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계절과 오는 계절의 다툼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완연한 봄이라 믿게 하던 공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하늘의 색은 분명 봄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공기만은 아직 겨울의 편에 서 있었다.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소리가 깨어 있는 아침.
창밖 도로에서는 자동차 소음이 끊이지 않았고 서재 역시 더는 고요한 공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나는 그 소음 한가운데서 다시 책을 펼쳤다. 조용히 이기는 사람들.
“은근한 자랑은
이 두 요소를 조합한 것이다.
윈윈을 만들려는 헛된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나는 자랑하는 것이지만
당신들은 나에게 동정을 해도 됩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은근한 자랑은 단순한
허풍보다 훨씬 나쁘게 들린다.”
조용히 이기는 사람들 중에서 - 100page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자랑이라는 단어를 읽자마자
나는 다른 누군가보다 먼저 내 안을 돌아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 없이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말하고 싶었다.
조금 잘된 일이 있으면 알아주었으면 했다.
남보다 앞섰다는 사실보다
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라고 믿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자랑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왜인지 늘 머뭇거리게 된다.
이 마음을 꺼내는 순간
과시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망설이게 된다.
생각해보면 자랑은 원래 나쁜 단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자랑은 꽤 순수한 감정이었다.
상장을 받아오면 보여주고
그림을 잘 그리면 자랑하고
달리기에서 이기면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먼저 말하고 싶어 했다.
그 자랑은 나를 높이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내가 기쁜 일을 누군가와 함께 확인하고 싶은 행동에 가까웠다.
듣는 사람도 대체로 그것을
축하의 자리로 받아들였다.
자랑은 그때까지는
경쟁의 언어가 아니라 기쁨의 전달 방식이었다.
누군가의 좋은 일을 들으며 같이 웃어줄 수 있는 시절에는 자랑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랑은 함께 기뻐하는 언어가 아니라 비교를 불러오는 언어가 되었다.
누군가의 기쁨은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곧장 서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저만큼 가졌다면 나는 무엇이 부족한가.
저 사람이 저만큼 해냈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나.
자랑을 듣는 순간 사람은 내용보다
자기 위치를 먼저 확인하게 된다.
자랑이 과시와 시기의 대상이 된 것은
자랑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갑자기 타락해서가 아니다.
자랑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구조가 변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끊임없이 비교되고 평가받는 환경에서는 남의 기쁨도 쉽게 나의 결핍을 건드리게 된다.
지금은 거의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된다.
얼마나 벌었는지.
얼마나 가졌는지.
사람의 삶은 점점 더 드러나는 방식으로 평가되고 그 평가는 더욱 빠르고 노골적이 되었다.
과거에는 가까운 사람끼리만 알던 일이
이제는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즉시 공개된다.
좋은 소식 하나가 예전보다 훨씬 멀리 퍼진다.
문제는 그만큼 축하도 넓어졌느냐는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노출의 범위는 넓어졌는데
정서적 관계의 밀도는 오히려 얕아졌다.
그러니 공유는 쉬워졌지만 공감은 줄어들었다.
그 틈에서 자랑은 더 자주 과시로 오해받고 듣는 사람의 마음은 더 쉽게 불편해진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질까.
단순히 그 사람이 거만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더 깊은 이유는 자랑이 듣는 사람 안의 결핍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충분하다고 느낄 때
남의 기쁨을 비교적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 삶이 불안하고 내 자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느낄수록 타인의 성공은 축하의 대상이 아니라 압박의 신호처럼 다가온다.
자랑이 불편한 이유는
자랑하는 사람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상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같은 말도 어떤 날은 가볍게 넘길 수 있고 어떤 날은 유난히 거슬린다.
결국 자랑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맥락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자랑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체는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 욕구는 시대가 갈수록 더 정교해진다.
대놓고 자랑하면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돌려 말한다. 우연히 말하는 척하면서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은근한 자랑의 구조다.
겉으로는 겸손의 형식을 취하지만
실은 인정의 효과를 놓치고 싶지 않은 상태.
이것은 기쁨의 표현과 자기방어의 전략이 뒤섞인 언어라고 저자는 말한다.
드러내고 싶지만 비난은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자랑을 감추는 척하면서 더 교묘하게 꺼내놓는다.
나는 요즘의 SNS가
이 은근한 자랑의 가장 대표적인 무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SNS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좋은 사진을 올리고 일상을 기록하고
기쁜 일을 남기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공간의 구조가
공유보다 전시에 더 가까워지기 쉽다는 데 있다.
관계의 깊이보다 반응의 수가 중요해지는 공간에서는 기쁨조차 연출의 형식을 띠게 된다.
여행은 추억이기 전에 증명이 된다.
사람들은 거기서 삶을 나누기보다
삶의 결과물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니 자랑이 점점 더 은근해지고
더 전략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더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과 자랑은 무엇이 다를까.
그 차이는 내용보다 방향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랑은 시선이 자기에게 모이기를 바란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반면 공유는 경험이 바깥으로 흐른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었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중심에 있다.
자랑은 인정이 목적이 되기 쉽고
공유는 관계가 목적이 되기 쉽다.
물론 둘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누구나 좋은 일을 말할 때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함께 갖는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랑의 의미가 과시와 시기의 대상으로 바뀐 것은 사람들의 인성이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두가 보여야 하고 모두가 평가받아야 하는 환경이 자랑의 성격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축하의 언어가 경쟁의 언어로 번역되기 쉬운 시대에서는 기쁨조차 조심스럽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자랑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랑을 다루는 감각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되 그것을 타인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는 지혜의 감각이 지금 우리에게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기쁘고 살아 있고 삶에 의미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누군가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다.
문제는 그 마음이 왜곡될 때다.
축하받고 싶은 마음이
우월해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비교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바뀔 때 자랑은 불편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랑의 반대말은 침묵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성숙한 공유일 수 있다.
기쁨을 말하되 과장하지 않고.
성취를 말하되 상대를 지우지 않고.
나의 좋은 일을 말하되
그것이 누군가의 상처를 건드릴 수 있음을 아는 방식.
그 균형을 찾는 일이 아마 지금 시대의 자랑이 배워야 할 예의일 것이다.
나는 ‘자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자랑은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비교의 시선 속에서 과시로 바뀌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