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지나며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을 곱씹었지만 끝내 마음속 깊은 말을 전하지 못했다.


마음속에 맴도는 말들은 늘 그렇듯 침묵으로 남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낯선 도시의 대중교통을 오가며 보낸 하루는 그 자체로 피로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자리에 눕게 되었다.


간간히 깨는 신호는 있었지만 모처럼 깊은 잠을 길게 잤다. 새벽녘 천천히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을 때 개운하다기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감정이 밀려왔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였다. 창문을 열자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짧게 명상을 마친 후 서재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사이토 다카시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를 펼쳤다. 어제 읽었던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정체성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
인생 그 자체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확실히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50세의 위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이토 다카시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중에서


정체성.

그 단어는 낯설지 않으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올해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였을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가. 수없이 던져온 질문이지만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혹은 바로 그 투병 때문에 나는 더욱 정체성을 묻게 된다. 병이라는 사건은 한 사람의 삶을 무참히 흔든다.


건강하던 몸은 어느 순간 낯선 육체가 되어 버리고 하던 일은 멈추고 사람들과의 관계조차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내가 가진 정체성의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지는 듯한 경험. 나는 바로 그 혼돈 속을 지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정체성은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혹은 남들이 붙여준 호칭에만 달린 것이 아니었다. 몸이 약해지고 세상이 멈춘 듯 느껴지던 병실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였다.


아내의 손을 잡고 있었던 그 순간의 나. 딸의 웃음을 보며 잠시나마 고통을 잊었던 그 순간의 나. 회복을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땀을 흘리던 나. 글을 쓰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던 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체성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반복과 습관 속에 있었다.


정체성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새로 써 내려가는 초안과 같다.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글을 쓰는 순간, 나는 다시 내 이름을 부른다. 힘들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는 순간 나는 다시 내 몸을 확인한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웃는 순간 나는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되찾는다. 정체성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으로 다시 쓰이는 것이다.


정체성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행동, 미래의 기대가 얽힌 구조라고 말했던 것을 어떤 철학자의 이야기가 문득 기억이 났다.


그 말은 내 삶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과거의 나는 숱한 실패와 상처를 가졌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오늘 내가 택하는 습관, 오늘 내가 쌓는 반복이 내 정체성을 새롭게 한다. 미래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동들이 모여 완성된다.


결국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수정 가능한 원고이며 내가 날마다 조금씩 다시 쓰는 일기 같은 이야기다.


투병은 나를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쓰게 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변화다. 이전의 나를 잃었지만 새로운 나를 찾는 과정 속에서 나는 다시 나라는 이름을 확인한다.


병은 내게 정체성을 묻는 잔혹한 질문이었지만 동시에 답을 찾아가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안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정답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정체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정체성은 완성됨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삶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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