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이끄는 대로, 나는 포카혼타스였다.

by 포카혼타스


중남미에 한참 거주했을까, 사람들이 나에게 '포카혼타스 같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처음에 외모가 닮았다는 줄 알고 포카혼타스의 사진을 찾아봤다. 좀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양적인 느낌이 강하긴 했다. 그렇다고 하고 많은 캐릭터들 중에 왜 하필 포카혼타스를...

그러고 나서 4여 년 뒤였을까, 한국에 돌아왔더니 이번엔 친구들이 날 보고 포카혼타스 같다고 했다. 그때는 살짝 놀랐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나에게서 어떤 공통된 것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난 그때까지도 포카혼타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타잔 여자 버전 느낌인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그녀가 실존인물이었고, 미국의 원주민이었으며, 영국인과 결혼해서 런던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음. 나랑 비슷한 구석이 없진 않았다. 나도 낯선 세계의 지극한 이방인이었다. 그들 중 하나와 결혼하지도 않았고, 꽤나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들이 나를 포카혼타스와 같이 느꼈겠구나, 싶었던 지점은 이런 것이었다.



아이야, 네 주위에는 영혼들이 가득하단다. 그들은 땅과 물, 하늘 속에 살아 있지. 네가 귀 기울이면, 그들이 너를 이끌어 줄 거야.


- 영화 포카혼타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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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 학군지에서 학창생활을 보내고, 철저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라온 나날들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보낸 나날들은 땅을 귀히 여기고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감사함을 여기는 제3세계 농업국가들이 훨씬 많았다. 그 앞에서 숫자 계산이 빠르고 3개 국어를 하는 나는 무용지물이었다. 칼을 휘휘 둘러 바나나 나무 사이로 길을 내고 해가 될 수 있는 뱀이나 거미를 알아보는 사람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역할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등산을 할 때면 산에 원래 살고 있는 새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수다를 멈추고 산의 소리를 들으며 새들을 배려하는 법을 배웠다. 남극에서 새끼를 낳기 위해 올라오는 고래들을 위해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배의 모터를 꺼야만 했다.


때로는 나무를 끌어안고, 이 친구도 여기서 수많은 풍파를 견뎠겠지. 실은 나보다도 오랜 시간 그래 왔겠지. 싶은 위로를 받았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에는 자기 스스로 길을 찾아내어 가는 응원도 느껴졌다.
그들은 반딧불이를 보던 날, 내가 '인생 처음으로 본다.'라고 하자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반딧불이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나무조각 벌레(대벌레)느니 목수 새(딱따구리)느니 각종 동물, 곤충, 새, 물고기들에게 한국어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를 온갖 애정 어린 이름을 다 붙여놓았었다. 물론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는 감자를 수확하고 난 날 감자를 실어 나르는 당나귀였지만.

그러고 돌아온 한국에서는 나는 줄곧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그건 아마 나뭇잎 한 장 세세하게 볼 수 없는 여유 없는 삶이 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다 만들어진 커피 한 잔 즐길 수 있는 카페에서야 사람들을 만나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의 얘기를 하는 것에 대단함을 못 느낀 것도 컸다.

나는 영화 속 포카혼타스가 한 이야기를 이해한다.
영화 속 존 스미스는 런던에 가면 '사람'이 사는 '적당한 집'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한다. 포카혼타스는 발끈하면서 자신이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사는 곳이 '적당한 집'도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그냥 그 삶은 땅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내 눈에는 좀 더 그럴싸해 보이는 삶이다. 그것이 아마 내가 포카혼타스라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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