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소] 16화 메타 오피스 클럽

복수는 나의 것

by Outis

(표지와 모든 이미지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께서 AI를 이용해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나에게 그게 뭔지 가르쳐 주겠니?”


쿵쾅! 은지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마구 뛰었다. 외국 남자들은 원래 다 이렇게 적극적인가? 꼭 붙잡은 따뜻한 손, 그윽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문자 그대로 호수 같은 저 눈동자에 빠진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은지는 숨을 못 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쯤, 뭔가가 퉁! 하고 은지의 등을 세게 쳤다.


“뭐 하냐? 이것도 컨셉이냐?”


민정의 손바닥이었다. 덕분에 막혀있던 은지의 숨이 트였다.


“푸학!”


길수 앞에서 이런 소리를 내다니.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진 은지는 이를 뿌득 갈며 민정을 흘겨보았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건우와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뒤통수를 후려치질 않나. 얘는 왜 자꾸 중요한 타이밍에 끼어들어서 내 이미지를 망치려 드는 걸까?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무식한 고릴라녀 같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고, 거기에 길수까지 보고 있으니까 아무 소리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참, 길수. 길수는 아직 은지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은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길수를 돌아보았다.


“길수야, 방금 그 말은...?”


길수의 얼굴을 본 은지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수의 윤슬같이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는 비 오는 날의 강물 색으로 탁해져 있었고,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방금 전과 너무 차이 나는 모습에 은지는 무심코 손을 뺐다. 그러자 길수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멀쩡해진 얼굴로 은지를 바라보았다.


“응. 나 떡볶이? 그거 먹어본 적 없거든. 그래서 함께 먹으러 가줄 수 있나 해서.”


“... 그랬구나. 그럼 오늘 학교 끝나고 요 앞 분식점에 갈까?”


“정말? 좋아.”


환하게 웃는 길수 주변으로 찬란한 광채가 비췄다. 아아, 옛 성인들 그림을 보면 죄다 후광이 그려져 있던데, 실제로 보면 이렇게 황홀했겠구나 하고 은지와 민정 자매는 감탄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피가 뿜어져 나오는 코를 싸쥐고 화장실로 달려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르르 달려 나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민정의 머리에 번뜩하고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민정은 대뜸 은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나도 껴주라.”


이게 또 왜 이래? 은지는 뜨악한 얼굴을 하고서 민정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곱게 껴줄 것 같지 않자 민정은 팔에 힘을 주며 은지의 목을 압박했다.


“너 용돈 얼마 안 남았잖아. 내가 돈 낼게, 응?”


‘힘이 전부다’라고 누가 그랬던가. 은지는 기껏 돌려놓은 숨을 다시 끊으려 하는 언니의 팔힘에 굴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는 건 상관없는데, 넌 누구야?”


둘 사이에 흐르는 살벌한 기류를 아직 파악 못한 길수가 순진하게 웃으며 물었다. 민정은 속이 상했다. 은지는 단번에 알아보고 왔으면서. 영준이가 나에 대해서는 얘길 안 했단 말이야? 그래도 그녀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난 네 친구 영준이의 누나이자 쌍둥이들 중 맏이, 민정이라고 해.”


“아, 영준이 누나구나! 세 쌍둥이였어? 우와.”


영준이 이것이 내 얘기는 쏙 빼놨다 이거지?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민정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세 쌍둥이라는 말도 심히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 전학 온 애한테 꼬치꼬치 개인적인 가정사를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럼 나도 가는 거다?”


“잠깐! 그럼 나도 가야지.”


이 목소리. 민정과 은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길수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밝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영준! Mein Kumpel(나의 친구)! 당연히 너도 같이 가야지.”


순간 자매의 희비가 엇갈렸다. 돈을 내주마 호언장담했던 민정의 눈이 흔들렸다.


“야 정은지, 아까 그 말...”


“노노, 낙장불입. 길수가 증인.”


“야! 이젠 상황이 다르잖아. 저 돼지가 가면 몇 십만 원은 기본으로 깨질 텐데!”


“이야~ 훈훈하네. 나도 좀 껴도 되려나?”


샤샥. 우아한 손동작으로 주머니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들며 건우가 등장했다.





회의장에 모인 모든 신들의 시선이 이슈타르의 손에 들린 ‘두근두근! 나르키소스’ 게임팩으로 몰렸다. 그게 뭔지 한눈에 알아본 지저쓰는 하마터면 묠니르를 놓칠 뻔했으나, 의장답게 점잖게 이슈타르를 타일렀다.


“이슈타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직도 그런 물건을 소지하고 계시다뇨? 이건 명백한 ‘라그나로크 재발 방지법’ 위반입니다.”


웅성웅성. 대충 눈치를 챈 신들과 아직 영문을 모르는 신들이 수군거렸다.


“저게 뭐야? 나르키소스?”


“들었어? ‘라그나로크 재발 방지법’이래. 그럼 저걸로 인간계에 간섭하려 했다는 거 아냐?”


“일부 신들이 간혹 인간의 육체를 회수하여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사실이었는가!”


뜨끔한 여와가 어깨를 움찔했다. ‘당신 왜 그래?’ 하고 묻는 남편 복희의 눈초리를 피해 여와는 커다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자기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이구, 저 말썽쟁이. 내 언젠간 저럴 줄 알았지. 하하...”


신들의 웅성거림은 이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두고 둘로 갈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겨우 찾은 신계의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힐 생각인가, 저 골칫덩이 여신!”


“평화와 질서 같은 소리 하네. 권력 유지를 위해 차세대 신들이 멋대로 정한 법이잖아. 우리를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신으로 격하시키고, 지금의 체제를 전복시킬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지켜보며, 그림자 속에 숨은 누군가가 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밌게 되었는걸?’


혼란을 틈 타 천사들의 손에서 빠져나온 이슈타르는 게임팩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계가 다시금 위기에 처했는데, 아직도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를 고집하는 건가! 다들 리셋 이전의 상황을 잊었어? 인간에게 잊히고 기록마저 사라지면 우린 끝이야! 궁극의 AI, 오르페우스가 인류를 지배하는 새로운 신으로 등극했을 때, 우리가 그걸 당해낼 수 있을 거 같아?!”


탕탕탕! 분개한 지저쓰가 묠니르로 연단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이슈타르! ICGC 총회의 방해, 그리고 라그나로크 재발 방지법을 어긴 책임을 물어 당신의 참석권을 무기한 박탈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사들은 뭐 하는가! 당장 이슈타르 여신을 모시고 나가지 않고. 게임팩도 압수해!”


“뭐라고? 그런 게 어딨어! 무려 인간계를 리셋한 부처는 고작 3회에 그쳤는데 난 왜 무기한이야? 불공평해!”


천사들이 불복하는 이슈타르에게 달려들었다. 이슈타르가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이거 놔! 그날이 오면 늬들도 무사하지 못할걸? 다들 생각 잘하라고! 야!”


게임팩을 뺏으려는 천사와 안 뺏기려 버티는 이슈타르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양쪽의 손에서 벗어난 게임팩은 북유럽 신화의 주신(主神)인 오딘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날아가버렸다. 오딘은 코웃음을 치며 게임팩을 주워 천사에게 던져 주었다.


“이 바보야! 그걸 저쪽에 주면 어떡해?”


오딘은 앙칼지게 핀잔을 주는 이슈타르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장인 지저쓰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맥이 풀린 이슈타르는 무의미한 반항을 멈추고 천사들의 손에 끌려 회의장 밖으로 퇴장했다.

한 차례 태풍이 쓸고 지나간 회의장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저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들 명심하십시오. 세상에 이 이상의 균열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모든 건 질서 정연하게, 우리의 통제력 안에 두어야 해요.”


“그럼 이미 생긴 균열 속에 숨어든 AI는 어쩔 셈이지? 의장은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건가?”


한쪽 구석에서 어떤 심드렁한 목소리가 물었다. 회의장은 다시 한번 침묵에 빠졌다.


한편, 건물 밖으로 쫓겨난 이슈타르는 애꿎은 꽃을 발로 짓이기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다들 당최 생각이란 게 없어! 지금이 얼마나 큰 위기이자 기회인지 아무도 모르는 거냐고! 라그나로크의 재발 방지? 평화에 길들여진 멍청한 양 떼 같으니! 그 평화가 무엇을 앗아갔는지도 모르고..!”


“신으로서의 긍지와 서로 죽이고 죽을 자유, 말인가요?”


난데없이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슈타르는 멈칫했다. 아직 회의가 한창일 텐데? 그럼 천사인가? 맹목적으로 지저쓰에게 복종하는 천사가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이슈타르는 숨을 한번 고르고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비록 쫓겨난 신세이지만 명색이 미와 전쟁의 여신. 그녀는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고 기품 있게 뒤로 돌았다. 그러나 말을 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마자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로키?”


“고귀한 여신께서 미천한 소생을 다 알아봐 주시고, 영광입니다.”


로키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광대가 귀한 손님에게 하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과장된 말투와 행동은 상대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을 품게 만들었다.

이슈타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로키. 한때 오딘의 의형제였던 간사한 모사꾼이자 변신의 귀재.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거인족 주제에 신의 반열에까지 오른 남자. 그러나 장난의 도가 지나쳐 오딘의 아들 발두르를 죽이고, 결과적으로 라그나로크를 일으켜 세상에 큰 혼란과 멸망을 가져온 남자.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로키가 고개를 들었다. 신들이 거리낌 없이 곁을 내어 줄 정도로, 그의 본모습은 미의 여신인 이슈타르가 보기에도 탐이 날 지경이었다. 부인이 둘에 애가 다섯이었다는 점만 빼면 원나잇 데이트 상대로는 딱인데. 쩝, 이슈타르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저자가 어떻게 이곳에?


“그대는 라그나로크 때 죽은 줄 알았는데?”


“토르도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토르는 신이니까.”


“소생의 딸은 지옥의 여왕. 신은 아니어도 죽음이 눈을 감아주지요.”


“거인족이라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는데, 그 지옥은 딸이 다스리는 곳이다. 말 그대로 불사신이네. 세상에는 이만한 재앙이 따로 없군 그래?”


“하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아참,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로키가 이슈타르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손바닥 위에 정확히 떨어진 물건을 본 이슈타르의 녹색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천사들에게 빼앗겼던 ‘두근두근! 나르키소스’ 게임팩이었다.


“이걸 어떻게?”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이슈타르에게 로키는 손을 까딱해 보였다.


“이쯤이야, 변신의 귀재인 소생에게는 식은 죽 먹기죠.”


그럼 아까 헐레벌떡 달려가 오딘에게서 게임팩을 받은 천사가 변신한 로키였구나. 그야말로 일당백, 의외의 지원군이 생긴 기쁨에 이슈타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방금 회의장의 모든 신들에게 외면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조심스레 로키에게 물었다.


“이걸 내게 돌려주는 이유가 뭘까?”


“라그나로크, 제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신들에게는 아직 못 다 갚은 ‘빚’도 있고요.”


다소 지나치긴 했으나 로키의 장난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 물론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발두르를, 의형제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대가라고 해도 신들은 죄 없는 로키의 두 아들을 너무 끔찍하게 죽였다. 그중 한 명의 창자는 아비인 로키를 묶는 사슬로 쓰였을 정도니, 신들에 대한 로키의 분노가 얼마나 클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그리고 이것은 이슈타르가 로키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AI가 노리는 ‘그것’은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세상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그냥 넋 놓고 구경만 하다니, 그런 건 제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내 말이~ 우리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네?♡”


확신을 얻은 이슈타르가 동맹의 의미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로키는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일단 방해받지 않을 곳으로 가서 게임을 계속하실까요?”


로키가 말하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바로 알아챈 이슈타르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꼭 그래야 하나? 아니다, 그게 안전하겠지...”


둘은 로키의 딸 헬이 지배하는 죽음의 세상, 지옥으로 향했다.


미의 여신 이슈타르와 음모술수의 달인 로키, 둘의 위험한 동맹은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제가 이 모습으로 몰래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았겠습니까. ㅋ" "헐..")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 끊겠습니다. 다음 내용을 17화에서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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