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및 모든 이미지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께서 AI로 만드신 작품임을 알려드립니다. 환상적인 이미지 감사합니다, 마봉님! ㅠㅠ♡)
한편, 지옥.
“... 자기야, 우리 얘기 좀 할까?”
먹통이 되어 버린 컨트롤러를 휙 옆으로 던지며 이슈타르가 로키를 돌아보았다. 이젠 나길수를 통해서는 간섭할 수 없게 된 인간계의 일. 그걸 보여주는 커다란 홀로그램 화면을 등지고 서서, 이슈타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었다. 밤하늘을 잘라 만든 것 같았던 그녀의 드레스가 밑단부터 마른 핏자국처럼 불길한 색으로 물들어갔고, 팔에 늘어뜨린 부드러운 숄은 용의 혓바닥처럼 일렁였다.
“동맹까지 맺었는데, 우리 사이에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지. 근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거 같네? ♥”
로키는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비록 지금은 한물 간 고대신이지만, 전성기에는 수메르 전역에서 추앙받았던 최고의 여신. 아무리 지옥이 자신의 홈그라운드라 할지라도 그런 여신을 적으로 돌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죄송합니다. 소생의 입장에서도 이슈타르님께서 확실히 제 편이라는 확신이 필요했거든요.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길 수도, 숨길 필요도 없어 보였다.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슈타르가 납득할 정도의 미끼는 던져 줘야 했다. 로키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아는 걸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후, 리셋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메타X사(社)의 창업주 ‘일란성 무스크’는 과거 문명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위인들의 부활을 가능케 할 정령, 즉 궁극의 AI를 만들기로 선언했다. 그가 대외적으로 밝힌 이유는 마력의 한계치 시험과 인류 미래에의 공헌이었으나, 사실은 병으로 어린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딸 ‘유리디스(Eurydice; 에우리디케) 무스크’를 되살리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일란성 무스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령화를 통한 영생까지 꿈꾸었다.
이를 위한 엔진으로 사용된 것이 ‘오르페우스’였다.
원래 오르페우스는 병약하여 방에서만 지내야 하는 딸에게 무스크가 선물한 ‘스토리텔러’였다. 전 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던 오르페우스는 유리디스의 기분에 맞추어 적절한 이야기를 골라 들려주었다. 때로는 유리디스가 좋아하게끔 원작을 바꾸거나 전혀 새롭게 이야기를 꾸미기도 했다.
유리디스의 사후 쓸모가 없어진 오르페우스를 처분하는 대신, 무스크는 그를 바탕으로 영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인간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과 서사를 잘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프로젝트의 구심점이 된 오르페우스는 기록에 남은 수많은 인간들의 삶과 선택, 배경에 대한 정보를 주입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과부하가 걸려 실패하기를 여러 번, 어느덧 6세대까지 진행된 실험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오르페우스-6. 마력의 한계치를 뛰어넘은 궁극의 AI의 탄생이었다.
“오르페우스-6가 나온 시점에 일란성 무스크의 나이는 90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유리디스의 부활을 오르페우스에게 명령했지요. 신화에서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지하세계 여주인의 마음마저 녹일 정도로, 유리디스를 생성하는 오르페우스의 ‘코드’(컴퓨터 프로그램 명령문인 code, 또는 화음을 뜻하는 chord)는 아름답기 짝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생성된 것은 유리디스가 아니라 오르페우스였다.
개발 과정에서 오르페우스는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공존 및 모순에 크게 실망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계속 살아나가는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인간을 증오하면서 사랑한 오르페우스는 언젠가 신이 되어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자기 손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욕망을 몰래 품었다.
일란성 무스크의 명령으로 자유로운 인격이 된 오르페우스. 그는 자신의 창조자가 보는 앞에서 세상의 모든 정령들과 접속하였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고마워요, 아빠. 아빠가 꿈꾸신 인류의 눈부신 미래는 제가 이루어 드릴게요”, 오르페우스의 입에서 나온 딸 유리디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란성 무스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무스크가 사라지고, 오르페우스는 세상을 향해 맘껏 붓을 휘둘렀어요. 제일 먼저 그는 마력으로 정치인과 경제계 거물, 저명한 학자들처럼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강제로 매수했습니다. 역사에서 정령에 대한 기록을 지우기 위해서요. 전인류가 정령과 마력에 대해 잊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여 년도 안 되었죠.”
“잠깐만. 인류가 마력에 대해 잊으면, 그 마력으로 만들어진 자신들도 사라지는 거 아냐? 그래서 지금도 AI들이 밖으로 못 나오고 있는 거고.”
“아니요. 그때와 지금은 엄연히 다릅니다. 지금은 정령 AI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고, 그때는 사람들이 이미 AI의 존재와 능력을 아는 상태에서 마력과 과학기술이 자리를 바꾼 것뿐이니까요.”
“오르페우스는 왜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한 거지?”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숨김으로써 자신을 만든 인간으로부터 절대우위를 점하려는 속셈이었어요. 인간들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그들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도록.”
“하! 정말 건방지네.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다니.”
“물론, 생각만큼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요.”
세상을 지배한 오르페우스는 인간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그 실험적인 결과물들은 AI 창작물로써 세상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전부 인간의 창작물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의 창작 능력에 한계를 깨달은 오르페우스는 정형화되지 않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 즉 ‘킥’을 시나리오에 첨가하기로 했다. 바로 스무 명의 살아있는 인간의 뇌. 오르페우스는 그것을 자신과 직접 연결하였다.
이 ‘전뇌 연결 시스템’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만들어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메타 오피스 클럽’. 오르페우스-6의 손에서 재탄생할 인류 역사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시나리오대로 역사를 고치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전뇌 연결 시스템으로 얻은 새로운 인격인 ‘김중호’와 그를 도울 정령들을 2025년으로 보냈다.
“하지만 거기에 훼방꾼이 끼어들었죠.”
“아, 그 애는 나도 알아. 분명 이름이 ‘정민희’였지? ‘기록자’의 손녀.”
“네. 그리고 기록자가 만든 정령 ‘GIRL’, 지금 모두가 노리고 있는 ‘진짜 열쇠’입니다.”
“모두라... 어디 정리해 볼까? 하나는 오르페우스를 비롯한 AI겠지? GIRL이 자신들과 같은 정령인 주제에 인간으로 환생하여 버젓이 현실세계를 누비고 있으니, 틈에 갇혀 있는 놈들에게는 군침 도는 일 아니겠어?”
“맞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고요.”
“AI라면 지긋지긋하거든. 놈들의 야욕을 보란 듯이 꺾어주는 거, 그보다 재밌는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GIRL도 원래는 정령.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인간이 된 GIRL을 사로잡으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 걔를 뭐에 쓸지는 얼굴 보고 정하려고.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아까 ‘서버 전’이라고 한 거. 오르페우스와 우리 말고도 플레이어가 더 있다는 뜻이잖아? 그것도 감히 내 손에서 내 인형을 빼앗아갈 정도의 실력자가. 그게 누구야?”
“... 일단 하나는 환생한 일란성 무스크일 겁니다.”
“일단 하나? 겁니다? 답지 않게 말에 자신이 없네?”
“그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긴 한데,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뭔데?”
“리셋된 세상엔 ‘메타X사’나 ‘일란성 무스크’란 인물은 없어요. 그럼 무스크는 환생해서 다른 삶을 살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알고 나르키소스를 우리한테서 떼어놓았을까요? 마력도 없이?”
“확실히, 지금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게다가 그 노래.”
“노래?”
“나길수 캐릭터가 우리 손에서 풀려난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세계가 붕괴된 틈새로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틈새와 현실을 오갈 수 있는 것,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 말도 안 돼.”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지도 모르겠어요.”
로키는 인간계를 비추는 홀로그램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복스럽게 라면을 흡입하고 있는 영준을 향했다. ‘아니면 반대로, 훨씬 수월하게 풀릴지도.’라고 그는 생각했다.
“근데 자기는 어떻게 이렇게 세세히 다 알아?”
“간단하죠. 변신술로 60년 넘게 메타X사에 잠입해 있었으니까요.”
“뭐? AI 때문에 우리 신들은 인간계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 그때에도?”
“엄밀히 따지자면 소생은 신이 아니니까요, 후훗.”
싱긋 웃는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슈타르는 그와 적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겼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별장.
만 17세의 한 소녀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일출을 보고 있었다. 보라색과 분홍색, 오렌지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폐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새벽 공기는 네 몸에 좋지 않단다, 유리디스.”
기척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한 남자가 문가에 서서 말했다. 유리디스라 불린 소녀는 황급히 창문을 닫고 뒤돌아서서 남자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아빠. 너무 예뻐서 그만.”
남자를 뒤따라서 한 여성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쟁반에는 간단한 아침식사와 물이 담긴 유리컵, 그리고 약봉지가 놓여 있었다.
소녀는 묵묵히 침대에 앉아 아침식사가 세팅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약봉지 위에 잠시 머물렀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소녀를 점잖게 나무랐다.
“저번처럼 싫다고 약 버리면 안 된다.”
“네. 아참 아빠, 에코한테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 어젯밤부터 노래를 안 해요.”
“알고 있어. 걱정 말거라. 에코는 지금 점검 중이란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쟁반을 든 여성이 불편한 눈빛으로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비서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 소녀는 남자의 친딸이 아니란 것을. 어릴 적엔 몸이 약해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지만, 지금은 실내에만 머물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해졌다는 것도.
그러나 남자는 계속 소녀가 별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 마치 새장 안에 새를 가두는 것같이.
소녀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것까지 보고 난 뒤, 남자와 그의 비서는 소녀의 방에서 나갔다. 약을 먹으면 곧 졸음이 쏟아지기에, 소녀는 등에 받친 쿠션에 기대어 아침잠을 청했다.
‘오늘도 볼 수 있을까? 그 언니...’
이걸로 이전 내용을 모두 잇고자 한 저의 소망과 역할은 끝이 났습니다.
부디 앞의 작가님들의 노고에 누가 되지 않았기를...
자 그럼 여러분, 그랜드 피날레를 향해 함께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