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밀려든 초가을의 바람은 여전히 어둡게 가라앉은 새벽을 차갑게 흔들어 놓았다. 평소보다 더 어둠이 짙게 느껴지는 시간.
사라진 불면의 밤 끝에서 켠 스탠드 불빛 아래 내가 손에 들었던 책은 어제의 세계사책 옆에 있던 두 권의 역사 책이었다.
사진작가가 남긴 <뭉우리돌의 들녘>. 그 속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무명의 투사들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먼 타지의 차가운 땅속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무덤으로 사라졌고 누군가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존재가 지워졌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그 책 속 한 문장이 나를 깊이 붙들었다.
“그 소리 없음을 깨우는 방법은
사람들의 기억뿐이다.
허나 기억의 유통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시간은 어떻게 해서 든
모든 걸 존재하지 않던 순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그래서 기록은 인간이 죽음에 맞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 모른다.”
김동우작가의 <뭉우리돌의 들녘> 중에서
기록.
기록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짐을 인간 존재의 사라짐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인간의 기억은 유한하다. 누구나 잊고 누구나 잊힌다.
그러나 기록은 무한하다. 유한의 한계를 무한으로 연장시킨다. 그것이 종이에 남겨진 글이든 사진으로 담은 장면이든 혹은 한 권의 책 속에 새겨진 이야기이든.
기록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를 이어가는 연결고리이다. 그리고 이 의미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역사적인 울림으로 더 크게 남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은 이름난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만 실제 역사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수한 이들의 희생으로 지탱되어 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잊혀졌고 무덤은 풀에 덮여 사라졌지만 기록이 존재하기에 다시 불러낼 수 있다. 기록이 없다면 역사는 단절되고 우리는 뿌리를 상실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록은 단지 개인의 추억을 지키는 장치가 아니라 국가를 넘어선 인간 삶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다리라고 생각된다.
역사 속 기록이 없다면 지금의 우리는 자유와 삶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개인의 기록이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의 투병과 회복의 과정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투병 생활 또한 기록이라는 단어와 깊이 맞닿아 있다. 암이라는 병을 선고받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단절되는 듯한 두려움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치료와 기다림, 끝없는 검사의 반복 속에서 내가 붙들 수 있었던 것은 기록이었다. 치료 일정을 적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고, 매일의 상태를 짧게라도 메모하며 몸의 작은 변화를 읽어냈다.
고통스러운 밤에 쓴 몇 줄의 글은 다음 날의 나에게 ‘어제도 견뎌냈으니 오늘도 할 수 있다’라는 증거와 희망이 되었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때면 시간의 흐름은 늘어지고 하루는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기록이 있었다. 링거 줄에 매달린 채 적어 내려간 문장은 고통을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바꾸어 주었다.
내가 겪은 고통,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 그리고 그 순간에도 함께했던 수 많은 사람들의 온기가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 남겼기에 그 고통들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다시 살아가게 하는 자양분으로 전환되고 있다.
기록은 또한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병 앞에서 흔들리며 다짐했던 말들과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순간들의 다짐들. 그리고 다시 일상을 되찾고 싶다는 갈망들.
그것들을 글로 적어두었고, 그 다짐은 단순한 생각을 넘어 내일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 다짐은 쉽게 희미해지고, 희망은 금세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있기에 나는 그때의 나를 다시 불러내어 오늘의 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병실에서 잠 못 이루던 새벽에 쓴 글을 다시 읽을 때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를 바라본다.
절망에 무너질 것 같았던 순간에도 글을 적고 있던 나는 이미 회복을 향한 길 위에 있었다. 고통을 문자로 옮기는 행위는 고통을 객관화했고 그 객관화는 극복을 가능하게 했다.
기록이 없었다면 나는 단순히 병에 짓눌린 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 덕분에 나는 병을 겪으며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기록은 죽음에 맞서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화는 기록된 이야기이고, 역사는 기록된 시간이며, 개인의 삶조차도 기록 없이는 존재가 없다.
기록이란 결국 ‘나는 여기에 있었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매일의 순간을 단어로 붙들고 나의 투병의 여정을 한 줄씩 남긴다.
그것은 단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기록이 닿아 그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죽음 이후에도 작은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이름 없이 사라졌으나 기록을 통해 다시 불러내어지듯 나의 투병 기록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 ‘기록’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기록은 잊혀지는 존재를 지켜내려는 인간 최후의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