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전 암에걸린 엄마 그리고 가족들

생각을 얕게

by 이연주




퇴근 후 회사 건물을 나설 때면, 늘 하늘을 한 번 쳐다본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버텼다는 안도와, 아직 끝나지 않은 집안일이 기다린다는 생각이 동시에 밀려와서다.


나는 삼 남매 중 셋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언니 둘과 남동생 하나를 둔 셋째딸이다.

어릴 때부터 나라는 사람은, 가족 안에서 늘 ‘중간’의 역할을 맡아왔다.

첫째 언니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사람이었고, 둘째 언니는 자유롭고 똑똑해서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막내 남동생은 집안의 귀여움이자 희망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눈치 보고, 맞추고, 모난 데 없이 굴러가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릴 때는 그게 그냥 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커서 보니 그건 성격이라기보다 생존법이었다.

나 없이 돌아가지 않는 집안 살림, 누구보다 부모님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습관,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

그 모든 게 내 이름과 한몸처럼 붙어 다녔다.


그리고 지금, 나는 30대 초반 직장인이다.

회사에서는 팀에서 중간급 역할을 맡고 있다.

대리라는 타이틀이 달렸지만, 사실상 시니어 업무까지 떠안으면서 후배 교육까지 하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씩씩하게 웃고, 기한 맞춰 보고서 내고, 회의에서 아이디어 내고, 클라이언트 미팅도 나간다.

퇴근하면?

내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엄마는 담도암 항암 치료 중이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는 항상 지쳐 있다.

항암 부작용 때문에 입맛도 없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다.

나는 그걸 다 본다.

“너도 피곤할 텐데 고생 많다.”

그 말이 참… 좋으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내가 피곤한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엄마가 아프니까, 엄마가 힘드니까 내가 대신 움직이면 되는 거다.

근데 가끔은 정말 많이 피곤하다.


퇴근길에 커피를 하나 사서 마시면서도 생각한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아빠는 가게에서 늦게까지 일하시고, 그 가게를 내가 종종 대신 본다.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 퇴근하고 바로 가게로 가서 계산대에 앉아 있으면…

내가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하지만 아빠는 가게 문을 닫고 들어오면 늘 내 어깨를 두드린다.

“덕분에 오늘도 잘 넘어갔다. 고맙다.”

그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쌓였던 피곤이 조금은 풀린다.

나도 모르게 다시 다음날을 살아낼 힘이 생긴다.


주말이 되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친구들은 브런치를 먹고 전시회를 보러 간다.


“엄마 이번 주 수치 괜찮아. 다음 항암은 예정대로 진행.”

그 메시지를 보고 나면, 잠깐의 공허함이 몰려온다.

내 일기장에는 ‘오늘 하루도 버텼다’라는 문장만 반복되고 있다.


사실 나는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다.

내 나이는 더 이상 어리지 않고, 주변에서는 다들 하나둘씩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나에겐 연애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퇴근하고 가게, 집안일까지 챙기면 밤 11시가 넘는다.

그때 침대에 누우면 하루가 훅 끝난다.

그래도 아침이면 다시 알람이 울리고, 나는 또 회사로 향한다.


가끔 언니들이 농담처럼 말한다.

“너 없으면 우리 집 어떻게 돌아가냐?”

웃으면서 대답한다.

버겁지만 놓을 수 없다.


나는 여전히 하늘을 본다.

오늘도 별은 예쁘다.

내가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언젠가 이 시간이 지나고 조금은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 덕분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오늘도 묵묵히 가게에서 계산대를 본다.

지쳐도 괜찮다.

내가 하는 이 일들이 결국 우리 가족을 살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오겠지.

“너 덕분에 우리 집이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그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다시 하루를 살아낸다.



#30대직장인 #돌봄일기 #항암치료 #가족에세이

#셋째딸 #중간자녀 #퇴근후또일 #가족챙기기

#가족에대한사랑 #피곤하지만행복해 #오늘도버틴다

#딸의일기 #딸의마음 #가족에세이 #현실일상

#가족책임감 #감성글 #브런치글쓰기 #일상記





작가의 이전글30대 초반, 에스트로겐녀로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