”


“니가 뭔 상관인데? 돼지꿈 꿔서 로또 사러 갈 거다.”


“자매가 똑같네.” 건우는 피식 웃다가 은지의 표정을 보더니 덧붙였다.


“너, 꿈에 그 자식 나오면 나한테 꼭 말해.”


“그 자식이 누군데?


“그 자식, 나길수.”


은지는 너무 놀라 말을 잃었다. 건우는 은지의 표정을 보더니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이미 나왔어?”


“내 얘기해?”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길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등굣길에 썩소 아니면 지을 미소가 어디 있냐 싶지만 그는 미소를 짓는다. 왜냐면 미소년이니까. 미소년은 언제나 살짝 웃음을 머금는 법이다.


건우는 길수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건넸다.


“알아낼 건 다 알아냈나?”


“왜 이래? 팔 치워.”


‘보통은 팔 치워 ㅅㅂ새꺄, 라고 하는데 미소년이라 욕도 못 하는군.’ 건우는 이렇게 생각하며 길수의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정은지가 이미 다 얘기해 줬거든?”


“은지랑 너 안 친한 거 다 알아.”


“엊그제 전학 온 새끼가 뭐 그렇게 잘 알아?”


“너야말로 내 일에 관심 끄지 그래? 아니면 너희 컴퓨터 아버지도 너한테 뭐 찾으라고 시키던?”


“네가 잘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뭐?”


건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길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찾는 건 이미 가까이에 있어.”


영준이 지각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서 교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며 건우는 미소 지었다. 은지는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나보다 먼저 나갔는데 왜 지금 들어오지? 아, 그 바쁜 등굣길에 떡꼬치 파는 데라도 발견했나 보다.


“…뭐라고?” 길수가 되물었다.


“난 이미 찾았다고.”




“정영준 시범!” 음악선생님이 영준을 불렀다. “앞으로 나와.”


“야야, 돼지 노래한다. 눈감아.”


반 여자애들이 갑자기 눈을 감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손수건을 안대처럼 눈에 두르는 애도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길수가 은지에게 물었다.


“정영준 노래하잖아.” 이렇게 대답한 것은 다른 여자애였다. “저 새끼 노래 진짜 잘하는데 비주얼이 똥망이라 다 눈 감는 거야. 눈 감고 들으면 꿀성대거든.”


피아노 반주가 시작됐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영준이 노래를 시작했다.


“Ave Maria,
Jungfrau mild,
erhöre einer Jungfrau Flehen…”


미처 눈 감는 타이밍을 놓친 여자애들이 “시발!”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교실 몇 군데에서 터지는 가운데, 길수는 숨을 죽였다.


“야, 너 왜 울어?” 길수의 얼굴에 눈물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보고 은지가 물었다.


“아니야…” 눈가를 닦으며 길수가 대답했다.


“우는 거 아니야?” 은지가 다시 물었다.


길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준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이것은 저승길을 떠나는 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노래다…’ 길수는 생각했다. 2500년 전에 이미 그의 몸을 떠나 버린, 지금은 명계를 떠도는 중인지 혹은 아직도 자기 안에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그의 영혼이, 영준의 노래를 타고 마치 그의 몸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준은 노래를 마치고 반 아이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야, 눈 떠도 돼.” 하고 애들끼리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영준 수고했다. 자 그럼 다음에 해볼 사람은… 어? 나길수 노래하게?”


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준의 자리로 갔다. 선생님을 포함 반 아이들의 눈길이 그들에게 쏠렸다.


“노래, 다시 한번 해줘.” 길수가 말했다.


“어? 방금 했는데?” 영준이 대답했다.


“길수가 영준이 노래 마음에 들었나 보네. 전학생이라 오늘 처음 들어봤지? 다른 노래로 한 곡 더 불러볼까 정영준?” 선생님이 음악 교과서의 다른 페이지를 찾으며 물었다.


길수는 선생님에게 대답하는 대신 영준에게 몸을 굽히며 속삭였다. “나만을 위해서, 한 번 더 불러줘.”


“쟤 뭐래, 꺄아아아악!” 여자애들이 비명을 질렀다.


“악 시발!” 뒷자리에 앉아 있던 민정의 입에서는 비명보다 더 거친 말들이 터져 나왔다. “아침 먹은 거 쏠려 시발!”


“길수 취향 왜 저래? 아놔 잘 생겼으면 보이즈 러브인데!” 여자애들이 소리쳤다. “시발 마이 아이즈!”


갑자기 음악실 뒷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김건우였다. 얘는 다른 반인데 여기서 말하는 걸 어떻게 다 듣고 있는지 미스테리다.


“정영준 노래는 나만을 위한 거야!”


음악선생님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여자애들의 비명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아아아악, 시발!!! 심지어 삼각 관계냐고오오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도록 강요받는 학생들에게 있어 특별한 낙은 딱히 없다. 떡볶이, 과자, 아이돌 소식, 그리고…


“야! 김건우랑 나길수가 정영준 두고 싸운대!”


…그리고, 괴소문.


“급식 재료 중에 상한 게 있는지 빨리 확인해 보세요!” 교장선생님이 급히 지시했다.


“왜 그러세요?”


“애들이 갑자기 토하고 울부짖고 그러지 않습니까?”


보건선생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거요…”


교장선생님이 무서운 눈으로 보건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식중독이면 우리 학교 뉴스에 나옵니다!”


“식중독 아닙니다.” 보건실에서 정신을 차리고 교무실로 돌아온 음악선생님이 말했다.


“확실합니까? 그럼 왜 토하는데요?”


“그게요…” 3학년 8반 담임이 주섬주섬 나섰다. “학생들 중에…”


“학생들 중에?” 교장선생님이 재촉했다.


“애 둘이… 한 명을 두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3학년 7반 담임이 우물우물 말했다.


“뭐라고요?” 교장선생님이 외쳤다. “학폭입니까?”


“하… 여기나 저기나 돌아버리겠다 진짜…” 3학년 8반 담임이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뒤에서는 7반 담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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