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은 나를 바닥으로 끌고가지만,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할 힘을 가르쳐준다
비가 예보된 하늘 빛은 흐리고 구름이 가득했다.
이미 지난 일주일 동안 데미안을 통해 다섯 개의 단어를 골라 오래 붙들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이번에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은 다 읽고 나면 멀어지지만 어떤 책은 덮은 뒤에야 비로소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한 권의 책과 일주일을 더 보내기로 했다.
“그토록 오래 내 마음은 침묵하고
가난해져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이러한 자기 고발, 이 전율, 이 모든
영혼의 불쾌한 감정도 환영 받았다.
감정이 있었다! 불꽃이 솟았다.
그 속에서 심장이 경련했다!
나는 비참의 한가운데서
해방이자 봄 같은 무엇을
혼란스럽게 느꼈다. ”
데미안 중에서 - 100page
비참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단어다. 이 단어를 떠올리면 사람은 먼저 감정보다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무너진 표정.
꺾인 어깨.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의 침묵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비참은 단순히 슬프거나 괴로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삶의 밑바닥과 마주하는 순간을 설명하는 말에 가깝다.
사전에서도 비참은 안타깝고 처참할 만큼 괴롭거나 불행한 상태로 풀이된다. 이 정의를 들여다보면 비참은 감정이기보다 상태이고, 상태이기보다 경험이라고 해야 더 정확해 보인다.
우리는 비참을 대체로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비참해지기를 바라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삶을 그런 말로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가능한 한 좋은 감정과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행복과 평온을 삶의 목표처럼 여기고,
고통과 불행은 피해야 할 실패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비참은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싶은 단어가 된다. 그러나 실제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비참한 순간은 생긴다.
그것은 실수해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족해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에는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낮은 자리로 끌고 가는 시간이 있다.
나의 암투병이 그랬고,
아내의 뇌출혈이 그랬고,
어머니의 사고도 그러했다.
이 경험들은 단지 힘들었다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 시간은 내게 비참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알게 한 순간들이었다. 왜냐하면 비참은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참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상황을 바꾸고 싶지만 바꿀 수 없고,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고, 대신 아파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태. 바로 그 무력감이 비참을 더 깊게 만든다.
사람은 큰일이 벌어졌기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큰일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기 때문에 더 크게 흔들린다.
그러므로 비참은 사건 자체보다도 그 사건이 내 존재를 어떻게 흔드는가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오래 붙들고 싶었던 것은 비참 자체의 부정성보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어떤 변화의 감각이었다.
데미안의 문장 속에서 인물은 비참의 한가운데서 해방이자 봄 같은 무엇을 느꼈다고 말한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어떻게 비참 속에서 해방을 느낄 수 있는가.
어떻게 고통의 중심에서 봄 같은 감각이 생겨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그것이 고통을 예찬하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각성이다.
오랫동안 맹목적이고 둔감하게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침묵하던 내면이 다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순간. 나는 이 장면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비참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비참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생에서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지나가느냐일지도 모른다.
비참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을 바꿀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사건의 크기보다 그것을 통과하는 태도에서 생긴다.
어떤 사람은 비참 속에서 자기 삶 전체를 포기해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비참을 통과하며 이전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단단함이란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상처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거나 감정을 지워버리는 것이 강함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단단함은 아픔을 알고도 무너지지 않는 데서 나온다.
울면서도 살아가고,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불안 속에서도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힘. 나는 그것이 비참 이후에 만들어지는 성장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은 보통 밝고 건강한 이미지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람은 대체로 좋은 시절보다 어려운 시절에 더 많이 변한다.
평온한 날들은 삶을 유지하게 해주지만, 비참한 날들은 삶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동안 무엇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무엇에 기대어 살았는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게 한다.
그래서 비참은 파괴의 시간인 동시에 정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잃는 것이 많아 보이지만, 실은 그 과정에서 삶의 불필요한 부분들이 걷혀나가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참을 이용한다는 말은 고통을 반기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비참을 내 삶의 종결로만 남겨두지 말자는 뜻에 가깝다.
비참이 나를 설명하는 최종적인 이름이 되지 않도록, 그 경험을 나를 다시 세우는 재료로 바꾸는 일.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상처는 분명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상처는 동시에 사람을 깊게도 만든다.
왜냐하면 상처를 경험한 사람은 인간의 취약함을 알게 되고, 그 취약함 속에서 어떻게 버티는지가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참을 지나온 사람은 이전보다 세상을 더 냉정하게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정확하게 사랑할 수도 있다.
무너지기 쉬운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오늘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아픈 사람이 왜 아픈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무뎌진 것이 아니라 넓어진 것이다.
봄비가 내리는 새벽은 이 사실을 묘하게 닮아 있다.
겉으로 보면 춥고 젖어 있고 흐리다.
그러나 그 비는 겨울의 비와는 다르다.
공기 안에는 이미 봄이 들어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방향의 변화가 시작되어 있다.
비참도 어쩌면 그런 것이다.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저 어둡고 축축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 시간 속에서 이미 다른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무너짐 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고, 상실 속에서 삶의 진짜 무게를 배우고 있었으며, 절망 속에서도 내가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비참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헛된 것만도 아니다.
나는 ‘비참’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비참은 사람을 바닥으로 끌고가지만, 그 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힘을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