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밤새 불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잠시 깨었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덕분에 모처럼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일어날 수 있었다.


창을 열자 피부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고 나는 짧은 명상을 마친 뒤 서재에 앉았다. 시간이 같은 새벽이라도 계절이 달라지면 공기의 깊이가 달라진다.


오늘 새벽은 분명 어제보다 더 어두웠다. 어쩌면 그것은 밤의 길이가 조금씩 낮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은 변화조차도 계절의 흐름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의 책으로 나는 임소미 작가의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를 다시 펼쳤다.


역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정작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은 부끄러울 만큼 적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책이 내게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문장 속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이 나지막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릴지라도 사실 그것은 인간이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과도 같다. 그래서 과거의 기록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일 수 있다.


나는 오늘 이 새벽에 이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 가운데 내 시선을 붙잡은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수많은 전쟁에서 연전연승해 온 일본…
과도한 자만은 오히려 독이 되었지요...

일본 지도부는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임소미작가의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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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

승리가 쌓일수록 패배에 둔감해지는 인간의 본성. 그 끝에는 언제나 몰락이 기다리고 있음을 역사는 반복해서 증명한다. 자만은 단순한 교만이나 우월감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눈을 가리고 귀를 닫는 힘이다. 스스로의 결핍을 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만든다. 그러다 결국 모든 힘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가장 약해진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나는 자만이라는 단어를 남의 이야기로만 여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병이 내게 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도 바로 이 단어와 맞닿아 있다.


건강했던 시절 나는 몸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루쯤 무리해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자만했다. 그러나 병은 내 몸이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도 경계가 있고 내일이 당연히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조차도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자만이 깨어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의 진짜 위치를 볼 수 있었다.


자만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와 조직,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사가 그렇듯 한때의 연전연승이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지금의 성공에 도취되어 내일을 위한 준비를 잊는다. 나 또한 퇴직 전 직장에서 성과가 쌓일수록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늘 하던 방식에만 의지했던 순간에 벽에 부딪혔다. 역사는 국가에게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늘 되풀이된다.


자만의 반대는 겸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남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늘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태도다.


나의 투병 생활도 결국 이런 겸손을 다시 세우는 시간이었다. 병을 이겨낸다는 것은 병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한계와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 그것이 회복의 과정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오늘 자만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긴 시간을 생각했다.


역사의 기록 속 에서든 내 몸의 기록 속 에서든 자만은 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자만을 경계하는 순간 삶은 다시 길을 찾는다. 겸손은 나를 살리고 자만은 나를 무너뜨린다.


오늘 새벽의 차가운 바람처럼 자만이란 단어는 내 마음에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 남은 치유의 시간 또한 나는 내 몸을 자만하지 않고 지켜야 한다. 하루의 작은 회복에도 안도하면서 동시에 방심하지 않는 태도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완치라는 판정을 받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자만’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자만은 승리를 망각으로 바꾸어 결국 패배로 돌려놓는 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