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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Oct 25. 2019

『변신』, 카프카가 말하는 인간의 실존조건


※책 제목: 『변신』(원제: 『Die Verwandlung』)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옮긴이: 전영애

※출판사: 민음사


1.서론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꿈꾼다. 설사 누군가는 자신이 현재는 행복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행복은 삶을 살아가는 이유이자, 태어났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로 여겨진다. 집 밖을 나가 거리를 걷다보면, 혹은 나가지 않더라도 누워서 스마트폰을 바라보노라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너무나 풍요롭고 평화로워서 인간이 이런 세계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마치 인간이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 수많은 광고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활기차고 행복한 미소를 띠며 자사의 제품을 사기만 한다면 자신처럼 될 수 있다고 손짓하고, 마트와 백화점에 가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진열되어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에게, 카프카의 작품은 기괴하고,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진다.                  


현대사회(좌)와 카프카의 작품세계(우)

                              

 여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한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하는 미다스는 현자(賢者) 실레노스를 붙잡아서 인간에게 있어 지고(至高)의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실레노스는 답을 하지 않다가 미다스와 그의 신하들이 다그치자 마침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요, 태어났다 하더라도 하루 빨리 죽는 것이 그나마 가장 큰 행복일진대 어찌 그대들은 빨리 답을 하라고 재촉하는가?

                          

 대답을 들은 미다스와 신하들은 당혹스러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이와 같은 미다스와 신하들의 태도는 아마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보일 태도와 유사할 것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고, 또한 행복‘해야’할진대, 실레노스는 왜 저런 대답을 한 것이며, 카프카는 그런 기괴한 작품을 쓴 것인가?


 ‘카프카’라는 이름은 체코어로 ‘까마귀’를 뜻한다고 한다. ‘까마귀’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에 비추어 볼 때, 까마귀는 카프카의 작품이 주는 이미지와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은 음울하고, 작품에서 그려지는 시공간이 현실세계와 달라 보여 기괴하며 바로 이 때문에 난해하다. 또한 카프카의 텍스트는 애매모호하여 그의 작품은 시각에 따라 관료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성(性)과 관련된 남자와 여자의 대결을 그리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실존주의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수많은 해석 중에서도 인간의 실존조건이 『변신』을 중심으로, 또한 다른 카프카의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찰해보고, ‘행복한’ 인간에게 카프카라는 ‘까마귀’가 어떠한 흉조를 드리우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변신’의 의미

 『변신』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이와 같은 시작은 독자로 하여금 갑자기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자신만큼이나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이렇게 갑자기 벌레로 ‘변신’한 것은 카프카의 모든 작품에서도, 그리고 한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변신’의 의미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이는 과학의 측면에서, 그러니까 과학이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사물들이 이 세계에서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여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지 답을 줄 수 있는 “왜?”라는 질문이 아닌, “왜 꼭 그래야하는지”, “왜 하필”이라는 의미의 “왜”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대해 시공간이 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왜 시공간이 휘어‘져야 하는지’는 답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카뮈는 과학이 ‘기능’은 설명하지만 ‘존재’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왜?”라는 질문을 한, 그러니까 사물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 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 그러니까 타인, 돌, 나무, 책상, 연필과 같은 모든 것들의 존재가 얼마나 낯설고, 이질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인간은 사소하게는 돌멩이부터 거대한 은하까지 이 모든 것들이 왜 존재하는 것인지, 왜 그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지, 왜 하필 지금 존재하는 것인지, 즉 이 세계의 존재의 정당성을 묻게 된다. 실레노스가 말하는 인간이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이유, 그러니까 인간의 비극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누군가가 숲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숲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즉 숲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숲 안에 있다면 나는 결코 숲을 볼 수 없다. 이처럼 인식의 속성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세계를 인식한다. 인간은 나무를 바라볼 수 있고, 흐르는 강물의 차가움을 느낄 수 있으며,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 인간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은 인간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와 단절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이 이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인간은 이때부터 자신이 이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한 예를 들자면, 인간이 세계와 일체가 되어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갓난아기와 일부의 동물은 숨바꼭질 혹은 누군가로부터 숨어야 할 때 자기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 숨으려 한다. 가령 갓난아기는 자기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꿩은 자신의 털 속에 머리를 가리는 식으로, 자신이 이 세계를 보지 못한다면 이 세계도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저런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인식능력을 갖추기 시작하면 더 이상 이러한 행동양식을 보이지 않게 되고, 바로 그 시점이 인간이 이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시점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인간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는 자신이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는 자신의 나체를 부끄러워하며 쫓겨나게 된다. 이는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와 인간 자신이 단절되어 있지 않고 일체되어 있어 자기 자신이 나체로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럽다는 생각을 못했지만, 선악과를 먹어 인식능력을 가지게 되자 자신이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서야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인간은 앞서 든 갓난아이, 꿩과는 달리 이 세계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세 가지의 “왜?”, 그러니까 “왜 존재하는 것인지, 왜 그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지, 왜 하필 지금 존재하는 것인지?”라는 질문에는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상황은 인간에게 두 가지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로, 인간은 이 세계의 존재의 정당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되고, 둘째로, 그와 동시에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 ‘기능’을 넘어서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세계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두껍다’고도 느끼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비단 이와 같은 상황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다.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상황이 동시에 벌어진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식은 그 대상과 단절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그 자신의 인식능력을 인식하려는 순간, 그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인식능력은 사라져 버린다. 이는 마치 모래를 손에 쥐려고 하면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 자신의 인식능력에 대해 인식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인식능력이 그 자신의 인식능력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즉 인간이 인간 자신의 인식능력이라고 믿어왔던 인식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시인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 카뮈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카뮈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긍정하는 즉시 부정하게 되는 사고’라고 표현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낯섦’을 느끼게 된다.


 위의 일련의 상황들이 바로 인간의 실존조건이다. 그 실존조건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 즉 인간 자신이 알아왔던 주변 인물들, 자신의 직업, 주변 사물들을 의심하게 되며, 그로인해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이 위협받기 시작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인간의 과학적, 철학적 발전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인간 합리성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이 위에서 설명한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부정당한다.”라는 말로 바뀌어 그 휘황찬란한 빛을 잃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실존조건 하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이며,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카뮈는 ‘이방인’이라고, 인간의 실존조건의 깨달음의 순간을 카프카는 ‘변신’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레고르에게 ‘변신’이 일어난 후에 그레고르가 보이는 반응들은 인간이 인간의 실존조건을 깨달았을 때의 반응을 적절히 묘사한다.     

                                    

그럴 것이 실제로 그는 날이 갈수록 약간만 떨어져 있는 사물들도 점점 흐릿하게 보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그레고르의 대사는 인간이 인간의 실존조건을 깨달았을 때, 인간이 느끼는 인간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나타내며 아래의 구절은 ‘변신’ 이후, 인간 그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의 방을 말끔히 치워버렸다. 그가 아끼던 모든 것을 그로부터 앗아갔다.

                             

『변신』뿐만 아니라 ‘고독 3부작’이라 불리는 카프카의 장편소설 『실종자』, 『소송』, 『성(城)』은 위와 같은 인간의 실존조건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실종자』는 이 세계에서도, 그리고 자기 자신한테서도 끊임없이 추방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고, 『성』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그러니까 아무리 이 세계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오히려 다가갈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인간의 한계를 도달할 수 없는 성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3. ‘변신’의 이유

 그렇다면 이러한 변신은 그레고르에게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그레고르에게 왜 ‘변신’이 일어난 것인지는 작품의 곳곳에 암시되어있다. 그레고르는 외판사원으로,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그 자신은 외판사원이라는 직업이 매우 고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레고르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누이는 처음에는 외판사원으로서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는 그레고르에게 따뜻함과 미안함을 느꼈으나 점차 그레고르가 돈을 벌어오는 것에 익숙해졌고 카프카의 표현대로 “따뜻함은 더 이상 우러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그레고르는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을 것이며, 아무리 자신이 집안의 가장이라고 할지라도, 그만큼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번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해 품은 의문은 해결되지 않을뿐더러 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그레고르의 ‘변신’ 이전의 상황과 ‘변신’의 상황은 현대사회를,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레고르는 지배인에게도 언젠가 자신이 오늘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는지 상상해 보려 애썼는데,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은 사실 시인해야 했다.
                     

이와 더불어 카프카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야기가 돈을 벌어야 될 필연성에 미치면, 우선 언제나 그레고르는 문을 떠나 문 곁에 놓인 서늘한 가죽 소파에 몸을 던졌다.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위의 구절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큰 시사점을 던진다.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보편적이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조건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 그레고르의 지배인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시·공간적으로 보편적이라고 할지라도, 돈이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고, 돈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에게 인간의 실존조건에서 오는 고통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고 이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레고르가 느끼는 ‘수치와 슬픔’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레고르에게 ‘변신’이 일어난 이후의 식구들의 반응이다. 그레고르에게 ‘변신’이 일어나기 전에 식구들은 모두 그레고르가 벌어오는 돈만으로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했으며, 아버지는 할 일이 없어 항상 무기력한 상태이고, 누이는 오빠와는 달리 일을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서 구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르에게 ‘변신’이 일어난 이후 어머니, 아버지, 누이는 모두 경제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에 따라 아버지는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심지어 집에서조차 자신이 직장에서 입는 옷을 벗지 않는다. 누이 또한 돈을 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벌레로 변해버린 오빠의 수발을 들면서 가족구성원 사이에서 입지가 올라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레고르가 ‘변신’ 이전에는 다른 식구들에 비해 자신이 자신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그나마 확보하고 있었고, 다른 식구들은 그렇지 못해 고통 받았으며, 그레고르에게 ‘변신’이 일어난 후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다른 식구들이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리 인간의 실존조건이 보편적이라고 할지라도, 좌우지간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다면 실존조건에서 오는 고통은 유보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가족의 가장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자신이 힘들게 직장을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식구들이 그것을 몰라주는 것이 그레고르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4. ‘변신’과 죽음

‘변신’, 즉 인간의 실존조건을 깨달은 인간은 ‘낯섦’과 더불어 ‘우연성’ 또한 느끼게 된다. ‘우연성’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질문 중 인간 자신과 세계가 “왜 하필 지금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못한 데에서 생겨나는데, 바로 이 ‘우연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 특히나 시간의 ‘끝’에 대해 인식하도록 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매 순간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면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벌벌 떨면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실존조건을 깨달은 후에는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왜 하필 지금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은 이유야 어찌됐든, 즉 인간의 존재의 정당성을 불문하고, 인간은 ‘현재’라는 감옥에 갇혀있고,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사형집행인이 감옥의 문을 열고 자신을 교수대로 끌고 가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앞서 언급한,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고통과 더불어 저 끝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한 번 더 절망하게 만든다.


 위와 같은 사실들, 즉 존재의 정당성의 부재와 죽음의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절망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어쨌든 태어나게 되었고, 삶의 과정에서 인간의 실존조건에서 오는 고통을 겪으며, 저 끝에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정해져 있다. 인간은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평화와 안식으로의 ‘구원’을 바라며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그 원인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왜 내가 이러한 모든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죄악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나 인간은 이전의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최소한의 죄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이 의식(意識)을, 인식능력을 가지게 된 데에 있다. 그리고 이는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레고르는 작품 말미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게 되고 그것이 몸에 박혀서 죽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던진 것이 왜 하필 사과였을까? 선악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지역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적어도 카프카가 살았던 유럽에서만큼은 선악과가 사과라는 설이 지배적이고, 또한 사과가 선악과로서 가장 자주 묘사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창세기에서 선악과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과일로 묘사된다. 넓게 생각해보면 선악과는 인식능력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과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창세기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죽지 않으려거든 이것을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인간에게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선악과를 먹고 필멸의 운명에 처하며 동시에 인식능력을 얻게 되자 인간은 인간의 실존조건과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이, 즉 선악과를 먹어 인식능력을 얻게 된 것이 인간이 범한 죄악 혹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이며, 그에 대한 벌로써, 인식능력을 얻었기 때문에 인간만이 인간의 실존조건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창세기에서 선악과에 대한 부분은 앞서 인간이 했던 질문, 즉 인간이 무엇을 잘못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리고 그레고르가 왜 하필 사과를 맞고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 매우 적절한 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신』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세계에서 죽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서 언급한 고독 3부작은 모두 미완성의 작품들이다. 세 작품 중 『소송』을 제외한 『실종자』와 『성』은 결말이 묘사되지는 않고 있으나, 카프카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 결말에는 주인공이 모두 죽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원죄 의식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소송』은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 대사는 “개 같군!”이다. 이 대사와 그레고르가 창세기에 묘사된 인간처럼 사과를 ‘먹지’ 않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고’ 죽었다는 사실은 카프카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5. ‘변신’, 그 이후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집필할 때에 처음과 끝을 제일 먼저 써내려갔다고 한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조건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앞서 언급한대로, 그리고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에서 묘사한대로 끊임없이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하다가 결국엔 카프카의 작품에서의 주인공들처럼 결국엔 모두 죽게 된다. 이 글에서 카프카의 작품에 기반을 두어 서술한 바에 따르면, 또한 카프카의 작품 자체를 놓고 볼 때에 인간은 한없이 불행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 집필방법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카프카는 아무리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다 하더라도 주인공이 그 상황을 겪는 과정을 중시했으며, 그 과정을 서술하다가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처한 실존조건이라는 것은 단순하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겪는 고통은,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나 그것에 대한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침묵에서 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인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내려져야할 것이나,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질문을 하는 인간이 사라지거나 침묵을 하는 세계가 없어져야 한다. 질문을 하는 인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뜻하고, 세계를 없애버린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모두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경우도 쉽지가 않은데, 자살을 하기에는 ‘고통’이라는 문지기가 인간 앞에 버티고 있어 자살은 인간에게 있어서 쉽지 않으며, 이 세계를 모두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두 선택지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이 글에서 언급한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한다는 것인데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이를 매우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 즉 자신이 벌레로 변한 상황(『변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추방당하는 상황(『실종자』),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사형을 당하는 상황(『소송』), 아무리 노력해도 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성』)에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카프카가 아무리 그 상황을, 그 과정을 음울하게 묘사하고 있더라도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벌레로 변하였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액자를 지키는 등 인간성을 유지하려 하며,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다시 길을 떠나 어딘가에 정착하려고 노력하며, 사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려 하고, 성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카뮈는 ‘반항’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아무리 ‘변신’이후에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을 의심하게 되었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저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들, 인간이 느끼는 어떤 초월적인 감정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계에 또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인간의 슬픈 열정과 ‘반항’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인간에게 가장 강렬하게, 그리고 쉽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카프카의 작품과 같은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예술이 중요하고, 예술이 인간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이 『변신』에서도 묘사되고 있는데, 그레고르가 자신의 액자를 지키는 장면, 그레고르(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풍경들을 감상한다.)가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는 장면, 사과가 자신의 배에 박혀있음에도 거실로 나와 자신의 누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연주를 감상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계속해서 언급해왔던 인간의 실존조건을 깨닫게 되는 ‘변신’의 순간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변신’의 순간을 느꼈음에도 『변신』의 지배인과 같이 개개인에 따라서 생활에 치여서 다시 잊고 살아갈 수도 있고, 그레고르처럼 삶에 대한 격렬한 충격을 느낄 수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광고와 돈과 같은 금빛 베일로 인간의 시야를 가리고, ‘행복’을 강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변신’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인간 각자가 무슨 선택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아갈지, 혹은 자살을 택할지는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변신’의 상황에 직면한 인간에게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까마귀’로만, 혹은 흉조로만 여겨졌던 카프카의 작품들은 인간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고 또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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