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올 해 그렇게 뜨겁게 대지를 달구던 여름이 가을에게 시셈을 하듯 마지막 늦은 밤더위로 내 잠을 괴롭혔다.


더는 견디기 어려워 에어컨을 켜고 겨우 잠을 청했지만 어스름한 새벽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스며든 바람이 방 안을 채웠다.


창문 너머로 밀려든 공기 속에는 가을의 이슬이 머금은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초가을의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짧은 명상으로 하루를 열었다.


몸의 긴장을 풀며 눈을 감자 계절의 흐름과 함께 내 삶의 한 페이지가 바뀌고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서재에 앉아 책장을 훑다가 작년 이맘때 읽었던 사이토 다카시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를 다시 꺼냈다.


이 책은 내가 세바시 강연을 통해 우연히 접했던 책인데, 중년 이후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차분히 풀어낸다.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그 나이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은 내게 오래 남았다.


당시 나는 인생의 후반기를 긍정적으로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작은 것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을 조금은 배웠다. 오늘 다시 그때의 형광펜 흔적을 따라가다 눈에 들어온 문장은 이렇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살다 보면 실제로 해보니
자신은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성숙'이다.”

사이토 다카시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중에서


성숙.

젊음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의 환상과 현실 속에서 마주하는 불가능의 벽. 그 사이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통찰이 바로 성숙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성숙을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얻는 덕목쯤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단순히 세월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성숙은 내 한계를 받아들이는 용기다. 젊었을 때는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모든 일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며 몸과 마음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 배움이 아프고 불편할지라도 결국 그것이 나를 성숙하게 만든다.


투병의 시간 속에서 이 단어는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 병상에서 처음 진단을 들었을 때, 나는 여전히 의지로 버티면 된다는 젊은 날의 습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치료가 이어지면서 점점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순간을 맞았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힘이 따라주지 않고 아무리 먹으려 해도 목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 몸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 사실을 억지로 부정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숙은 바로 이런 순간에 빛을 발한다.


성숙은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행위이지만 성숙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되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태도다.


나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지만 매일 짧은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예전처럼 힘차게 운동을 하지는 못해도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는 일은 나를 살린다.


성숙은 바로 이런 선택의 순간마다 균형을 잡아주는 내적 힘이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그 믿음은 도전과 성취의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무모함과 집착의 그림자도 낳았다.


이제는 무엇이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 불가능을 인정하니 욕망의 무게가 줄어들고 할 수 있는 일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다. 이 단순한 자각이 내 삶의 질을 바꾸어놓았다.


철학자들은 성숙을 자기 한계의 자각이라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성숙을 자아의 통합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내게 성숙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그것은 병 앞에서 무너진 몸을 부정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하루를 붙드는 일이다. 실패와 상실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껴안으며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성숙은 그저 나이가 듦에 따라오는 현상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서 길러지는 힘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나는 지금도 종종 불가능 앞에서 좌절한다. 치료의 부작용으로 먹는 즐거움을 잃었을 때, 일상의 활력이 줄어드는 순간마다 나는 다시 흔들린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제 성숙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할 때,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식탁의 웃음, 서재에서 읽는 책 한 권,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이 작은 것들이 나의 세계를 지탱한다.


이제 나는 안다. 성숙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더 단단히 붙드는 이름이다. 젊은 날의 가능성은 무한했지만 그 무한함 속에서 길을 잃기도 쉬웠다.


지금은 제약이 많지만, 오히려 그 제약이 내게 길을 정해준다. 성숙은 그렇게 삶의 무게를 줄여주는 동시에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다.


나는 오늘 ‘성숙’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성숙은 불가능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것을 더 깊이 붙잡는 삶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