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밤의 기운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에는 생각이 빠르게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 시간은 익숙한 단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개념에 질문을 허락하는 드문 틈을 만든다.
어느덧 26년의 1월이 지나고 새로운 한달이 시작되었다. 늘 똑 같은 하루이지만 무언가는 다른 나를 찾게 되는 날이다.
어둠의 새벽에 선택한 이번주의 책은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다. 책에서 제시되는 자아에 대한 질문은 새롭다기보다 낯설다.
새롭지 않지만 그동안 피해 왔던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서 ‘자아’라는 말의 껍질을 들추고 그 속을 들여다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의문이 일어난다. ‘
내 존재의 이 많은 측면들이 모두 동등하게 나의 ‘자아’인가, 아니면 그중 하나만 이 나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중 어느 것이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그런가?”
상처 받지 않는 영혼 중에서 - 17page
자아.
1.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의식, 즉 ‘나’라고 느끼는 주체
2. 철학, 심리학에서 사고, 감정, 행동의 주체가 되는 존재.
자아라는 말은 너무 자주 사용되어 더 이상 해체되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자아는 매우 쉬운 말처럼 보인다. 사실 자아는 곧 ‘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쉬운 대상을 가장 오래 질문하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 단어는 곧바로 난해해진다.
사람들은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설명과 분석을 시도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단순한 정의로 만족해 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은 설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문을 멈추게 만드는 문장에 가깝다.
자아를 안다고 믿는 순간 자아에 대한 탐색은 끝나고 그 자리를 습관과 고정된 이미지가 대신한다. 그 결과 자아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방어의 대상이 되며 변화의 여지를 잃은 채 굳어진다.
가장 가까운 대상일수록 가장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은 자아라는 개념 앞에서 가장 정확해진다. 너무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자아는 늘 전제된 상태로 남고 그 전제는 오랫동안 검증되지 않는다.
이 아이러니는 자아를 단순한 ‘나’라는 말로 환원하는 순간 완성된다. 가장 쉬운 단어가 가장 깊은 질문을 가려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자아에 대한 사유는 다시 시작된다.
자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명확하다.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의식이며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주체라는 설명이다.
이 정의는 틀리지 않다. 다만 이 정의가 모든 설명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자아는 흔히 생각과 감정과 기억과 성격과 역할을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취급된다.
그 결과 사람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을 곧바로 나 자신으로 동일시하게 되고 반응과 존재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 부분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측면들이 모두 동등한 자아인가 아니면 그중 일부만이 자아이며 나머지는 자아가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한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 질문은 철학적인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일상 대부분의 고통은 자아를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을 하나로 규정할수록
변화에 취약해진다.
자아는 늘 방어적인 나를 만들며 비교 앞에서는 위축되고 평가 앞에서는 긴장하며 불확실성 앞에서는 통제하려 든다.
자아는 그렇게 안전을 원하지만 그 안전은 실제 안전이 아니라 익숙함에 대한 집착에 가깝다.
자아가 강하게 작동할수록 감정은 빠르게 확대된다. 하나의 사건이 곧 존재 전체의 문제로 번역되고 일시적인 실패가 곧 정체성의 붕괴처럼 느껴진다.
이런 붕괴는 투병과 같은 극단적인 경험에서는 그 구조가 더욱 분명해진다. 몸의 변화와 환경의 제한은 자아를 쉽게 규정하려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환자라는 이름은 설명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존재를 단순화한다. 자아는 그 단순화에 매달린다. 그래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해는 곧 나를 하나의 상태로 고정시키고 변화의 가능성을 좁히기 시작하며 그 때부터 자아는 보호를 위해 나 스스로를 가둔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는 반응과 그 고통을 인식하는 자아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둔 나를 풀어주는 길이다.
그 순간 우린 자아를 해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아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응하는 자아와 그것을 인식하는 자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인식은 작지만 중요하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곧바로 나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생긴다. 반응과 존재 사이에 미세한 간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간격은 삶을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태도를 바꾼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속도는 늦춰진다. 자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절대적인 중심에서는 내려온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란 상처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상처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자리다.
자아의 움직임을 인식하되 그 움직임에 붙잡히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이때 자아는 더 이상 적도 주인도 아니다.
그냥 내 삶을 설명하는 나와
그 설명을 듣고 있는 다른 나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나와 듣는 나의 역할은 여전히 나타나지만 그것들이 곧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아를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가벼워지지도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무거워지지도 않는다.
자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삶의 무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을 다르게 위치하는 것이다.
결국 이 새벽 책이 말하는 자아는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재배치의 대상이다.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옮겨질 때 자아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보호가 아닌 관찰의 기능을 회복한다.
나는 ‘자아’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자아란 또 다른 나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재배치할 때 비로소 보이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