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 불면으로 고통받던 새벽들은 내게 길고 지독한 어둠만을 남겼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눈을 뜨는 일은 몸의 고단함보다 마음의 무너짐을 더 크게 체감하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한순간이라도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작은 회복의 신호였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했고, 몸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그 안도감을 안고 서재로 향했다.
책장의 책들을 바라보던 중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윤홍균 교수의 <자존감 수업>이었다.
작년 초 아내가 쓰러져 두 달간의 입원과 치료 끝에 기적적으로 퇴원이 결정되었던 시기에 딸이 내게 건네주었던 책이다. 당시 나는 끝없는 질문 속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만 오는가. 왜 내 삶은 이렇게 무너지는가. 하지만 정작 문제는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 앞에서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책을 통해서야 알았다. 나는 내 안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존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의 균형을 지탱하는 뿌리와 같다. 뿌리가 썩으면 나무는 언젠가 무너진다.
그때의 나는 병든 뿌리였다. 책은 내게 그것을 직면하게 했고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은 결국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다시 자존감의 균열 앞에 서 있다. 암 치료와 회복의 과정은 단순히 몸의 고통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매일의 감정을 흔든다.
치료가 끝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후유증과 예기치 못한 불안은 다시 내 안의 자존감을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 속 형광펜의 흔적을 따라가며 다시금 위로를 얻고자 했다.
책속 자존감의 정의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등 너무 많은 좋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오늘 특히 마지막 장에 적힌 문장은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슬픈 사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 꺼진 방안에서 숨죽여 울어도 좋다.
약해서가 아니다.
인간이라 그렇다.”
윤홍균 <자존감 수업> 중에서
자존감.
오늘은 이 책의 제목이며 요즘같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인 그 자존감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이 문장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의 한 진실을 꿰뚫는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흔히 눈물을 약함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실 울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안의 감정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다.
나는 투병의 시간 동안 여러 번 울었다. 병실의 불 꺼진 자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목 놓아 울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약함을 부끄러워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조차 나를 붙잡아준 힘이었다. 눈물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살아내게 했다.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 정의는 지나치게 가볍다.
자존감은 단순히 긍정적인 자기 암시나 낙관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실패했을 때 스스로를 어떻게 다루는지, 상처받았을 때 나를 어떻게 위로하는지, 나의 결핍과 부족을 어떻게 인정하는지, 바로 그 태도의 총합이 자존감이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자존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나에게 자존감은 단순한 수용을 넘어선다. 그것은 끝내 나를 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삶의 어느 순간 누구나 무너지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 흔들린다.
그러나 진짜 자존감은 그런 순간에도 내 안의 작은 불씨를 지켜내는 일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흔들리고 부서져도 다시 내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때로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용기와 때로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조차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자존감을 만든다.
그것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강인함이 아니라 나만이 아는 내면의 깊은 충실함이다. 세상이 흔들려도 병이 끝없이 나를 시험해도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자존감의 증거다.
결국 자존감은 내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위로이며 동시에 첫 번째 격려다.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가 사라져도 남아 있는 내 목소리 다시 살아보자고 다독이는 내 안의 작은 울림.
그 울림을 놓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고난 앞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서 있을 수 있다.
나는 오늘 ‘자존감’이란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자존감은 무너지지 않는 강함이 아니라, 다시 나를 일으키는 내면의 손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