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는 참고 자료일 수는 있어도 삶의 판정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 계절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히 느끼는 순간은 서재의 문을 여는 아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서히 밝아지던 서재가
이제는 문을 여는 순간 봄날의 햇살이 방 안으로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다.
계절은 늘 조금씩 오지만 어느 날은 그렇게 한눈에 알아볼 만큼 분명해진다.
나는 그 빛을 등 뒤에 두고 책을 펼쳤다.
“뭔가를 성공하면 친구들은 당연히 함께
기뻐해 줘야 한다고 많이들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기뻐하지 않고 화를 낸다면,
충격을 받는다.
나를 시기하는 그들이 과연 친구란 말인가.
그런데 많은 성공을 거둘수록
이를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친구들이라는 게 진실이다.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이기는 사람들 중에서 - 147page
문장은 유난히 씁쓸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이 상한 것은 비교라는 단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친구라는 단어가 그 옆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성공을 거둘수록 그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친구들이며 그 이유가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이라는 말.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주 먼 사람과는 잘 비교하지 않는다.
일론 머스크, 이재용이나 마크 저커버그와
내 삶을 직접 견주며 매일 상처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은 현실이라기보다
하나의 뉴스에 가깝다.
내 삶의 체온과 직접 닿지 않는다.
비교는 막연한 크기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비교는 닿을 듯한 거리에서 시작된다.
비슷한 환경, 비슷한 출발선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비교는 가장 날카로워진다.
인간은 자신과 너무 다른 대상보다 비슷한 대상을 더 비교하게 된다.
그래야 자신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는 잔인하다.
멀리 있는 부러움은 환상으로 끝나지만
가까운 사람과의 비교는 내 자존심과 바로 맞닿는다.
친구의 승진은 뉴스가 아니고,
지인의 성취는 통계가 아니라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 사람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성공이 곧 내 실패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쉽게 그렇게 번역해버린다.
저 사람이 저만큼 갔다면 나는 어디쯤인가.
저 사람이 해냈다면 나는 왜 아직 이 자리인가.
비교는 사실을 보는 일이 아니라 위치를 느끼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더 아프다.
나는 인생이 불행해지는 가장 빠른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비교라고 생각한다.
비교는 삶을 해석하는 기준을 바깥으로 옮겨버린다.
내가 얼마나 성실했는지보다 남보다 앞섰는지가 중요해지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남들이 무엇을 가졌는지가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삶은 곧장 평가의 장이 된다.
문제는 비교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점이다.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한다고 해서 비교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원래 자신을 혼자서만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타인을 기준 삼아 자기 위치를 가늠한다.
그것은 어쩌면 생존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
어디쯤 와 있는지.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본다.
그러니 비교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비교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현명한 비교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본성에 따라 비교는 하되 나를 무너뜨리는 비교가 아닌 질문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나를 무너뜨리는 비교는 결과만 본다.
저 사람은 해냈고 나는 못했다는 식으로 끝난다.
거기에는 맥락도 과정도 없다. 오직 서열만 남는다.
반면 나를 살리는 비교는 질문을 만든다.
저 사람은 어떤 시간을 견뎠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배우면 좋을까.
내 속도와 저 사람의 속도는 왜 다를까.
결과를 부러워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게 만든다면
그 비교는 독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
비교는 칼과 비슷하다.
무작정 휘두르면 상처를 내지만 잘 쓰면 길을 다듬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비교라는 칼을 잘 휘두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남의 결과보다 나를 기준으로 삼는 일, 즉 한 달 전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 비교는 느리지만 비교적 정직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교의 항목을 줄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의 삶 전체를 한 항목으로 줄 세우려 하면 대부분의 비교는 왜곡된다.
돈은 저 사람이 많을 수 있지만
평온은 내가 더 가질 수도 있다.
속도는 저 사람이 빠를 수 있지만
지속성은 내가 더 길 수도 있다.
질투와 열등감은 자연스럽게 올 수 있다.
다만 거기 오래 머물면 그것이 곧 나의 시야가 된다.
감정은 인정하되 판단까지 맡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과의 비교 앞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한다.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겹친다.
비슷한 출발선을 공유했다고 믿기 때문에 작은 차이도 크게 느껴진다.
그러니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해서 곧장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감정 위에 오래 집을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친구의 기쁨을 견디는 힘은 결국 내 삶을 받아들이는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교는 완전히 끊어낼 수 없지만 방향은 바꿀 수 있다.
나를 깎아내리는 비교에서
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비교에서 내 삶을 더 선명하게 보는 방식으로.
비교가 언제나 불행의 시작만은 아닐 수 있다.
다만 비교가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 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쉽게 지친다.
오늘 서재 안으로 들어온 봄빛은 유난히 선명했다.
계절은 자기 순서를 따라 오는데
사람의 마음만 자꾸 남의 계절을 들여다본다.
저 사람은 벌써 여름 같은데
나는 아직 봄도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계절이 서로의 속도를 비난하지 않듯
사람의 삶도 원래는 저마다 다른 리듬을 가진다.
비교가 나를 자주 흔드는 이유는
그것이 내 생각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쉽게 생겨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가깝고 더 현실적이며 더 아프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비교를 없애는 법이 아니라 비교에 휩쓸리지 않는 법일 것이다.
남의 빛을 보면서도 내 계절을 놓치지 않는 법말이다.
나는 ‘비교’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비교는 참고 자료일 수는 있어도 삶의 판정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