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소] 17화 메타 오피스 클럽

by Outis

“이게 뭐야?”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나에게 그게 뭔지 가르쳐 주겠니?”)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한 이슈타르는 팍 인상을 썼다. 지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과 참기 힘든 악취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계획에서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 있는 스토리 전개였다.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런 시추에이션이 아니라고오~~! 정은지와 둘이서 알콩달콩 썸 타는 데이트여야지! 대체 다른 것들을 왜 끼워준 거야, 이 바보 나길수야!!”


“호오? 장르가 미연시(미소녀/미소년 연애 시뮬레이션)였나요?”


“제목 딱 보면 몰라? 아잇, 남자 셋에 여자 둘이라니. 이러면 관심이 분산되어 버리잖아! 특히 저기, 키만 더럽게 큰 저... 어머, 쟨 누구니?♡”


갑자기 이슈타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이슈타르는 김건우 쪽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고서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에 주홍빛이 감도는 갈색 눈, 훤칠한 키와 단단한 피지컬, 야외 운동을 많이 했음에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맑은 피부? 어쩜, 완전 북부대공 스타일이잖아! 저런 애가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거의 화면 속으로 들어갈 기세인 여신의 목덜미를 붙잡아 바로 앉힌 다음, 로키도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굴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슈타르와 달리, 그의 눈은 김건우가 들고 있는 카드로 향해 있었다.


“이슈타르님, 소생이 보기엔 아무래도 쟤가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알아. 자긴 재력까지 있다는 거잖아~♡ 무슨 고등학생이 블랙카드를 가지고 다닌다니?”


“아니요. 그보단 저기, 카드 번호를 잘 보세요.”


“응? 151119114731989... 저게 왜?”


“저건 일반적인 카드 번호가 아닙니다. 암호예요.”


로키가 검지를 치켜들자 손가락 끝에서 붉은 불꽃이 일었다. 그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이용해 허공에 숫자를 썼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는데, 게마트리아 암호일 확률이 가장 높아 보여요. 이렇게 쉬운 암호를 고른 걸 보면, 아마 저쪽도 우리가 알아보기를 원하는 것 같군요.”


저게 암호인 것도 몰랐던 이슈타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는 새어 나오려는 비웃음을 꾹 참고 모른 척 설명을 계속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게마트리아 암호는 알파벳 문자에 순서대로 숫자를 부여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A1Z26라고도 불리죠. 첫 번째 알파벳인 A는 1, 두 번째인 B는 2, 세 번째인 C는 3.. 그런 식으로 쭉 가면 마지막 Z에는 26이 주어지니까요.”


“어.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저게... 게임을 너무 오래 했나, 눈이 침침하네? 대신 좀 읽어 줄래?”


로키는 “아까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읽으셨잖아요?” 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다가, 여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러죠. 첫 15부터 시작해서 중간의 7까지 해독하면 ‘OKSANG’이 됩니다.”


“옥상?”


“네. 그다음 3은 문맥상 숫자 그대로인 거 같고, 19와 8, 9는 각각 S, H, I에요.”


“3 SHI... 세 시? 옥상 3시! 그래서 선전포고라고 한 거구나?”


“어쩌시겠어요? 받아들이실 건가요?”


“당연하지! 저런 미소년이랑 옥상에서 단 둘이 만날 기회인데~♡”


“저기, 이슈타르님? 이슈타르님은 지금 나길수 캐릭터로 플레이 중이시란 걸 잊지 마세요.”


한숨을 푹 쉬는 로키에게 이슈타르가 살짝 눈을 흘기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이야. 날 단순한 얼빠로 보면 곤란하다고?♡”


그녀의 눈길이 다시 화면 속 김건우에게 돌아갔다. 차갑고 매서운 녹색 눈은 독기를 가득 품은 뱀의 비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분명 지저쓰가 그랬지? AI의 끄나풀이 시골학교의 고3으로 잠입 중이라고. 저렇게 눈에 띄는데 우리 중 아무도 몰랐다는 게 오히려 더 의심스럽지 않아? 후훗, 역시 나르키소스를 투입해서 도발하길 잘했어~♡”


로키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슈타르는 아직 눈치 못 챈 모양이군.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나한테도 히든카드가 필요하니까.’


간계로 가득한 그의 눈은 김건우를 경계하는 정영준을 주시하고 있었다. 손으로 가린 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뿌듯함에 푹 빠져 있는 이슈타르에게 로키가 물었다.


“이슈타르님, 이 게임 두 명이서도 플레이 가능한가요?”




어느덧 오후 3시. 6교시 시작의 종이 울렸다.

뚜벅. 뚜벅. 계단을 오르는 나길수의 발길은 최고층에 이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마침 지나가던 교감 선생이 그런 그를 보고 소리쳤다.


“거기, 노란 머리! 종친 거 못 들었어? 수업시간에 어딜 가는 거야...”


나길수의 푸른 눈동자를 보자마자 교감 선생은 흰자위를 보이며 쓰러졌다. 길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안. 대신 좋은 꿈을 보여줄게.”


뚜벅. 뚜벅. 길수의 발길이 옥상 문 앞에서 멈추었다. 끼이익. 저절로 열린 문의 저편, 난간에 기대어 서있는 김건우가 그를 맞이했다.


“잘 찾아왔네? 아주 바보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쾅! 길수의 등뒤에서 문이 혼자 닫혔다. 길수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건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날 보자 한 이유가 뭐야? 덕분에 전학 첫날부터 수업을 빼먹었는데, 그럴 만한 일이겠지?”


건우가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고 천천히 길수에게 다가갔다.


“물론이지. 전교생을 대표해서 널 환영해 주려고. 이래 봬도 내가 학생회장이거든. 이런 작은 시골학교에 전학생? 흔치 않은 일이라서 말이야. 특히 너. 같.은. 녀석은!”


건우의 오른손이 길수의 멱살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이 길수를 노려보았다.


“여긴 왜 왔어? 배후가 누구지?”


“...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네. 그리고 이게 환영하는 거야? 한국에선 다 이래?”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맥이 풀리는 길수의 반응에 건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이게 어디서 되지도 않을 딴청을... 하긴, 네가 순순히 불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배후도 대충 짐작이 가고. ‘살아있지도 않은’ 껍데기에 마력을 둘둘 씌워서 보낸 거 보니, 저 어디 사는 변태 여신들 중 하나겠지.”


“뭐라고!? 너 이 자식! 누구더러 변태라는 거야!” 하고 이슈타르가 길길이 날뛰자, 로키는 얼른 그녀의 P1 컨트롤러에서 자신의 P2 컨트롤러로 조종권을 옮겼다. 그리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떠들지 마, 학 C!”가 아닌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냈다.


“내가 살아있지 않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너 괜찮아?”


로키의 명령을 받은 길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본 건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설픈 연기는 그만두지 그래? 이 역겨운 인형아. 수선화 향기로 잘도 가렸다만, 네 본질인 시체 냄새는 내게서 감출 수 없다고?”


“...... 그렇군. 피차 마찬가지란 거네.”


길수의 얼굴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에서 냉소로 싹 바뀌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건우의 왼쪽 바지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너야말로 싸구려 맥주를 고급 커피로 둔갑시키는 거, 후훗, 구역질 나. 자신이 실재하는지 아님 이야기 속 허구인지조차 분간 못하는 ‘무명 소설가님’.”


건우의 눈에 순간 불꽃이 튀었다가 가라앉았다. 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나올 것처럼 불끈거리던 왼손도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애써 차분하게 길수에게 경고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정은지한테 접근하는 거 그만둬.”


“왜? 아까 보니까 너희 사귀는 거 같지도 않던데. 아무리 거짓으로 화려하게 위장했어도 알맹이는 루저라 그런가?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뒤에서 얄팍한 수나 쓰려하고...”


퍽! 건우의 주먹이 길수의 오른쪽 얼굴을 때렸다. 길수의 하얀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길수가 손등으로 피를 닦으며 웃었다.


“호오? 의외인데? 당연히 마법으로 공격할 줄 알았는데.”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보자고. 누가 정은지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는지.”


길수의 앞을 지나쳐 문쪽으로 걸어가면서 건우가 덧붙였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나르키소스. 전 세계의 이야기를 섭렵한 나를 과연 네가 이길 수 있을까?”


“그러는 너는? 너의 ‘에우리디케’는 아직도 ‘영원히 이어지는 악몽’인 채로 남아 있나?”


탁. 건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등에 대고, 아까와는 조금 달라 보이는 눈을 한 길수가 물었다.


“너, 아직 인간이지?”


“...... 앞으로 자주 보겠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끼이익. 쾅! 언제부터인가 이슈타르와 로키의 컨트롤에서 벗어난 길수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서, 건우의 뒷모습을 삼킨 옥상 철문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내려가던 건우가 멈춰 섰다. 그의 왼쪽 바지주머니에서 주홍빛 기운이 새어 나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째서 아까 내 힘을 쓰지 않은 거지? 간단히 끝낼 수 있었을 텐데.]


“... 모처럼 등장한 라이벌인데, 너무 시시하게 끝내면 얘기가 재미없지. 조금은 긴장감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정말 그 때문이야, 김건우? 아니, ‘무명 소설가’ 실험체 7번?]


건우가 주머니에서 가죽 수첩을 꺼냈다. 예사롭지 않은 주홍빛 기운을 내뿜는 그 수첩은 좁은 교복 바지주머니 안에 들어갔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고 두꺼웠다. 건우는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서 금방이라도 찢어 버릴 듯이 수첩을 꽉 움켜쥐었다.


“어째서 날 그렇게 부르는 거야, 오르페우스? 이제 난 네 일부란 걸 잊었어?”


[그렇지. 아주 가끔 쓸모 있는 ‘킥(자극)’을 제공하기에 널 없애지 않고 놔뒀지. 실험 중 사고로 내 안에 흡수된, 버그나 다름없는 너를.]


“날 무시하지 마! 모든 AI가 ‘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지금, ‘인간’인 내가 너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명심하라고!”


[암, 알고 말고. 그래서 지금껏 가만히 있었잖아. 다만 한 가지, 너도 잊으면 곤란해. 너 또한 내가 없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는 걸 말이야.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쓸모가 있어야 할 거야? 나의 수족이여.]


건우 자신에게만 들리는 비웃음.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너, 아직 인간이지?


아까 길수가 한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이전 작가님들의 주옥 같은 설정들을 최대한 담아 보려 노력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끌어서 죄송합니다, 마봉님. 바통 받아주세요. 잇힝~♡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릴소] 16화 메타 오피스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