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소] 18화 메타 오피스 클럽

나, 이제 이 건물 산다

by 마봉
옥상에서 맞다이 중인 건우와 길수

건우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계단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이 그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빛이 닿는 쪽은 평범한 고등학생, 그늘진 쪽은 -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닥쳐."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감정 동요 수치 상승. 인간성 잔존율 60%. 흥미롭군.]


"측정하지 마."


건우의 손에 쥔 가죽 수첩이 파르르 떨렸다. 주홍빛 기운이 얇은 실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철컥.


닫혀 있어야 할 옥상 문이 다시 열렸다. 건우의 눈동자가 번쩍 들렸다.


문틈 사이로 길수가 서 있었다. 아까 맞았던 입술은 멀쩡했다. 피멍 하나 없이.


"야, 수업 안 가?"


"너나 가. 그냥 꺼져."


길수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돌아와 건우와 나란히 섰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옥상 풍경이 일그러졌다. 푸른 하늘 위로 검은 노이즈가 번쩍였다. 마치 화면이 깨지는 것처럼.


건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봤지?"


길수가 먼저 말했다.


"이 세계, 슬슬 프레임 드랍 오는 거."


[경고. 비인가 개체가 균열 인지.]


수첩 속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길수가 피식 웃었다.


"들리네."


건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가?"


"네 안에 있는 거."


길수의 푸른 눈이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심해처럼 어둡고, 끝이 없는 색으로.


"너 혼자만 플레이어인 줄 알았어?"


그 순간, 지옥.


이슈타르가 소리쳤다. "뭐야! 이거 왜 컨트롤 안 먹혀!"


로키는 말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 들린 P2 컨트롤러의 불빛이 깜빡였다.


"흥미롭군요."


"흥미롭긴 뭐가 흥미로워! 나길수는 내 캐릭터야!"


로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아닐지도."


화면 속에서 길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 아직 인간이지?"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진단이었다.


옥상 바닥에 주홍빛 문양이 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길수의 발밑에도 푸른 문양이 떠올랐다.


두 개의 시스템이 충돌했다.


'삐이이이이이-'


현실이 잠깐 멈췄다. 종이 울리는 소리, 멀리서 체육 시간 함성, 은지의 웃음 - 모든 것이 정지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움직였다.


건우가 낮게 말했다.


"넌 뭔데."


길수가 웃었다. "리셋을 싫어하는 쪽."


그리고는 속삭였다. "이번엔, 엔딩까지 가보자."

건우와 길수의 주위에 푸르고 붉은 균열의 빛이 맴돌고 하늘에는 픽셀 깨진게 보입니다

그 시간, 지옥 -


로키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슈타르님."


"왜."


"이 게임, 이제 멀티 아닙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서버전이예요."


평소에 같이 안 다니는 어색한 5명의 발걸음은 묘하게 엇갈렸다. 선두에 선 영준의 머릿속에는 이미 가성비 좋은 메뉴들의 조합들이 구성 중이었다.


"일단 떡볶이 3인분에 김밥 2줄, 라면 하나, 튀김은 모둠으로 2인분, 살짝 모자란 듯이 시킨 다음에 사장님한테 서비스를..."


"다섯 명인데 너무 적은 거 아냐? 너 혼자 처먹을 거냐?" 민정이 툭 쳤다.


"야, 그냥 먹다 남겨도 되니까 실컷 시켜." 건우가 말했다.


"오오~ 역시 부잣집 아들! 그럼 맘껏 시킨다?"


"야, 김건우, 너 지금 실수한 거다. 쟤한테 맘껏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 안되지 지금?"


건우는 피식 웃었다. "뭐, 떡볶이집에서 나와 봐야 백만 원 나오겠냐? 그냥 시켜."


영준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민정은 왠지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말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시골 읍내의 낡은 간판들 - 편의점, 세탁소, 부동산, 종묘사, 옛날통닭집. 그 가운데 낡은 분식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 미소분식 ♥

김밥 · 떡볶이 · 라면

SINCE 1998


유리문에는 A4용지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학생 환영 ♡

카드 가능(단말기 가끔 멈춤 주의)


'딸랑-'


영준은 이미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골인 듯 사장님이 영준을 반겼다.


"아이구 우리 복덩이 왔네~?"


"사장님~ 오늘은 친구들 데리고 왔어요. 많이 먹을 거예요."


"그래그래~ 맛있게 해 줄게. 오머나... 근데..."


뒤따라온 건우와 길수를 보고 사장님의 목소리가 변했다. ”요새 학생들은... 참 발육도 좋고... 참 모델 같네..."


"제 친구들 잘생겼죠?" 영준이 왠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는 학생회장이고요, 여기 외국에서 온 애는 오늘 떡볶이 처음 먹는 거래요."


사장님의 앞치마 밖으로 심장이 나대는 것이 모두의 눈에 보였다. 사장님은 갑자기 카운터 뒤로 가더니 A4 용지 두 장과 매직펜을 가지고 나왔다.


"학생들... 혹시 싸인 좀 해줄 수 있어?"


"싸인요?"


"저기 벽에 있는 것처럼. 사인할 줄 알아?"


사장님이 가리키는 벽에는 색이 바랜 사인들이 빼곡했다.


‘배우 김하랑 다녀감! 짱맛!’

‘트로트 가수 박성우 대박 나세요 ♥’

‘유튜버 먹신민우 여기 인정함’


"다 누군지 모르겠는걸." 민정이 투덜거렸다. "다 듣보잡이야."


"아, 나 먹신민우는 알아." 영준이 말했다.


민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영준을 바라보았다. "넌 먹방은 모르는 채널 없으니까 당연하겠지!"


"왜 이래? 나 먹방만 보는 거 아니다?"


옥신각신하는 오빠와 언니를 바라보며 은지는 한숨을 쉬었다. 건우가 A4 용지에 사인을 하는 동안 길수는 은지를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은지는 한숨을 쉬다가 길수의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 깜짝이야... 심장에 좋지 않네, 쟤 눈빛.'


사장님의 팔에 왠지 모를 힘이 들어갔다. 떡볶이가 평소보다 그릇에 높이 쌓였다. 조상님의 영혼까지 끌어모은 사장님의 라면이 불 위에서 끓기 시작했다. 튀김통 안에서 튀김이 보그르르르 소리를 내며 튀겨지며 고소한 냄새가 낡은 분식집을 가득 채웠다.


"자, 학생들! 많이 먹어. 내 오늘은 특별히 많이 넣었다!"


영준의 입이 벌어졌다. "와... 평소의 두 배는 주셨네요. 야야 건우야 길수야, 너네랑 같이 오니까 서비스 장난 아니다. 앞으로 너네랑 같이 와야겠다."


"일단 떡볶이 한 개 먹어보고, 그다음엔 김밥에 떡볶이 국물 찍어먹어 봐!" 은지가 길수에게 김밥과 떡볶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민정이 은지를 가로막았다.


"튀김이지. 넌 도대체 우리나라 고유의 식문화를 어떻게 알고 있길래 그따위로 가르치니? 떡볶이 국물은 튀김 전용이야!"


영준이 그들을 말렸다. "야, 싸우지 마. 떡볶이 국물은 아무거나 찍어먹어도 맛있어! 일단 국물에 3초 적시는 게 중요해. 그러면 오뎅을 찍어도 순대를 찍어도... 난 가끔 빵도 찍어먹어!"


"빵? 빠아아앙? 야 그건 좀 심하다! 왜 종잇장도 찍어먹지 그러냐?"


"종이..." 영준은 진짜로 종이를 찍어먹는 상상을 하는 듯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젓가락은 날쌔고 현란하게 튀김과 김밥과 떡볶이 사이를 오갔다. 마치 지금 안 먹으면 평생 굶을 사람처럼.


"혼자 처먹지 말고 길수도 좀 먹으라고 그래!" 은지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말했다.


건우는 길수가 떡볶이를 능숙한 젓가락질로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민정은 그를 바라보는 건우의 눈빛에 잠시 넋을 놓았다. 교내에 팬클럽(거누마누라)이 생기는 놈은 다르긴 다르구나. 길수도 잘 생겼지만 건우는 떡볶이집 낡은 의자에 앉아 있어도 마치 왕좌 같이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길수는 건우의 눈빛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매운 거 못 먹을까 봐?"


"아니," 건우가 대답했다. "너, 맛은 느끼냐?"


"무슨 소리야? 길수 매운 거 잘 먹어! 점심시간에 나랑 라면도 먹었어. 그치 길수야!" 영준이 튀김을 입에 문 채 말했다.


길수는 건우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맛 느끼는 척 잘한다고."


"넌 사람인 척 잘하고."


"너보다는 사람이지."


건우의 주머니에서 붉은빛이 순간적으로 번쩍였으나,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먹을 것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는 영준만 빼고, 민정과 은지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분식집에서 대치중인 두 사람(주변에 민정, 은지, 영준 있습니다)

"자 여기 라면~"


사장님이 김이 솔솔 나는 라면 그릇을 테이블로 가져왔다. 영준의 젓가락은 새로운 사냥감으로 향했다. 민정이 그의 손을 찰싹 쳤다.


"드러운 새끼야, 같이 먹는 거잖아! 앞접시에 덜어먹든가 아니면 이거 너 혼자 처먹고 새로 한 그릇 더 시켜!"


"우리 이쁜 학생들 라면 한 그릇 더 줘?" 사장님이 물었다. 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홍홍 그럼 학생들, 혹시 사진 찍어도 돼? 라면이랑 떡볶이 먹는 거. 그럼 앞으로 올 때마다 라면 한 그릇씩은 무조건 공짜로 줄게."


"대박이다! 야, 한다고 해!"


길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건우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얘랑 같이 찍으면요." 건우가 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길수가 항의했다.


"걱정되냐? 사진에 혹시 투명하게 나올까 봐? 자신 없으면 말해. 난 어차피 교복집에도 사진 걸려있어."


분식집 창가에 '거누마누라' 회원들이 벌떼같이 달라붙어 있는 것을 의식하며 건우가 말했다. 길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집에서 안 좋아하실 거라서요." 길수가 사장님에게 말했다.


"집은 어딘데? 공동묘지냐? 나 너네 집 가볼래."


건우의 도발에 길수는 차갑게 대꾸했다.


"아무리 질러 봐야 소용없어. 너네 컴퓨터 아버지한테나 그래 보지 그러냐."


이번에 조용해진 것은 건우 쪽이었다.


"그래서, 학생들 찍어 말어? 라면 말고 딴 게 좋아?"


"찍을게요." 길수가 대답했다. "얘하고 같이 찍을게요."


사장님은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며 뒷방으로 들어가더니 웬 대포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헉, 그건 뭐예요? 핸드폰으로 찍는 거 아녔어요?" 은지가 소리쳤다.


"아, 내가 '너훈아' 오빠 팬질 하느라 카메라가 좀 좋아! 그럼 거기 옆에... 어어 그 자리 좋다. 찍는다?"


영준은 입에 김밥 하나를 문 채로, 민정과 은지는 손에 젓가락을 든 채로 테이블에서 비켜섰다. 사장님의 손은 카메라를 현란하게 움직였다.


"잠시만요." 건우가 사장님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카메라가 내려갔다.


"야, 입 벌려봐." 건우가 길수에게 말했다.


"왜?"


건우는 길수의 입이 벌어지자마자 튀김 한 개를 집어 입 속에 들이밀었다. 사장님의 날쌘 손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건우가 길수 입에 튀김 처넣는 장면(배경에 민정 있음)

사장님의 카메라 액정에 방금 찍힌 사진이 떴다. 환하게 웃는 한 소년과, 튀김이 갑자기 입에 들어오는 바람에 약간 당황한 다른 한 소년. 붉은 떡볶이 국물. 형광등 아래의 평범한 오후.


아주 잠깐, 화면 하단에 푸른 노이즈가 번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라졌다.


"학생들, 고마워..." 사장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나, 이제 이 건물 산다."

사장님의 카메라에 찍힌 건우와 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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