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aron 감성살롱
아이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며, 성장해도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 프랭크 A. 클라크 -
아침마다 메일함에 도착해있는 회사 일일 소식. 메일 첫 구절을 항상 좋은 명언으로 시작하는데
오늘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떠올라 이 글을 풀어낸다.
요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유행이다. 인스타그램만 해도 한두 다리만 건너면 이 책의 포스팅을 발견한다.
난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러 개의 리뷰를 본 것만으로 이미 이 책을 몇 번은 읽은 느낌이다.
물론 직접 한 구절 한 구절 곱씹어 읽으면 더 깊이 이 책을 음미할 수는 있겠으나
이미 읽어본 분들의 소감에 미루어 보았을 때 기본 골자는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닮은 점이 많아
읽기 전후가 크게 차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난 위의 좋은 글귀처럼 사람은 태생이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사랑을 확인받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단을 통해 내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사람은 표현방법이 흡사한 같은 종인 사람에게 사랑을 충족받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이고 서로 연결고리를 맺는데 난 이것이 인간관계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생명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사랑을 원하지만 고통은 피하는 것,
이 두 가지 상충 점에서 인간관계가 만들어진다.
맞닿아 사랑만 주고받으면 참 좋지만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맞닿는 사람에 따라 때로는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고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좋음과 아픔이 공존하는 것은 정상적인 형태이다.
즉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좋음을 주었다면 나에게 사랑이 돌아오겠지만
내가 아픔을 주었다면 나에게 미움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SNS(Social Network Services)는 시공간을 초월한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에서
자유롭게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데 난 SNS를 둘러보면서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였는데 대부분의 SNS는
"미움받지 않을(사랑받을만한이 아니다)" 만큼의 거슬리지 않고 보기 좋은 포스팅만 하는 경우와
욕먹기 좋은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포스팅을 하는 두 가지 경우로 크게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고 했는데 뭔가 이질감이 들지 않나?
마치 지킬박사가 약물을 먹고 선과 악을 극명하게 나눈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인간관계가
SNS에서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
타인에게 욕먹지 않을 좋은 게시물만 업로드하든 욕을 곱절로 먹을 게시물만 골라서 올리든
그 어느 쪽도 SNS의 주체인 나를 왜곡해서 나타내고 있고,
동시에 나는 껍데기뿐인 주체일 뿐 실제 그 SNS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타인이다.
전자는 사랑받는 건 둘째 문제고 미움받지 않을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그걸 보고 사람들이 해주는 좋은 말들로만 나의 존재를 확립하는 밑거름을 삼는다.
이들은 그래서 아주 간혹 달리는 악성 댓글에 본인이 무너지고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후자는 본인의 원 모습과 전혀 다른 아예 극도로 혐오스러운 욕먹는 왜곡된 이미지를 구축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을 이끌어 낸다.
그 관심과 반응의 내용이 욕과 비난인 것은 무의미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작정하고 왜곡시킨 허상이 욕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는 상처도 받지 않는다.
흔히 우리가 관심종자라고 부르는 부류가 여기에 속하는 듯하다.
즉 이 현상은 많은 이들이 타인의 시선으로 걸러진 이미지를 통해 본인의 존재를 규정짓고 있음을 반증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아담과 하와라는 피조물을 사랑하셨다.
그런데 사랑받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변명"부터 했다.
나부터도 잘못한 일이 발각되면 잘못했다는 말보다는 본능적으로 변명부터 나온다.
왜 변명을 할까?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를 상대방에게 피력하는 것이다.
나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나 싫어하지 말아줘.
사랑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날 싫어하지만 말아줘.
왜냐면 날 싫어하면 내가 아프니까.
슬프게도 타인의 시선에 따라 유동적으로 본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랑받으려는 진취적인 노력보다는 미움받지 않으려는 방어적 노력을 택한다.
위의 SNS로 돌아가자.
무결하여 지적받지 않고자 하거나 아예 미움받고자 하는 건
상처받기를 원치 않는 잠재의식의 서로 다른 발현점이다.
가공된 나를 만들어서 나 대신 상처받을 저주인형을 만들어 인간관계 전면에 세워놓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주체가 되어 인간관계에 참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들 손가락에 끈으로 연결된 본인의 마리오네트를 달고
마리오네트끼리 인간관계 연극을 꾸려나가고 있다.
진짜 나를 내세우면 사랑받고 욕먹는 현상이 둘 다 공존하며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이고 진짜다.
아무 하고나 소통하겠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해지고 싶진 않은 게 인간이다.
누구나 사랑을 지향하고 고통을 지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받을 용기를 낸다는 것은
타인이 설사 나를 미워할지라도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첫걸음이 된다.
타인이 설사 나를 미워할지라도 그래도 내가 나로 존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바로 미움받을 용기.
내 SNS를 보며 관종이라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몇 있을 테지만 내 기준에서 난 관종이 아니다.
진짜 관종은 욕"만" 먹는 가상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관심만 먹고 따라서 상처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난 SNS에 보기 좋은 모습, 이상한 모습 모두 진짜 나를 날 것 그대로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사랑도 상처도 모두 받고 있다.
사랑받는다고 상처받는 것이 상쇄되진 않지만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그 모든 것이 나 그 자체니까
왜곡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둔다.
사실 미움받을 용기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사랑받을 용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어 사랑받을 용기 말이다. 본래의 나로는 사랑받을 자신이 없으니
차선책으로 미움받지 않으려 하는 거지 정말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사랑받는 것이다.
혹여 나를 드러내어 나와 다른 시선에 상처를 입을지언정
그 상처에 움츠러들어 본래의 나를 버리고 욕먹지 않을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닌,
나를 감추지 않고 그래도 이게 나라고 당당하게 내가 주체가 되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용기.
이 책 제목이 왜 미움받을 용기인지 우리는 다각적으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