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새벽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려내며 하루를 시작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별일 없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이 오히려 귀하게 느껴졌다.
몸의 컨디션은 변함없이 일정했고, 마음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날이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회복의 또 다른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가로 스며드는 찬 공기 속에서 다시 황보름 작가의 <단순 생활자>를 펼쳤고 ‘은둔’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했다.
작가가 말하는 ‘명랑한 은둔자’라는 표현이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숨어버린 삶이 아니라 필요 이상의 소음을 멀리 두고 자신이 지켜야 할 채널만 선명하게 유지하는 삶.
외로워서 숨는 은둔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고립이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지금의 나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병 이후 자연스럽게 세상과 멀어진 듯했지만 사실은 나를 다시 살리기 위해 필요한 거리였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기 위해 선택한 조용함이었다.
그런 새벽의 여운을 안고 지난 주말 처형이 준 약초 달인 물을 찻잔에 따라 마시며 하루를 열었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온기가 목을 천천히 적실 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약초를 차로 태우니 좋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아내가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잠시 멍해졌다. 무엇이 고마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내가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준비 다 됐으니 가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어디를?” 하고 되물었더니
이번에는 아내가 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차 태워준다며?”
아내는 내가 약초를 물에 ‘태워서’ 마신다는 말이 아니라 ‘차로 태워준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약초를 물에 타서 마신다는 말인데
나도 모르게 태워 마신다고 했다.
나도 이제 대구 사람 다 되어가는가 보다.
작은 말 한마디에서 벌어진, 어이없지만 피식 웃게 되는 아침 풍경이었다. 결국 롱패딩을 걸치고 수면바지에 모자를 눌러쓴 채 아내의 출근길에 동행했다.
현관을 나서며 맞은 바람은 매섭게 차가웠다. 바람에 실린 낙엽들은 갈색 회오리를 만들며 이리저리 흩날렸고 칼바람이 옷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얼떨결에 끌려 나온 아침이었지만 이런 날은 데려다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사소한 오해가 만들어준 의외의 동행, 그 것만으로도 묘하게 흐뭇한 아침이었다.
집에 돌아와 막 롱패딩을 벗으려던 순간, 속주머니에서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올해 처음 꺼내 입은 패딩이라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순간 ‘혹시?’ 하는 설렘이 스쳤다. 확인해보니 작년까지 쓰던 지갑이 들어 있었다.
작년 1월 제주도로 떠나기 전 아내가 새로 선물해준 지갑을 쓰기 시작하면서 예전 지갑을 패딩 속에 넣어둔 모양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괜히 들떠 지갑 안을 확인했다. 혹시 잊고 둔 돈이라도 있나 싶었다.
기대와 묘한 설렘으로 열어본 지갑 속에는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고이 들어있었다.
순간 허탈함과 함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내 돈이었겠지만 기왕이면 5만 원짜리 몇 장이라도 넣어둘 걸 하는 말도 안 되는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 자체가 우스워졌다. 작은 지폐 한 장이 전해준 미묘한 설렘과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마음을 살짝 환기시키며 하루의 시작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갑을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어디서, 어떻게, 왜 이 1달러가 내 지갑 속에 들어가 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외에 갔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건넨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폐가 전해준 건 금전적인 의미보다 기억나지 않는 무엇이 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내가 분명히 지나왔을 시간인데도 기억이 희미해지고, 어떤 순간은 선명해야 할 기억까지 흐릿해진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 기억 한쪽에 오래 남기도 한다.
기억이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모두 붙잡히는 것도 아니고,
잊고 싶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삶은 내가 기억하는 순간과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뒤섞여 완성되는 그런 모양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 속 1달러는 어쩌면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친 수많은 하루들 중 하나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건도 아니고 흩어져버린 기억이지만 이렇게 다시 찾아온 순간 자체가 묘하게 느껴졌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잊어버린 것들까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깨달았다.
기억 속에 남지 않는 순간들까지도
오늘의 나를 만드는 데 분명히
어떤 역할을 했을 거라는 사실을.
사소한 1달러가 전해준 작은 공백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고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어도 괜찮다는 그런 여유 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억나지 않는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틈을 통해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국 이렇게 잊힌 순간들과 남은 순간들이 나란히 놓여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