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05.예상치 못한 불수능,
그리고 막내의 성적표.

by 마부자

차한잔으로 시작하는 어두운 새벽, 단순 생활자의 책을 펼치며 오늘은 ‘접촉’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적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모든 접촉의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손에 닿는 접촉뿐 아니라 나의 모든 감각에 들어오는 것이 접촉이라는 글을 적으며 살아있음에 묘한 감사를 느끼는 시작이었다.


뉴스에서는 수능 성적표가 오늘 학생들에게 전달된다고 전했다. 올해 수능은 영어와 국어가 유독 어려운 ‘불수능’이었다고 했다.


만점자조차 작년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막내가 했던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시험이 끝난 날 막내는 다른 과목은 평소처럼 봤지만 영어가 너무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친구들은 영어가 쉬웠다고 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막내는 자신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자책했었다.


그때는 그저 수험생끼리의 이야기로 들었지만 오늘 뉴스에서 영어가 역대급 난이도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나는 어른의 방식으로 조금 씁쓸한 생각을 했다.


왜 아이들은 쉬웠다고 말했을까?

thermometer-4294021_1280.jpg?type=w1

정말 쉬웠다고 느낀 학생도 있었겠지만,

그 말들이 모두 같은 온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혹시 자신이 흔들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불안의 자리를 감추고 싶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내뱉은 말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누구보다 약해질 수 있는 순간에 오히려 더 강한 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내 마음을 숨기는 태도와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해지지 못하는 경쟁의 모습들은 어쩌면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오며 앞에서, 혹은 뒤에서 끊임없이 보여주었던 어른들의 방식이었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불안도 흔들림도 감춘 채 버티는 방식을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라는 것이다.


넘어질 때조차 태연한 척하던 삶의 태도가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오늘따라 더 복잡하게 들렸다.


스스로의 불안보다 경쟁의 구도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마음, 자기 안의 부족함보다 상대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그 미묘한 심리를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시리게 내려앉았다.

%EC%9D%B8%EA%B0%84%EA%B4%80%EA%B3%84%EB%A1%A0_(111).png?type=w1

어른이 된다는 게 결국 이런 마음의 그림자를

더 많이 품게 되는 일이라면,

아이들이 조금은 다르게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더 강해져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등교 준비를 마친 막내에게 나는 현관에서 말했다.

“혹시 성적표가 예상보다 적게 나와도 절대 실망하지 말고 바로 집에 와.”

그 말에 막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문이 닫히고 서재로 돌아와 며칠 전부터 읽던 책을 펼쳤다. 책 속의 문장들 역시 아이들의 언어와 생각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오늘따라 더 깊이 공감하며 읽어나갔다.


독서와 실내 자전거 운동을 마칠 즈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내는 성적표를 조심스럽게 내밀며 말했다.

“아빠, 다행히 제가 원서 넣은 학교의 최저 기준은 맞춘 것 같아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막내를 끌어안고 “고생했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막내가 조용히 털어놓았다.

“사실 어제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잤어요.”


평소에 아무렇지 않은 듯 밝게 지내던 모습 뒤에 이런 마음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병 이후 하루하루를 버티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느라 바빠 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떨리고 있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막내의 성적표보다 더 소중했던 건 그 아이가 품고 있었던 밤의 불안, 그리고 그것을 말해줄 만큼 자란 마음이었다.

INFJ%EC%98%81%EC%83%81_export_(4).png?type=w1

이 작은 접촉이, 어쩌면 오늘 내가 가장 크게 만난 세계였는지도 모르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접촉’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