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밤과 아침 사이 어딘가에 걸린 듯한 어둠 속에서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책장을 펼쳤다.


익숙한 동작이지만 새벽의 감각은 매번 조금씩 달라졌고 오늘은 유난히 생각이 깊어지는 기운이 밀려왔다.


아마도 오늘 선택한 책 때문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 읽었던 <수용소의 하루>가 남긴 잔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 하루를 버텨낸 이반 데니소비치의 마지막 숨결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과연 그처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마음 한쪽에서 계속 고개를 들었다.


그 연장선에서 나는 오늘 또 다른 생존자의 기록을 통해 같은 비극 속에서도 어떻게 희망으로 건너가는 마음이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떻게 한 인간의 의학적, 정신적 회복과 연결되는지를 조금 더 깊고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풀어보면,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제목은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붙인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 10page



낙관.

1. 세상이나 사물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려는 태도.

2.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함.


프랭클의 문장을 따라가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풀어놓은 부분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조합은 오랫동안 모순처럼 느껴졌지만 동시에 오래 바라볼수록 묘한 진실을 품은 문장이기도 했다.


비극과 낙관의 조합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본질적인 관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낙관적이라는 단어는 밝고 긍정적인 태도라고 설명되어 있었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조금 더 복잡한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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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었고

무조건적인 희망도 아니었다.


우리는 누구에게서 낙관적이라고 느낄 때 그 사람의 행동보다 말투를 먼저 떠올린다.


힘든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무너지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 즉 낙관적인 것은 행동보다 마음의 방행에서 먼저 생겨나는 것이다.


낙관의 빛은 상황이 밝을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상황이 어두울 때만 비로소 존재의 형태를 드러낸다. 마치 새벽의 빛이 어둠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렇다면 현대의 삶이 왜 이토록 낙관을 유지하기 어려운지 이유는 단순해진다. 상황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하나 뿐인 삶을 밝지 않은 상황에서 살고 있을까?


현재 우리들은 너무 많은 정보 속에 살아가고 있고 그 정보는 대부분 위험을 경고하거나 미래의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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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이 있어야 할 자리는 두려움이라는

이름 아래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비교라는 문화가 낙관의 뿌리를 쉽게 흔들어놓았다. 비교는 현재를 박탈시키고 타인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을 만든다.


낙관적 시선은 자신의 속도를 인정할 때 생겨나는 태도이지만 현대 사회는 개인의 속도를 용납하는 데 인색했다.


사람들은 낙관적 시선을 근거 없는 긍정이라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낙관은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뒤집어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미래에 대한 문을 닫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낙관적인 시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투병의 시간을 지나오며 그 사실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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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과정은 신체의 영역이었지만

회복 과정은 마음의 영역이었다.


낙관이라는 태도는 단순히 정신적인 위로가 아니라 실제로 몸이 회복하는 속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절망과 비관은 몸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다. 낙관적인 사고는 다시 몸의 리듬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힘을 가졌다.


낙관이 회복의 속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이 시간이 너무 힘들어 마음속의 불안이 크게 일었지만 미래를 향한 작은 희망이 다시 그 마음을 붙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낙관적이라는 것이 병을 과소평가하는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병의 존재를 정확히 알기에 가능한 태도였다.


고통과 위험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가 선택할 태도도 분명해졌다. 그 태도가 조금 더 나를 살리고자 하는 방향을 향한다면 그것이 바로 낙관적 시선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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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멈춰 있을 때 마음이 어쩌면

더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야만 치유되는 것들이 있고 그 흐름 속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안 희망의 자리가 조금씩 생겨났다.


사람들은 종종 “낙관적으로 생각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낙관이 근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았다.


근거가 없기 때문에 낙관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만들기 위해 낙관을 택하는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


낙관적인 것의 의미는 비극을 부정하지 않고 비극의 자리를 허용하면서도 그 위에 다시 무엇인가를 세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마치 무너진 집터 위에 다시 집을 짓는 것처럼 이전과 다른 집이겠지만 그 사실이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새벽마다 이런 생각을 하나씩 정리하며 내일을 향한 마음의 장작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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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이 장작들이 내 삶의 불씨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견딜 이유를 만들어주는 태도이며 오늘 살아갈 방향 또한 그 태도에서 비롯된다.


나는 ‘낙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낙관은 고통을 통과하며 자라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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