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의 공기는 설익은 겨울처럼 조용했다. 창문을 조금 열자 아직 차갑게 남아 있는 어둠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책장 위의 책 한 권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동안의 시간을 떠올리는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늘 내가 읽은 문장은 내 마음 한쪽의 멈춘 시간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었다.

“책과 책 사이의 2년 반이란 공백,


작가에 따라 2년 반이란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책과 책 사이의 공백에 이젠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단순생활자 중에서 - 192page


공백.

1. 글이나 그림에서 비어 있는 부분.

2. 기록과 활동이 일시적으로 끊겨 비어 있는 시간.


사전적 정의는 늘 담백한데 이상하게도 이 단어는 내 삶에서는 늘 감정과 붙어 다녔다. 한때 나는 이 공백을 두려움처럼 여기서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놓친 흔적처럼 느껴졌고 뒤처진 시간의 증거 같았다. 투병 이후 이 감정은 한동안 더 커졌었다.


멈춰버린 나의 일상, 몸이 따라주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시간, 그 시간을 공백이라 부르기엔 너무 절박했고 또 너무 고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단어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공백은 비어 있는 구멍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계속해서 살기 위해 버텨야 했던 숨구멍 같은 것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비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고 멈춰 있었기에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blank-1868502_1280.png?type=w1

공백은 시간을 버린 게 아니라

시간을 되찾는 방식이었다.


감정은 늘 뒤늦게 정리된다. 투병 중의 멈춤은 나를 무너뜨린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붙들어 준 일이기도 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감정들, 느끼지 못했을 관계들, 그 모든 것은 공백의 틈에서 흘러들어왔다.


그 틈은 고통의 시간인 동시에 회복의 시간이었다. 공백은 멈춤이 아니라 재정렬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생각은 나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바라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poster-3996542_1280.jpg?type=w1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공백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필수에 가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모두가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움직임이 능력이고 멈춤이 결손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공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멈춰서 숨을 고르고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빈칸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방향을 잃고 지쳐 쓰러지고 만다.


공백은 삶의 속도를 조절해 주는 장치이자 내면의 체온을 회복시키는 회생 구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공백을 억지로 채우지 않기로 한다.

woman-9627860_1280.jpg?type=w1

비어 있는 시간을 잘 견디는 일이야말로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천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요즘 자주 느낀다. 나는 거창한 움직임보다 아주 작은 것을 선택하게 된다.


오늘의 나를 지키는 일, 내 마음 한쪽에서 말없이 울리는 신호를 알아듣는 일, 공백을 겁내지 않는 일, 비어 있는 칸을 억지로 채우지 않는 일.


그저 그 공백을 인정하고 어루만지는 일들이야말로 진짜 실천이었다. 오랜 시간 꽉꽉 채워진 노트의 글처럼 살아온 내게도 공백이 필요했다.


치열한 감정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몸의 고통이 마음의 흔들림을 따라잡을 때까지 멈춰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공백의 시간은 나를 생존하게 한 작은 은신처였다.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끊기고 이어지고 다시 멈춰가는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백’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공백은 삶이 호흡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필요한 환기구 같은 곳이다.





이전 16화‘동행’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