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오늘 유난히 얇고 차가운 막처럼 다가왔다. 어둠이 남긴 냉기를 머금은 공기는 폐 속 깊은 곳까지 서늘한 바람을 밀어넣으며 초겨울의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창문을 조금 열자 틈새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고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나를 흔들었고 소름돋는 피부의 떨림이 어두운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차한잔과 함께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복잡한 세상처럼 차가운 날씨에 따뜻한 한권이 책을 다시 펼쳤고 그 순간 문장의 한 구절이 조용히 나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이야기를 깊은 접촉이라 할 수 있을까.
피부의 접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접촉.
이렇게 접촉이 일어난 인물은 그들이 영상 속에 있건 책 속에 있건 내가 만난 사람이 되었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몰라도, 나도 이런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다. 독자와 접촉하게 되는 인물을.”
단순생활자 중에서 - 86page
접촉.
1. 사람이나 사물의 표면이 서로 닿는 것.
2. 서로 대면하거나 교류하는 행위, 즉 인간관계의 연결
3. 사람이나 사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
접촉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단어를 이야기와 연결하며 접촉의 의미를 한층 더 넓고 깊게 확장하고 있었다.
살갗이 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만남들과 생각과 생각이 만나 흔들림을 만드는 일 그리고 사유의 공유를 통해 생겨나는 마음의 닿음을 의미했다.
작가의 이 문장을 떠올리며 마음의 접촉이라는 표현을 오래 곱씹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실제로 만나지 않아도 깊이 흔들릴 때가 있다.
책 속 인물이나 영상 속 인물이 내 안의 오래된 감정 하나를 건드릴 때 그 순간 이미 접촉은 일어난다.
인물을 직접 본 적이 없어도 그들이 나의 세계 안에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만남이다.
생각 즉, 사유가 공유되는 순간
마음의 표면은 반드시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오래 남는 형태의 접촉이다. 문장 하나가 나의 감정 결을 바꿔놓기도 하고 한 인물의 고백이 나의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기도 한다.
접촉은 까칠한 손끝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여러 책과 문장들을 통해 배워왔다.
요즘 우리의 현실에서 접촉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자주 연결되고 훨씬 빠르게 말을 주고받는다.
SNS의 메시지 알림은 마치 누군가가 끊임없이 나를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빠른 연결 속에서 정작 마음의 접촉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닿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쳐가는 경우가 더 많고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에게 머무르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접촉의 진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접촉이 깊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빨리 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닿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한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잠깐의 대화보다 마음에서 올라온
한 줄의 사유가 더 깊은 접촉을 만든다.
문득, 내 몸이 겪은 지난 시간들 속에서 수많은 접촉의 형태들을 떠올렸다.
치료 장면에서 느껴졌던 차가운 기계의 금속 표면도 접촉이었고 의사의 손끝이 내 목을 더듬으며 상태를 확인하던 순간도 접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물리적 접촉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말 한마디와 표정 그리고 조용히 옆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투병의 시간 동안 나는 이 두 가지 접촉을 모두 겪었다. 방사선 치료대 위에 누워 있을 때는 내 몸이 더 이상 내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순간 접촉은 생존을 위한 절차가 되었다. 그러나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매일 병원을 데려다 주던 기사의 운전, 치료를 마치고 나면 영양제를 놓아주던 간호사의 손길, 매일 병실로 음식을 가져다주던 조리사의 손길.
이 모든 것은 피부를 건드린 적이 없는데도
내가 가장 깊이 흔들리던 접촉이었다.
어쩌면 인간은 서로를 만지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빈틈에 닿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빈틈이 없다면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병의 시간을 통과하며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어쩌면 이 접촉을 믿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의 문장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사소하게라도 흔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조용한 접촉이 일어난 것이다.
이야기란 결국 마음과 마음을 잇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니까.
새벽 공기의 차가움이 조금씩 옅어지며 창가에 빛이 번져왔다. 그 빛이 방 안을 천천히 채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접촉이란 어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표면이 살짝 흔들리는 순간, 그 흔들림 속에서 서로의 온도를 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접촉’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접촉이란 마음이 마음에 도착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