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서재에 아들의 잠자리를 꾸며주고 난 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입면의 고통 없이 곧장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루틴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서재에서 노트북을 꺼내와 앉았고 새로운 책을 꺼내기에는 아직 곤히 잠든 아들이 깰까 싶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윤홍균 교수의 <자존감 수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형광펜의 흔적 속에서 눈에 들어온 한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면
비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표면상으로 보면 원인과 결과를 말하고 있고,
차분한 물투로 조언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조언을 듣고 감정이 상했다면,
그건 비난이다.”

윤홍균의 <자존감수업> 중에서


비난.

그동안 나는 주로 긍정적인 단어에 대해 사유를 확장해왔지만 오늘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이 단어에 멈춰 서 보았다.


비난은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나와 남을 위축시키는 힘을 가진다. 아무리 좋은 상황에 끼워 맞추려 해도 비난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다.


저자는 조언과 비난의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내 말 속에 조언을 빙자한 비난은 없었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내 안의 목소리를 통해 깨달았다. 사실 나의 말에는 조언보다는 비난이 더 많았다는 것을.


비난과 조언은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뿌리에는 전혀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 비난은 상대를 고치려는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스스로 우위를 점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듣는 이는 부당하게 평가받는 느낌을 받고 마음은 닫히게 된다.


반면 조언은 상대를 돕고자 하는 진심에서 비롯된다. 조언은 해결의 길을 함께 찾으려는 손길이고 비난은 상대를 그 자리에 묶어두려는 족쇄다.


조언은 상대의 입장에서 말할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너는 왜 그렇게 했니?”라는 질문은 비난이지만 “혹시 이런 방법은 어떨까?”라는 제안은 조언이다.


한쪽은 과거의 잘못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춘다. 같은 사실을 이야기해도 상대가 위축되느냐 아니면 힘을 얻느냐는 말하는 태도와 마음의 방향에서 갈린다.


비난은 단순한 말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때로는 내 자신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투병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자주 비난했는가. “왜 더 일찍 관리하지 못했을까. 왜 더 강하지 못했을까.”


몸이 아픈 것이 모두 내 탓은 아닐 텐데도 나는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남의 말보다 더 날카롭고 잔혹했던 것은 바로 내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자기 비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비난은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오히려 죄책감과 위축만 남긴다.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은 비난이 아니라 작은 격려와 위로였다.


의사의 한마디, 가족의 미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건네는 “오늘은 어제보다 나았다”라는 작은 말. 그것들이 내 몸과 마음을 다시 살아가게 했다.


아픈 사람에게 “의지가 약하다”라는 말은 결코 조언이 될 수 없다. 대신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 하지만 함께 해보자”라는 말이 진짜 조언이고 위로다.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등을 떠미는 바람이 될 수도 있고 가슴을 꺾는 무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타인에게도 비난을 줄이고 격려의 언어를 선택하려 한다.


그것이 관계를 지키고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비난’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비난은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마음을 닫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