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가을비가 지나간 하늘은 유난히 어두웠고 창가로 스며든 바람은 이제 겨울을 예고하듯 차가웠다. 이 차가움은 오히려 내 정신을 또렷하게 깨워주었고, 잠시 망설이던 손끝이 책장으로 향하게 했다.


오늘 다시 꺼내든 책은 김경일 교수의 <적정한 삶>이었다. 그 안에서 내 시선을 붙든 문장은 이것이었다.


“낙관성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
삶을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태도이기 때문이다.

확신은 곧 '우리의 미래가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강한 믿음이다.“

김경일 <적정한 삶> 중에서


확신.

확신은 흔히 타고나는 기질처럼 여겨지지만 결국 후천적인 마음의 태도와 연결된다는 말이 내 안에 깊이 울렸다.


병상에 누웠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내 몸이 회복될 수 있을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아픔이 끝나기는 할까.


그러나 의심 속에서도 하루를 살아내는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어느새 ‘확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늘을 지켜내면 내일도 가능하다는 단순한 반복이 미래를 향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확신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훈련된 태도다. 아침의 운동 루틴을 이어가는 일, 아무 맛이 나지 않아도 식사를 챙겨 먹는 일, 불안한 마음을 붙잡고 한 줄의 글을 쓰는 일.


이런 소소한 반복이야말로 내 안에서 작은 불씨처럼 확신을 키워갔다. 확신은 커다란 성취나 단번의 변화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은 습관과 태도가 쌓여 나를 지탱하는 힘으로 변한다.


확신의 또 다른 얼굴은 위로다. 나는 종종 내 몸의 불편함과 앞으로의 시간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마음 한편에서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 심어줄 수 없는 나만의 확신이다. 이 확신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불확실성을 견디게 해준다.


결국 확신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 보면서도 그 속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태도다.


그러나 확신은 맹목적인 긍정과 다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신뢰’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안에 잠재된 가능성이 내일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읽었던 철학의 한구절에서 강조한 태도와도 닿아 있다는 생각이 미친다.


그들은 외부의 사건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사건에 대한 태도와 판단은 우리의 몫이라고 보았다.


확신이란 바로 그 판단의 선택이다. 나는 이 고통을 파괴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성장의 밑거름으로 볼 것인가. 그 선택이 곧 나의 삶을 결정한다.


확신은 또한 관계의 차원에서도 작동한다. 나 혼자의 확신은 불완전하다. 가족의 응원과 곁에서 지켜주는 시선이 내 확신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나의 확신은 결국 나를 넘어 타인에게로 전이되고 타인의 확신은 다시 나에게 힘을 돌려준다. 확신은 개인의 마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연대의 감정이 된다.


결국 확신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삶을 이어가려는 존재의 결단이다. 그것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다’라는 예언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겠다는 선택이자 책임이다.


나는 오늘 ‘확신’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확신이란 막연한 미래의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태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