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드는 밤, 그리고 짧은 면회

삶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드는 무언가를 그녀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by 마부자

어젯밤, 매실주 한 잔의 도움으로 11시에 잠들 수 있었다. 잠든 지 몇 시간 만에, 새벽 4시가 되자 여지없이 눈이 떠졌다.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5시간이나 잤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 위로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잠들려 노력하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쓸데없는 잡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 말아야 할 생각들, 평소에는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과 걱정들이 새벽의 적막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내의 회복에 대한 불안, 아이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일들까지. 이 새벽은 내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었고, 그 틈을 노린 생각들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잠을 청하려고 고전적인 방법을 써보았다. 양을 세어보며 숫자에 집중하려 했지만, 수백 마리쯤 세다 보면 어느새 숫자를 잊어버렸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머릿속은 다시 또 다른 잡생각으로 채워졌다. 새벽의 시간은 늘 이렇게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문득 깨달았다. 이 불안한 새벽이야말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균형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잡생각들을 억지로 쫓아내려 하지 말고, 그 생각들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다시 잠들지 못한 채 맞이한 아침은 몸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다짐이 남아 있었다. 오늘 하루는 조금 더 마음을 다독이며, 불안을 희망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이 반복되는 새벽의 깨어남도 언젠가는 끝날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품으며, 나는 또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의 긴 뒤척임 끝에 결국 잠들지 못하고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확인하며 6시 알람을 껐고, 잠시 눈을 붙이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누웠다. 그런데 눈을 뜬 시각은 이미 7시 30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하루의 시작이 뒤로 밀려버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잠을 잔 것은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몸이 필요로 했던 휴식을 채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엉킨 생활 루틴이 마음에 걸렸다.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흐릿한 하루들이 쌓여가는 것이 이대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출근을 시작해야 할 날이 다가오면, 나는 다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무너진 루틴 속에서 느슨해진 나 자신을 돌아보며, 아내의 회복만큼이나 나의 일상도 회복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기도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가 조금 더 안정되길, 그리고 나와 아내 모두가 회복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갈 수 있기를. 어쩌면 이런 시간들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작은 다짐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짐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다시 루틴을 찾아갈 것이라고. 잠깐의 무질서가 나를 흔들지 않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법을 배우겠다고.


늦게 시작한 오늘이지만, 나는 그것이 회복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믿기로 했다. 무너진 루틴 위에서도 다시 걸음을 내딛는 그 작은 변화가 결국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감사합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오늘은 어제보다 더 밝고 회복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이 사람 빨리 회복하여 예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마리아님,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 이 사람 빨리 회복하여 예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오늘 아침, 막내가 피곤했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고민 끝에 집에서 쉬라고 하고, 나 혼자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10시 06분 지하철에 몸을 실으니 병원에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업무 관련 전화와 본부장의 카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울릴 때마다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 순간만큼은 친절하게 응대할 여유가 없었다. 나를 짓누르는 답답함과 짜증이 복잡하게 얽히며, 업무라는 현실과 가정이라는 책임 사이에서 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흔들리는 듯했다.


아내가 병원에서 나오게 되면, 그 흔들림은 더 커질 것이다. 일과 가정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아내의 회복은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텐데, 내가 지금처럼 병원과 직장을 오가며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어쩌면 휴가나 병가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현재 나의 최우선 과제는 아내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 그녀의 회복 없이는 나의 일상도, 우리 가족의 평화도 온전히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업무라는 현실의 무게는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과제이지만, 내가 지금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우선순위가 앞으로의 삶을 결정할 것이기에, 나는 흔들리지 않고 아내의 곁을 지킬 것이다.


지하철의 흔들림 속에서 나는 작은 다짐 하나를 붙잡았다. 오늘도 그 다짐으로 나를 다독이며 병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방법으로 이 고민의 해답을 찾아갈 것이다. 가족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나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면회시간이 되어 병실로 들어가니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살짝 깨웠다. 천천히 눈을 뜨며 나를 보자, 반가운 미소와 함께 "왜 이제 왔어?"라는 첫 마디가 돌아왔다. 짧은 인사 뒤에 이어지는 아내의 토로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 너무 힘들고,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조금만 더 참아보자"며 다독였다. 나 역시 그녀의 답답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회복의 길은 조급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에게 조금 더 힘을 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실로 내려가는 일정이 궁금해 간호사에게 물었다. 내일 과장님이 사진을 보고 결정할 예정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내에게 그 말을 전하자, 그녀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으로 "빨리 내려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농담 섞인 말로 "내일 과장님께 직접 말해보자. 빨리 내려가고 싶다고."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 순간 아내도 작게 웃어주었다. 힘들고 지친 상황 속에서도 나눈 그 짧은 웃음은, 마치 우리 둘이 여전히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작은 신호 같았다. 그녀의 회복을 위한 과정 속에서 이런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새삼 느꼈다.


내일 과장님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아내의 곁을 조금 더 단단히 지키기로 다짐했다. 그녀의 고통을 직접 대신할 수는 없지만, 웃음과 위로로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이 병실 속에서의 하루하루는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우리 같이 힘내자." 아내에게 말했지만,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전하는 다짐이었다.


간호사가 와이프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밤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자꾸 간호사를 부르지만, 낮에는 주로 잠을 잔다는 것이다. 누워 있는 시간이 하루 대부분이니 낮과 밤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내가 느낄 답답함과 외로움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에게 무심히 말했다.

"나도 밤에 잠을 잘 못 자."


그러자 그녀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왜?"


그 물음은 짧았지만, 나를 잠시 멈춰 서게 했다. 사실 이유는 너무 많았다. 아내의 건강, 가족의 미래,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 그 모든 걱정이 밤마다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농담처럼 대답했다.

"자기 없어서!"


그 말에 아내는 피곤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짧은 눈 맞춤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연결되었다.


농담은 농담으로 끝났지만, 내 속마음은 그 말 그대로였다. 그녀가 없어서, 그녀가 아프고 힘들어서, 나는 잠들기 어려운 밤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아 웃으며 농담으로 가볍게 넘겼다.


낮과 밤이 흐려진 아내의 병실 속에서도, 우리의 대화와 눈빛은 여전히 작은 일상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일상이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길 바란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 낮과 밤이 분명히 다시 구분되는 날이 올 거야." 우리의 시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나는 이렇게 그녀 곁에서 조금씩 웃음과 위로를 전해줄 것이다.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을 때, 간호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남편분 오시니까 그래도 말씀도 많이 하시네요. 평소에는 잘 대답 안 하시던데요."


그 말에 아내는 간호사를 익살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게 장난을 쳤다. 병실 안에 따스한 공기가 번졌다. 아내의 그런 작은 장난스러움조차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간호사의 말처럼, 내가 병실에 들어올 때마다 아내가 조금 더 활기를 띠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그녀는 가족과의 대화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병원의 고요하고 차가운 공간 속에서 누워만 있는 그녀에게, 가족과의 시간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이 모습을 보니 하루빨리 일반실로 내려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심심함을 덜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치료와 약물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따뜻한 교감임을 나는 점점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손을 잡고 아내와 나눈 짧은 미소와 대화 속에서, 나는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병실의 시간은 여전히 느리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내가 더 자주 웃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채워나갈 수 있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더 많이 웃게 해줄 거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이 병실의 답답함을 잊게 해줄 거야."


그렇게, 아내와 내가 함께 만들어갈 시간들을 떠올리며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간호사가 아내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말하며 물어왔다.

"와이프분이 밥을 잘 안 드세요. 왜 그러시죠?"


나는 자연스럽게 아내에게 물었다.

"왜 밥을 안 먹어?"


그러자 아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맛도 없고, 누워있는데 굳이 다 먹을 필요 있겠어?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 돼."


그 말이 참으로 단순하고, 또 명확했다. 아내의 답을 듣고 나니 내가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병원밥이 맛있을 리 없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상태라면 식사라는 것도 하나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 있을 텐데, 그걸 굳이 묻다니.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아내의 지친 마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무기력해진 상태,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삼켜야 하는 반복된 일상. 어쩌면 그녀는 이 답으로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나에게 털어놓았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잡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조금씩은 먹어줘. 그래야 힘이 나고, 빨리 집에 갈 수 있잖아."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차가운 침묵이 자리하고 있었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좁고 답답하게 만든다. 먹는 일조차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고단하게 느껴지겠지. 나는 아내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문득, 내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음식이든, 작은 위로든, 그 답답함을 덜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더 깊이 듣고 싶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가 아닌, 삶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드는 무언가를 그녀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오늘의 질문과 대답이 그런 마음을 열어주는 시작이 되길 바라며, 나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의사 선생님이 병실에 오셨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일 과장님과 상의해 일반실로 갈 수 있을지 논의해보죠." 차분한 목소리에 작은 미소가 스며 있었다. 늘 냉정하고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가 오늘은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 순간,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이분이 당신을 살렸어."


그러자 아내는 잠시 의사를 올려다보더니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예쁜 여자 선생님들 많이 소개해 드릴게요."


그 말에 병실 안은 작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의사도 잠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으로 가볍게 흘려보내는 말 속에 담긴 감사함과 안도감은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농담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병원의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삶의 온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내의 말투는 천진하고 어딘가 약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익숙한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농담에서 그녀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힘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그녀의 회복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내일 일반실로 내려갈 수 있을지 결정된다면, 그녀에게는 새로운 단계가 열릴 것이다. 오늘의 이 작은 웃음이,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힘이 되었기를 바랐다.


나는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우리, 조금씩 더 나아가자. 이렇게 웃을 일도 점점 많아질 거야."


아내는 작은 미소로 대답했고, 나는 그 미소를 마음 깊이 새겼다.

우리의 희망은 그렇게 농담과 웃음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정신이 점차 돌아오고, 예전의 농담까지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아내의 익숙한 모습이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마다 마음이 조금씩 놓였다. 그녀의 웃음과 농담은 우리 사이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삶의 온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은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사건들은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잠시 멈칫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 기억들은 아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무거운 짐처럼 간직했던 일들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잊어버린 것이 그녀에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마음을 짓눌렀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이제는 사라진 채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회복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그냥 잊고 지내자."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가 떠올리지 못한 과거를 굳이 다시 꺼내 들 이유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그녀의 웃음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억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잃어버린 기억은 사람을 흔들지만, 동시에 그 공백은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기도 한다. 아내가 온전히 기억을 되찾는 날이 오더라도, 굳이 아픈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마음이 더 가벼워질 수 있다면, 그 과거는 사라진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옳다.


나는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다 괜찮아.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희망의 신호였다. 잃어버린 것과 남은 것 사이에서, 우리는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20분. 병실에서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너무나 짧았다. 아이들이 오지 않은 오늘, 그 20분은 오롯이 아내와 나만의 것이었다. 대화가 끊이지 않던 우리의 평소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나름의 일상을 채워갔다.


아내의 목소리와 눈빛 속에서 회복의 조짐이 보이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아직도 많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그러나 내일을 기약하며 병실 문을 닫았다.


병원을 나와 지하철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속에서 마음은 병실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어제와 같은 코스로 걷기 시작했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오늘의 발걸음은 어제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짧은 면회 시간 동안 주고받은 대화와 그녀의 표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는 20분 안에 하루치의 정을 나누고, 함께했던 긴 시간을 압축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희망과 아쉬움이 내 마음을 동시에 울렸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이 짧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라면 그 안에 더 많은 사랑과 위로를 담아야 한다고. 시간이 짧아서 아쉬운 만큼,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내일은 조금 더 길게 느껴지기를, 그리고 아내의 건강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 반복되는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짧게 잘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조금은 낯설었지만,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선택에는 단순한 변화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아내가 퇴원하면 머리를 짧게 자를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머리의 상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변화를, 나 스스로 먼저 경험해보고 싶었다. 이 행동이 아내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지, 혹은 그녀가 얼마나 불편해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렀다.


"같이 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대신 나눌 수는 없지만, 작은 변화 속에서라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 나를 위한 위로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녀의 시간을 내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오며 새로워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간단한 변화지만, 그 속에서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아내가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도, 내가 이런 결정을 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했다.

나는 아내가 퇴원 후에 머리를 자를 때도 이런 마음으로 곁에 있고 싶다. 그녀가 새로운 자신을 마주할 때, 그것이 낯설거나 두렵지 않도록 함께 웃고, 함께 걸어가고 싶다.


짧아진 머리는 단순한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하겠다는 내 작은 다짐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함께하는 마음이 우리의 길을 조금 더 밝게 비춰주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


저녁에는 딸과 함께 어제 끓인 김치찌개로 식사를 했다. 익숙한 국물 맛이 하루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딸과 나란히 앉아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웃음과 차분한 말투는 언제나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딸과의 대화 속에서도 아내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그녀의 상태와 내일 있을 검사에 대한 이야기. 짧은 대화 속에서 서로의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며 묘한 무게를 주고받았다. 딸의 성숙한 태도가 고맙고 대견하면서도, 그녀 역시 이 상황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마음의 짐을 지고 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조용히 기도했다. "내일 검사 결과가 좋아져 아내가 일반실로 내려갈 수 있기를." 이 간절한 바람은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내 안의 작은 힘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도 또 하나의 날이 지나갔음을 실감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지만, 아내의 회복을 기다리는 마음으로는 여전히 더딘 듯했다. 하지만 오늘 딸과 나눈 따뜻한 대화, 함께한 시간이 내일로 가는 작은 다리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아내가 일반실로 내려가는 그날이, 그리고 그 너머의 회복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기를. 그렇게 또 하나의 희망을 품으며 나는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