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동대구역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수서로 향하는

창밖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도시처럼

어둡고 고요하다.


철로 위를 달리는 일정한 진동이 몸속 깊은 곳에서

오늘의 목적지를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PET-CT 검사가 예약된 날.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마친 지 네 달.


그동안 나름대로 절제된 생활을 했고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병원을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안은 길을 먼저 나서고 두려움은 그 뒤를 따라붙는다.


나는 늘 그것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기차는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고 그 순간 문득, 떠오른 단어 하나가 나를 붙잡았.


흔적.

무엇이 지나가거나 있었던 뒤에 남은 자국

과거의 시간이나 행동이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는 형태로 남이 있는 것


암이라는 존재가 내몸속에 들어온 이후의

삶에서 흔적은 단순한 표시의 뜻을 벗어난다.


개념을 떠올리는 순간 감정이 먼저 스며든다.

나는 치료의 고통을 지나온 몸을 가지고 있다.


7개월 전 처음 발견된 암세포의 기원은

어떤 흔적으로 시작된 것일까?


그 점을 생각할 때마다 흔적이라는 단어는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 놓인 경계처럼 느껴진다.


지워지기를 바랐던 흔적과 남아 있기를 바라는

흔적이 뒤섞인다.


불안은 소리 없이 올라왔지만 나는 기차 안에서

그 감정에 마주 앉았다.


흔적은 나를 위협하기도 하고 나를 살리기도 한다.


남지 않기를 바라는 흔적도 있지만

남아 있어야만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는 흔적도 있다.


나는 결국 이 흔적들과 동행하며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더라도 흐려지기를 바라며,

흔적을 없애려는 삶이 아니라

흔적을 넘어서는 삶을 택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사를 받으러 가는

지금 이 순간을 견디고 또 기록하는 일뿐이다.


위로는 느리고 조용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창밖 풍경이 서서히 밝아지듯,

검사 결과가 어떠하든 이미 많은 흔적을 지나왔다.


고통의 흔적은 회복의 흔적으로

다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오늘 내가 기차 안에서 이 단어를 붙잡은 이유도

어쩌면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기차는 여전히 규칙적인 리듬을 쏟아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불안도 두려움도 지금은 나의 일부다.

하지만 흔적은 바뀔 수 있다.


오늘의 흔적이 내일의 증거가 된다면

그 길을 또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흔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흔적이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희미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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