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어둠이 아직 방 안 깊은 곳까지 남아 있었다. 희미한 창밖의 기운이 조용하게 내려앉고 나는 늘 그렇듯 책상 앞에 앉아 몸보다 마음이 먼저 깨어나는 시간을 맞았다.
그리고 책상위 놓여진 가을 낙엽의 색채를 닮은 한권의 책의 후반부를 펼치며 단순하게 생활한다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치료 이후 매일 반복되는 이 새벽의 고요는 어느새 내 하루의 단순한 리듬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함보다 오히려 고요함에 더 가깝다.
그 고요를 뚫고 오늘은 한 문장이 천천히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외로운데 우리는 왜 다 걸을까. 외로운데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가 될까.
노화가 진행될 만큼 나이를 먹다 보니 알게 된 걸까. 외로움은 결국 개인의 몫이라는 걸.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내 안의 외로움을 깨끗이 지워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단순생활자 중에서 - 207page
외로움.
1. 곁에 사람이 없거나 마음을 나눌 대상이 없어 쓸쓸함을 느끼는 상태.
2.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감정.
사전적 정의는 단순하지만 내가 겪어 온 외로움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거웠다.
나이를 먹어가며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잘라도 다시 자라는 뿌리 같은 것이고 타인이 대신 정리해 줄 수 없는 깊은 서랍 같은 것이다.
투병을 겪으며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졌다. 누구의 손길도 온전히 내 고통을 대신할 수 없었고 누구의 위로도 내 마음의 가장 안쪽까지 닿지는 못했다.
사람들의 다정함이 헛되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나를 구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흔히 고립의 증상처럼 여겨진다. 누군가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 자체가 결핍처럼 해석되는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외로움이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외로움은 스스로에게 돌아오기 위해 마음이 만들어 놓는 임시 휴식지이자,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막이다.
얼마 전 내가 적었던 은둔의 의미와도 깊이 닮아 있다. 은둔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었듯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외로움은 나를 고립시키는 감정이 아니라 내 안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조용한 정리 단계였다.
그래서 외로움은 단순히 쓸쓸함이
아니라 마음을 복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로움이 남긴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지만 그 빈 자리에서 나는 나 자신과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다.
외로움이란 개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약함이었다. 내가 세상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 속에서 때때로 추워지고 다시 스스로를 끌어안아야만 했던 시간들이 필요하고 치료가 이어지던 날들 속에서 나는 종종 ‘나는 왜 이렇게 홀로 서 있는 느낌일까’를 되뇌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건 외로움이 반드시 결핍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외로움은 내가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조용한 거울이기도 했다.
그 거울 앞에서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버텨왔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법을 배웠다.
외로움은 도피가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마주 선 순간 비로소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형태가 가장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을 실천의 단어로도 이해하며 살아왔다.
그 실천이라는 것은 외로움을 없애기 위한 행동이라고만 여겼다.
사람을 만나고 말을 나누고 빈 시간을 채우는 일들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외로움을 견디는 힘도 실천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걷는 것도, 멈추는 것도, 혼자가 되는 것도 모두 외로움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사람은 결국 홀로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길이 반드시 비뚤어지거나
허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나만의 리듬을 되찾는 일이고 내가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며 마음의 근육이 천천히 단단해지는 시간이다.
외로움이 나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재구성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사람은 완전히 혼자가 되지 않는다.
철저히 혼자라 느끼는 순간조차 누군가의 말 한 줄, 작은 안부, 창밖의 새벽 공기, 조용한 책 한 장이 아주 느린 속도로 나를 다시 세상과 연결한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외로움이란 나를 다시 세상과 잇는 가장 조용한 조율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