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온은 아직 낮과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창틈에 머물다 이내 서재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 한 모금을 들이키며 오늘 읽은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낯선 환경에 불안해질 때 낯익은 눈이 내 눈을 바라봐줄 수 있도록, 여행지의 모든 것이 낯설어도 하나만큼은 낯설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만약 동행 없이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면 나는 기어코 그곳을 낯익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
단순생활자 중에서 - 182page
동행.
1. 두 사람 이상이 같은 목적지나 방향을 함께 이동하는 것.
2. 물리적인 이동을 넘어 생각, 결정, 과정, 삶의 방향을 함께 하는 것.
이 단어는 단순한 움직임의 묘사가 아니라 낯섦을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따뜻함이었다.
동행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면 먼저 안도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누군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낯선 환경이 두 배쯤 익숙해지는 경험을 나는 여러 번 겪어왔다.
아무 말없이 옆에 있는 존재가 공간의 온도를 바꾸고 모르는 길의 위협을 덜어주고 나라는 사람의 중심을 붙잡아준다는 사실.
그 힘은 생각보다 크고 때로는 생존의 감각으로까지 이어졌다.
투병의 순간을 지나오며 나는 동행의 의미를 다시 배웠다. 몸이 무너진다는 느낌은 홀로 견디는 감각을 지나쳐 공포와 가까웠다.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흔들릴 때 중심을 대신 잡아주던 눈빛, 그 침묵의 동행은 치료 과정의 절반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다른 종류의 동행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누군가와의 동행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지만 물리적 의미의 ‘함께 있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의 절반일 뿐이었다.
인생이 반드시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걸어야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생각과 결정과 방향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와 나란히 걸어줄 때 비로소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은 혼자 걷고 있어도 마음이 나와 함께 움직이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동행이었다.
타인이 없을 때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결국 외부가 아니라 내가 나를 믿고 따라가려는 작고 단단한 의지였다.
그러나 모든 길에 누군가 함께 걸어주는 것은 아니다.
병원 복도에서 혼자 걸어야 했던 몇몇 새벽과 결과지를 혼자 받아 들고 숨을 고르던 날들, 집으로 돌아오는 밤에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야 했던 시간들.
그 모든 순간은 동행 부재의 시간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선명한 것을 남겼다.
‘내가 내 동행이 되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누군가의 낯익은 눈이 없을 때 나는 주저앉기보다 그 자리의 낯섦을 천천히 익숙하게 만들어야 했다.
두려움은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나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새로운 공간을 스스로 익숙하게 만드는 태도를 배웠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은 그 길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동행이란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이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나 자신의 손을 내가 잡는 일이다. 위로라는 것은 거창한 말이나 특별한 행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방향을 하나라도 결정해보는 작은 실천과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조용한 선택의 반복이 결국 내 삶의 동행이 되어 준다.
오늘 나는 이 단어를 오래 바라보며 생각했다. 동행은 불안을 덜어주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실천이다.
누군가가 함께 걸어줄 때 나의 속도는 안정되고 누군가가 없을 때 나의 마음은 새로운 익숙함을 만든다.
그 둘 모두가 삶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동행이라고 나는 느낀다.
나는 ‘동행’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동행은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까지 포함하는 가장 넓은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