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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Mar 28. 2021

흄의 『오성에 관하여』 해제 <1부>

관념들과 그것들의 기원, 합성, 연관, 추상에 관하여

1. 들어가는 말

 흄은 매우 유명한 철학자들의 철학이나 사상에서조차 '각 부분들 간에는 정합성이 결여되고 전체적으로는 명증성이 결여된 그 원리들로부터 어설프게 연역된 결론'을 마주치게 된다고 말하며 또한 이러한 것들이 철학 자체를 망신스럽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철학 자체에 대한 문제점 제기는 인식론에 대한 글을 쓰는 철학자, 더 나아가 유명한 철학자들의 하나의 '습관'이라고 여겨진다. 칸트도 『순수이성비판』 및 『형이상학 서설』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쇼펜하우어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서두에 한다. 이러한 유명한 철학자들의 습관이 이해가 되는 것은 만약 칸트나 흄이나 쇼펜하우어가 그 당시 여타 많은 철학자나 학자들처럼 비슷한 사상을 안출 했다면 이렇게 우리 시대에까지 유명하고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철학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며 바로 그 여타 철학자나 학자들처럼 잊혀졌을 것이다.


 흄은 이러한 철학 자체를 망신스럽게 하는 당대 학자들의 태도나, 더 나아가 대중들의 평가가 앞으로 우리가 다룰 주제인 '인식론', 다른 말로는 '형이상학'이 어렵기 때문에 꺼려하며 또한 개별의 학문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이에 대한 반론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진리가 완전히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다면, 진리가 매우 심오하고 난해한 상태로 있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위대한 천재들이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좌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 없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허영과 자만으로 평가되고도 남을 것은 확실하다. 나는 내가 펼쳐 보이려는 철학에 그와 같은 장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천명하며, 만약 나의 철학이 매우 쉽고 명료하다면 그와 반대로 그것을 완강한 억측으로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흄은 '인간학', 즉 인식론은 탐구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바로 인간의 인식 능력 하에 있기 때문에, 그 인식 능력을 탐구하지 않고 추구되는 학문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나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어찌 보면 인식론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하등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에서 보고서를 쓰는 데 있어서 나의 인식이 어떠한 작용을 거쳐 보고서 작업을 하고 있는지는 전연 쓸모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관념론인지 실재론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칸트가 얘기한 것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어찌 됐든, 그 틀이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의 눈, 귀, 혀, 손, 코 등의 감각기관이라는 '무기'로밖에 이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개가 살고 있는 세계가 색이 존재하지 않는 회색빛 세계이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단지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색을 규정해놓은 것일 뿐이다. 즉, 인식의 틀에 따라서도 누군가의 세계는 확연히 달라질 수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식의 틀에 관한 학문, 인식론은 그러한 측면에서 쓸모가 있다.(덧붙여 짧게 언급하자면, 설사 칸트나 흄, 로크, 버클리 등의 인식론 철학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니체, 들뢰즈 같은 현대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인식론을, 칸트는 다시 흄의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기에, 철학을 탐구하려는 이는 어쩔 수 없이 인식론은 읽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 인식론의 탐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흄은 다음으로 자신이 이 책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오성에 관하여』는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1부이다. 참고로 2부는 『정념에 관하여』, 3부는 『도덕에 관하여』이다.)의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 설명한다. 나는 사실 여태까지 흄이라는 철학자라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의 사상에 대해서 제대로 파고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흄이라는 철학자를 인터넷에 검색할 생각조차 못했더랬다. 어쩌면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단순히 '흄=경험, 정념, 공감, 감정'이라는 단순한 공식에 얽매여 흄의 사상을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공식으로서 흄에 대해 간단한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흄은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론, 대륙철학의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다. 합리론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며,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하면 우주가 나에게 내려온다'라는 문장으로 합리론의 입장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흄이나 버클리와 같은 영국 철학, 경험주의 철학에서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으면 검은색만 보일 뿐이며 무언가를 알고 싶으면 당장 일어나서 밖을 나가 '경험을 해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예는 타당하지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조악한 예를 들어 덧붙이자면,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에 대해서 합리론 철학자들은 왜 모든 백조는 하얄 수밖에 없는지를 탐구할 것이고 경험주의 철학자는 정말로 모든 백조가 하얀지 모든 백조를 찾아다닐 것이다.


 흄은 이러한 경험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인식론은 이 세계의 물체의 본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과 매한가지로, 인간 정신의 본질 또한 알 수 없기에 '신중하고 정확한 실험, 그리고 상이한 여건과 상황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별적 실험 결과들에 대한 관찰'만이 그 정신의 능력과 성질, 그리고 원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이 책,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부제가 바로 '실험적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기 위한 시도'이다. 또한 흄은 이 글을 읽는 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합리적 방법, 추리, 추론을 통해서 얻은 인간정신의 본과 궁극적 원리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경험이나 실험적 방법에 의하여 얻은 인간정신의 성질, 얕은 원리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반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러나 궁극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 이처럼 불가능하다는 것이 인간학의 결함으로 평가된다면, 감히 단언하건대 철학자들의 강단에서 배양되었건 아니면 가장 미천한 장인들의 일터에서 이루어진 것이건 가릴 것 없이, 그 결함은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모든 학문과 방법이 공통적으로 갖는 결함이다. 그 학문과 방법들 가운데 경험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으며, 또 경험의 권위에 기초를 두지 않는 어떤 원리를 정립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다.


 내가 읽은 『오성에 관하여』 역본은 서광사에서 출판되었다는 것과 앞으로의 본문과 차례는 전적으로 책을 따라가게 될 것을 언급하고, 개인적으로 흄의 바람, 대중들의 인정에 욕망이 깃들어있다고 생각되는  '알리는 말'을 끝으로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오성과 정념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하나의 연쇄적 추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이 자연스러운 구분의 이점을 기꺼이 이용하였다. 내가 다행히도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윤리학, 정치학, 비평 등에 대해 계속 검토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관한 이 논고를 완결할 것이다. 대중의 동의를 내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의 판결이 어떻든 나는 그것을 나의 최고 교훈으로 삼을 생각이다.
데이비드 흄

2. 관념들의 기원에 관하여

 흄이 본문에서 가장 처음으로 밝히는 것은 '인상'과 '관념'의 구분이다.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은 서로 다른 두 종류로 환원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인상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들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유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

 이에 따르면, 인상이란 인간 정신에 현전하는 것들 중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생동감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인덕션에 음식을 올려놓고 이를 깜빡 잊고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음식이 타서 타는 냄새가 난다면 이 냄새가 바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며칠이 지난 뒤 다시 음식을 올려놓았는데 타는 냄새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 현전하면 그것이 바로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물론 여기서 기억이라는 표현을 쓰긴 했으나, 기억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이 아니라 '타는 냄새에 대한 생각'으로서의 기억임을 유념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간의 수고로움을 들게 하는 비교적 복잡한 사고작용으로서, 관념이 우리의 인식작용에 현전한다는 것을 그것보다 훨씬 간단한, "타는 냄새에 대한 기억을 해야겠다."라고 결심을 해야만 타는 냄새에 대한 관념이 나에게 현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이러한 나의 설명이 어렵거나 잘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흄이 말하는 것처럼 인상은 feeling, 관념은 thinking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며, 만약 이마저도 어렵다면 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말하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 현실인 것처럼 생생하더라."에서 '생생한' 경험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흄은 이어서 인상은 관념과 대응관계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내가 만약 눈을 감고 사과를 생각한다고 하면 그 사과는 내가 현실에서 본, 현실에서의 사과가 나에게 인상으로서 현전한 것과 유사한 형태로 관념으로 다시 현전하게 된다. 하지만 흄은 인상과 관념이 엄밀하고도 정확하게 항상 대응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관념은 인상을 항상 정확하게 모사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예를 또다시 들어보자면, 내가 울산의 공업탑 로터리에 대해서 생각(관념)을 해본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공업탑 로터리에 대해 들어보고 인터넷에서 사진을 본 적만 있지 가본 적은 없다. 공업탑 로터리를 생각하노라면 단지 익히 알고 있는 로터리라는 이미지를 상상한 뒤 중앙에 탑이 있는 모습을 상상할 뿐이지, 그곳의 교통체증, 냄새, 주변의 건물들에 대해서는 전연 상상하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흄은 지각을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바로 '단순한 지각'과 '복합적인 지각'('단순 인상', '복합 인상', '단순 관념', '복합 관념')이다. 단순 인상의 경우 사과를 맛본 뒤 사과가 '시고, 달다'라는 맛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고, 복합 인상의 경우 사과의 색, 특유의 냄새, 맛, 감촉 등을 아우르는 사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 관념은 반드시 단순 인상과 대응관계에 있지만, 복합 인상과 복합 관념의 경우 서로 유사한 점은 있더라도 완벽하게 복합 관념이 복합 인상을 모사하진 않는다.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바로 이 논고의 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일반적인 명제, 즉 처음 현상하는 단순 관념들은 단순 인상들로부터 유래하는데, 이 단순 인상들은 단순 관념들에게 대응하며, 단순 관념들은 단순 인상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명제를 확정하는 데 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인상과 관념이 서로 대응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인상과 관념의 현전하는 순서는 무엇일까? 인상이 관념에 선행할까, 관념이 선행할까? 아마 글을 읽는 이는 단번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인상이 관념에 앞선다는 것을 말이다.


 면접 질문으로 많이 나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oo색을 선천적 시각장애인에게 설명한다고 하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이다. 2016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에게도 노란색을 설명해보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문재인은 손을 잡아주면서 이렇게 따뜻한 감촉,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나는 색깔이라고 설명을 했고, 안철수는 따뜻한 봄날이 느껴지는 아주 어린 병아리 같은 색깔이라고 했더랬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두 명의 말 모두가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이해를 잘 못하리라 생각이 들지만 안철수가 설명을 조금은 더 잘했다고는 생각한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들보다 설명을 잘하리라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나는 색이라는 것을 설명해서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라며 생각하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순발력과 공감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 바로 저 질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 바로 인상이 관념에 앞선다는 증거이다. 누군가에게 파인애플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려고 한다면 파인애플에 대한 맛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파인애플을 한 번 먹여보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정확한 방법일 것이다.


 이 절의 마지막에서 흄은 이러한 '인상이 관념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인해 철학자들이 말하는 '본유 관념'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종결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것을 혐오하는 잣대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본유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흄은 우리가 여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상과 관념은 서로 구분할 수 있고, 관념은 인상에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이 어떠한 혐오스러운 것을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인상이 정신에 현전하며, 그 인상이 결국 관념으로서 정신에 현전할 때 '혐오스럽다'는 관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인상이 관념이 선행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에서 내가 확립한 제1원리이며, 그 모양새가 단순하다고 해서 이 원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 이제 이 논변들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철학자들이 더욱 생생한 다른 지각이 관념에 선행하며 관념은 그 지각으로부터 도출되고 그 지각을 재현한다는 것만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물음을 명료하게 진술하는 것이 본유 관념에 대한 모든 논쟁을 소멸시키고, 우리의 추론에서 그 원리를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쓸모 있게 하리라고 믿는다.


3. 주제의 구분

 우리는 앞서 인상이 관념과 대응하며, 인상은 관념에 선행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상을 관념보다 먼저 검토해봐야 하는 것일까? 흄은 이 절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인상에 대한 검토보다 관념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관념이 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주된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이를 위해 '감각의 인상'과 '반성의 인상'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예를 들어 내가 라면을 먹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라면을 맛보았을 때 난 단순히 라면의 맛, 짭조름하고도 조금은 매콤한 국물, 부드러운 면발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각의 인상'이다. 이러한 감각의 인상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머릿속에 머물게 되며, 우리는 그 맛에 대해 어쩌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라면을 먹었을 때의 감각을 생각해보며 우리는 다이어트 중인데도 라면을 먹었다는 죄책감, 자기혐오가 들 수도 있고, 혹은 라면을 같이 먹었던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길 수도 있으며, 아니면 라면이 정말로 맛있다고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은 역시 맛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인상에서 기인한 관념, 그리고 그러한 관념을 곱씹으면서 얻은 자기혐오, 슬픔, 행복 등이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을 반성적 인상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 흄은 인간 정신의 본성과 원리를 인상에서 산출된 관념, 그 관념을 원인으로 하여 다시 인상을 받아 그 인상에서 다시 관념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흄은 감각의 인상의 경우 철학자의 문제가 아닌 해부학자나 과학자의 일이라고 칭하였다. 맞는 말이다. 혀가 어떠한 원리로 짠맛을 맛보는지, 어느 정도의 나트륨 함량이 되어야 짜다고 느끼는 것인지, 매운맛이 통각인지 아닌지 등은 철학자의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은,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감각을 통해 인식한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관념을 갖게 되고 그 관념에 대응해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는 철학자가 할 일인가? 적어도 흄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것이 의미가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때 당시에는 뇌과학이라는 용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어쩌면 인간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행복감이나 우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그러한 행복감이나 우울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에 대한 과학적 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밝혀낼 여지가 전연 없는 것일까?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에서도 언급한 내용이긴 하지만, 철학의 수많은 주제 중 적어도 인식론에 관련해서만큼은 현대의 과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읽는 독자나, 이 글을 읽는 독자, 인식론을 탐구하는 이가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있다고 본다.

 

 여하튼 흄은 상기한 이유에서, 즉 인상이 아무리 인상이 관념보다 앞선다고 하더라도 관념이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바로 우리의 관심사인 '무섭다', '혐오스럽다', '기쁘다'와 같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태어나도록 하는 원인은 관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정념, 욕구 그리고 감정 등과 같은 반성의 인상은 주로 관념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인상부터 먼저 검토하는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즉 인간 정신의 본성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상을 다루기에 앞서 관념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여기서 관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4. 기억의 관념과 상상력의 관념에 관하여

 흄은 이 절에서 또다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바로 '기억의 관념'과 '상상력의 관념'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인상이 정신에 현전하여 그에 대응하여 그보다는 덜 생생한 것이 정신에 현전하는 것이 '관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상으로 인한 관념은, 그 관념의 생생함의 정도의 차이에 따라 다시 두 가지의 관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어떤 관념은 너무도 생생하여 눈을 감고 자신이 받았던 인상을 생각해보면 마치 눈앞에서 그 사건이 일어나 나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둘째, 첫 번째의 생생한 관념과는 달리 생생함이 아예 없으며, 그 사건과 관련된 어떠한 느낌도 경험한 적이 없는 관념이 떠오를 때가 있다. 첫 번째와 같은 관념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기억'이며, 두 번째의 관념을 반복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밝히다시피 관념은 인상에서 오기에 상상력의 관념, 즉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능력을 사용하여 얻은 관념과 기억의 관념은 모두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 근원적이고도 대응하는 인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점 또한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력은 그 대응 인상의 질서와 형태에 전연 얽매이지 않지만, 반면 기억은 그 대응 인상의 질서와 형태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내가 어제의 일을 '기억'한다고 한다면,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잠에 들었다는, 이러한 사건의 배열을 뒤집는다는 것, 가령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잠에 든 뒤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다음 주나 혹은 1년 뒤의 오늘을 상상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건들의 배열은 자유로워지며 더 나아가 중간에 다른 사건을 추가하는 것도 전혀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상상력의 자유'를 흄은 제2원리라고 칭한다. 즉 상상력은 자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을 얼마든지 바꾸고 변형시킬 수 있으며, 이는 앞에서 살펴본 복합 관념에서 단순 관념들로 관념들을 서로 분리한다든지, 혹은 별개의 단순 관념들을 서로 결합시킬 수 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방금 언급한 것처럼 상상력은 단순 관념들을 서로 분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단순 관념들을 서로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단순 관념들을 서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단순 관념들은 모두 제각기 다르다, 같지 않다는 점이다.(왜냐하면 만약 단순 관념들 중 같은 단순 관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단순 관념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8절에서 한번 더 설명되니 유념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 인사이 정신에 현전했을 때, 그 인상이 다시 관념으로 정신에 현상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인상은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따라 나타날 것이다. 철째, 그 인상이 새로 현상함에 있어서 인상이 그것 최초의 생동성을 상당한 정도로 유지한다면, 그것은 인상과 관념 사이의 어떤 중간자이다. 둘째, 그 인상이 그 생동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 그것은 관전 관념이다. 우리가 인상을 첫째 방식으로 반복하는 직능을 기억이라고 하며, 둘째 방식으로 반복하는 직능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5. 관념들의 연관, 또는 그 연합에 관하여

 우리는 단순 관념을 결합하고 분리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상상은 자유'라는 격언처럼 상상력은 정말로 단순 관념들을 마구잡이로 결합하거나 연합(하나의 단순 관념을 떠올렸을 곧바로 다른 단순 관념을 떠올리는 것)하는 것일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흄은 상상력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직능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흄은 상상력이 어느 정도는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단순 관념들을 결합하고 연합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일정한 정도의 규칙을 '은근한 힘'이라고 칭한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상상력에 의한 단순 관념의 결합이나 연합이 꼭, 반드시 은근한 힘을 따른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은근한 힘의 첫 번째는 '유사'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안경을 닦는 극세사 천을 떠올렸을 때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떠올릴 수 있다. 두 번째는 '시간이나 장소의 인접'으로 우리는 어떠한 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혹은 그 장소가 달라짐에 따라 그것이 달라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을 보고 우리의 사고는 어떤 두 단순 관념을 서로 시간이나 장소의 인접에 따라 결합, 연합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직 선홍빛의 고기의 관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그 고기가 다 익어서 노릇노릇해진 형상의 관념을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은 '원인과 결과'이다. 흄은 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단순 관념들의 결합이나 연합이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을 가장 쉽게 상기시킨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떠올리면 '할아버지'를 곧바로 떠올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은근한 힘에 의해서든 아니면 다른 원리에 의해서든 우리는 바로 상기한 관념들의 연합이나 결합을 통해 복합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상상력의 직능보다 자유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원리를 은근한 힘으로 간주하고자 할 뿐이다. 복합 관념으로 합일되기에 가장 적합한 단순 관념을 자연이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가리켜 주므로, 이 힘은 일상적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언어들이 서로 아주 엇비슷하게 대응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합을 일으키고, 또 정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질들은 유사, 시간이나 장소의 인접, 그리고 원인과 결과 등 세 가지이다.


 책을 읽으면서 비교적 난해하다고 느껴진 시점인 다음 절로 넘어가기 전에 여태까지 논의한 내용에 대해 한 번 환기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먼저 지각에는 인상과 그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들과 관념들은 각각 단순 인상과 복합 인상,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으로 나뉜다고 했다. 더불어 인상은 감각을 통해서 얻은 원초적이고도 단순한 '날 것의' 인상인 감각의 인상과 감각의 인상에서 야기된 관념에서 얻은 복잡하고도 '가공절차를 거친' 반성의 인상이 있다고 했으며, 우리의 논의의 대상인 정념, 욕구, 감정 등은 이 반성의 인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아무리 관념이 인상으로부터 산출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관념을 먼저 논의해야 한다고 흄은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너무도 생생한 관념이자 그 질서와 형태에 얽매이는 기억의 관념과 달리 상상력의 관념은 기억의 관념처럼 생생하진 않지만 단순 관념들을 분리, 결합할 수 있는 사고의 능력이라고 하였으며 이 상상력은 흄이 규정한 세 가지의 은근한 힘, 유사, 시간이나 장소의 인접, 원인과 결과 등을 어느 정도 따르며, 이 상상력으로 인해 단순 관념들의 연합과 합일이 이루어져 복합 관념이 만들어진다.


6. 관계들에 관하여

 흄은 복합 관념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관계, 양태, 실체가 그것이다. 어쩌면 복합 관념을 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기보다는 복합 관념이 형성되는 원리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느 명석한 이는 우리가 앞선 절에서 언급한 은근한 힘을 더해 복합 관념이 형성되는 원리는 총 네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또한 틀릴 수도 있다고 흄은 말한다. 흄이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인간 정신의 궁극적인 원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적어도 인간 정신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로 저 네 가지에 더하여 실제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 이제부터 관계, 양태, 실체 중 관계들에 대하여 먼저 얘기해보자. 우리가 일상적 대화에서 관계라고 하면, '빨간 사과'라는 복합 관념의 경우 '사과'가 '빨갛다'라는 속성을 품고 있는, '빨갛다'가 '사과'에 포함되는 관계에 있다고 표현한다. 어쩌면 이 '빨간 사과'라는 복합 관념은 바로 위의 절에서 '시간이나 장소의 인접'에 의한 결합 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복합 관념들은, 즉 위의 절에서 은근한 힘에 의해서 결합되고 연합되는 관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다른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연합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흄은 이 은근한 힘을 '자연적 관계'라고 칭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흄의 말대로 정말로 놀라운 사고의 직능이기에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자연적 관계' 뿐만 아니라 얼핏 보기에 관계가 없어 보이는 관념들을 관계 짓곤 한다. 흄은 이러한 관계들의 복합 관념을 '철학적 관계의 관념'이라고 칭하며 이 철학적 관계의 관념이 가능토록 하는 철학적 관계의 원천은 '유사성', '동일성', '시간과 공간', '양이나 수', '성질의 정도', '반대', '원인이나 결과'의 총 7가지이다.


 첫째, '유사성'에 대해 흄은 모든 철학적 관계의 관념들의 전제 조건이라고 칭하며, 유사성을 가지지 않은 철학적 관계의 관념은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유사성이 언제나 관념들의 연관이나 연합을 낳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고로 유사성이라는 것은 철학적 관계의 관념들의 충분조건 중 하나이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 이는 예를 들어 '1이 2보다 작다'는 관념이 있을 때, 1과 2가 모두 숫자라는 유사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1이 2보다 작다'라는 관념에는 '작다'라는 관념에 비해 하등 무쓸모 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과 2가 모두 숫자라는 유사성으로 인해 1과 2를 비교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동일성'은 'x=2일 때, x+16=18은 참이다'라는 관념에서 'x=2'에서의 x와 'x+16=18'에서의 x가 동일하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셋째, '시간과 공간'은 '원주는 부산보다 서울과 가깝다'라는 명제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관념들의 멀고 가까움,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에 대해 공간 상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지, 혹은 '달은 해가 지고 나온다'의 예와 같이 하나의 관념이 어떤 관념에 뒤이어 나올 때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넷째, '양이나 수'는 '목성이 지구보다 크다'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성질의 정도'는 '보라색은 노란색보다 파란색에 더 가깝다'라는 명제에서 보라색과 노란색과 파란색은 모두 색이라는 동일한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섯째, '반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유사성'이라는 것이 모든 관계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반대를 관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한다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 수 있는데, 우리는 분명히 '좌파와 우파는 서로 반대이다'라는 명제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공공연히 '반대'라는 단어, 관계를 사용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관념에서, 혹은 보편적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서로 반대되는 것이 존재하는가? 예로 든 좌파와 우파는 그 방식이 서로 다를 뿐이지 사회가 더 나아지길 바란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왼쪽과 오른쪽도 과연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단지 방향의 차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세계에서 서로 반대되는 것이나 반대되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흄은 '존재'와 '비존재'가 그 예외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즉 '반대'라는 개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습관과 사고작용에서 작용하기에 '반대' 또한 관계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인이나 결과'는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발발했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에 덧붙여 흄은 '차이'도 하나의 관계의 원천이 되는 것 아니냐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흄은 오히려 차이란 관계의 부정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의 사고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라고 했을 때 이는 오히려 남자의 사고방식과 여자의 사고방식이 서로 관계가 없고 각각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내가 차이를 다른 관계들에 결부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예상될 만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이를 실재적이거나 긍정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계의 부정으로 간주한다. 차이는 동일성에 반대되거나 유사성에 반대되는 두 종류이다. 전자는 숫적 차이라고 일컬어지며 후자는 류적 차이라고 일컬어진다.


7. 양태와 실체에 관하여

 이 절에서는 복합 관념이 형성되는 원리 중 나머지 두 가지인 '양태'와 '실체'에 관해서 알아볼 것이다. 먼저 '실체'에 대해 논의를 해보자. 나는 평소 롤(리그 오브 레전드)을 즐겨한다. 아니, 즐겨하는 수준도 아니고 작년에 글을 쓴 뒤, 지금에서야 글을 쓰는 이유는 다 롤 때문이니, 거의 쉬는 시간에는 롤을 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거기 나오는 캐릭터 중 '티모'라는 캐릭터가 있다. 티모는 독침과 버섯을 무기로 싸우는 캐릭터인데, 나는 어떤 계기로 이 캐릭터를 시작한 이후 6, 7년 가까이 이 캐릭터만 해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 캐릭터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런 나를 두고 혹자는 게임에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해한다. 티모는 단순히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티모, <리그 오브 레전드>


 근데 이 주장은 실제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흄은 말한다. 티모는 단순히 나의 키보드와 마우스에 따라서 움직이는, 아니 움직인다고 말할 수도 없는, 단순히 나의 키보드와 마우스에 따라서 모니터에 표출되는 '그래픽 쪼가리'일뿐이다. 이 그래픽 쪼가리를 보고 나는 흥분, 분노, 재미를 느끼며, 그러한 감정, 정념, 정서를 느끼도록 해주는 티모에 애착을 가지고 게임을 한다. 현실도 이와 마찬가지다. 내가 사과를 본다고 가정해보자. 빨간색, 둥그런 모양이지만 특유의 타원형을 가진, 그러면서도 꼭지 부분은 움푹 들어간, 툭 튀어나온 꼭지…. 이러한 모습을 본 우리는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 사과라는 것을 인식한다. 하지만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 사과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사과만이 가진 물리적 특성을 통해 알아낸, 즉 반성적 관념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다. 사과라는 물체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사과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 사과가 가진 여러 물리적 특징들의 집합체를 우리의 사고가 인식한 뒤 그 '개별적 성질들의 집합'에 대해 우리는 사과라고 정의를 내릴뿐인 것이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실체의 관념이 감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면, 나는 어떤 감관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를 묻겠다. 그 관념이 눈을 통해서 지각되면 그 실체는 색이 틀림없고, 그 관념이 귀를 통해서 전달된다면 그 실체는 소리이며, 혀를 통해서 전달된다면 맛이며, 다른 감관에 의해 전달되어도 그 감관에 상응하는 지각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실체가 색이나 소리 또는 맛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실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실체의 관념은 반성의 인상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반성의 인상은 정념과 정서로 환원된다. 아마 이 정념과 정서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실체를 결코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적 성질들의 집합에 관한 관념과 구별되는 실체의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체에 관하여 말하거나 추리할 때 어떤 다른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다음으로 양태에 관하여 논의해보자. '양태'라는 단어 자체가 흔히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서 먼저 양태에 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보자면, 양태란 어떠한 것이 본질적인 것은 유지하면서도 그 형태를 달리해서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들을 말한다. 흄이 예로 든 것처럼 '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춤이란 <네이버 사전>에서는 '장단에 맞추거나 흥에 겨워 팔다리와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여 뛰노는 동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춤의 본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고 발레나 왈츠가 춤의 양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저 본질에 맞지 않는 '노래'라는 관념이 상상력에 의해서 합일된다고 생각해보자. '춤'이라는 복합 관념과 '노래'라는 복합 관념이 합일되면 '춤'은 더 이상 '춤'이라고 불리지 않고 '뮤지컬'이라든지 다른 어떠한 단어로 불리게 되리라.


 하지만 실체의 경우에는, 다시 한번 흄의 예를 따라가 보면, '황금'이라는 복합 관념은 노란색, 무게, 전성, 융합성 따위를 지니고 있는데, 여기에 황금을 녹일 수 있다는 '용해성'이라는 단순 관념이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황금'을 여전히 '황금'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체와 양태의 차이다. 즉 실체의 경우 다른 어떠한 단순 관념이 단번에 합일될 수 있지만, 양태의 경우 다른 단순 관념이 합일될 수 없고, 합일되는 순간 다른 단어로 불려야 마땅하다.

복합 관념의 주요 요소로 여겨지는 합일의 원리는 뒤에 나타나는 모든 성질들에 이르는 통로를 제공하며, 이 성질들도 먼저 나타났던 다른 성질들과 마찬가지로 합일의 원리에 의해 복합 관념에 포함된다. 이 원리가 양태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은 양태의 본성을 고찰해 보면 분명하다. 양태를 형성하는 단순 관념이 재현하는 성질들은 인접이나 인과에 의해 합일되지 않았지만 상이한 대상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것들이다. 또는 그 단순 관념들이 모두 함께 합일되어 있다면, 합일하는 원리는 복합 관념의 기초로 간주되지 않는다. … 그 양태를 식별해 주는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그와 같은 복합 관념들이 왜 새로운 어떤 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 이유는 명백하다.


8. 추상 관념들에 관하여

 『오성에 관하여』 1부의 마지막 절에서 흄은 추상 관념 및 일반 관념에 관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설명에 앞서 밝혀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반 관념과 추상 관념이 과연 다른가 하는 것이다. 흄조차도 이 책에서 일반 관념과 추상 관념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인간'이라는 일반 관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과연 '인간'이라는, 지구에 살고 있는 대략 78억 명의 개체의 집합으로서 사용하는 '일반 관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다른 예, 그러니까 '동물', '삼각형' 등은? 이러한 예와 같이 대부분의 일반 관념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추상 관념과 혼용하여 사용하여도 무방할 것 같고, 따라서 나도 이 절의 논의에서 일반 관념과 추상 관념을 서로 혼용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정신이 추상 관념들을 표상할 때, 그 관념들이 일반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가 하는 것은 추상 관념들 또는 일반 관념들에 관해 제기되어 온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한 위대한 철학자는 바로 이것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용인된 견해를 논박하고, 모든 일반 관념은 어떤 술어에 수반된 개별 관념 들일뿐이며 술어는 그 관념들에 더욱 폭넓은 의미를 부여하고 때에 따라 그 관념들이 자신들과 닮은 다른 개별 관념들을 상기하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는 필경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그리고 위의 인용구에서 '한 위대한 철학자'라고 칭해지는 버클리는 추상 관념과 일반 관념을 부정했다. 동물이라는 일반 관념 및 추상 관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독자들은 '동물'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가? 나의 경우 '동물'이라는 단어의 울림이나, 단어를 보면 코끼리와 비슷한 형태의, 갈색의, 포효소리와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어떤 것'을 상상하였다. 과연 내가 생각한 이 하나의 것이 동물이라는 일반 관념인가? 전연 그렇지 않다. 코끼리는 수많은 동물 중 하나의 종류에 불과하며, 갈색이 아닌 흰색의 염소도 존재하고, 포효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역동적이지 않은 달팽이와 같은 동물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동물'이라는 일반 관념을 생각하기 위해서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일반 관념과 대비되는 '개별 관념', 자세히 말하자면 인상을 통해서 얻어낸 '개별 관념'을 떠올려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버클리와 흄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반 관념 및 추상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반 관념 및 추상 관념은 일반 관념이나 추상 관념이 아닌 개별 관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앞선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달팽이는 동물이다'라는 명제에서 술어로서 사용된 '~는 동물이다'가 달팽이에 어떠한 관념, 예를 들어 '살아 있다', '움직인다', '생식활동을 한다'와 같은 관념을 더하는 장치로서, 그리고 어쩌면 달팽이와 더불어 다른 동물인 '코끼리'와 같은 비슷한 관념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흄은 이렇게 일반 관념 및 추상 관념을 떠올릴 때에 개별 관념을 생각지 않고 일반 관념 및 추상 관념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첫째, 그 일반 관념이 가능한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든지, 두 번째, 개별적인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것을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그 개별 관념을 생각한 것이지 일반 관념을 생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의 경우 우리 인간의 사고능력을 사용해서는 불가능하고, 두 번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흄은 말한다. 이 두 번째의 불가능의 이유에 대해서 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질이나 양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고, 어떤 질이나 양을 생각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둘째, 정신의 역량이 무한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질과 양의 가능한 모든 정도에 대한 관념을 동시에 형성할 수 있고, 또 이 관념을 적어도 불완전하나마 모든 반성과 대화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추상 관념이 개별 관념, 혹은 개별 개체에 대한 관념을 떠올리지 않고는 왜 불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의 첫 번째 과정은 "정신이 질과 양 각각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질과 양에 대하여 어떤 관념도 형성할 수 없다."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첫 번째 논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앞서 어떤 두 대상이 서로 구분된다면 사유나 상상력을 통해 이들을 분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역으로도 성립한다. 즉 사유나 상상력을 통해 어떤 것들을 분리할 수 있으면 그 대상들은 서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개별 관념과 그 개별 관념이 일반 관념에 포함되도록 하는 일반 관념의 본질적 요소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즉, 우리가 과연 개별 관념에 대해서 사유를 한다고 했을 때, 그러한 개별 관념에 대한 사유로 인해 일반 관념이 갖고 있는 본질적 요소를 해치지는 않는 것일까? '선분'이라는 일반 관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선분에는 1cm의 선분, 50m의 선분, 100km의 선분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모든 선분들은 선분이 선분이도록 하는 본질적 요소, 기하학적으로는 '두 점 사이를 잇는 유한한 선'이라는 요소를 만족하기에 모두 똑같이 '선분'이라는 일반 관념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분이 선분이도록 하는 본질적 요소와, 선분의 일반 관념 안에서 개별의 선분이 구별되도록 하는 '길이'는 과연 다른 것인가? 한번 직접 생각해보라. '선분의 길이'와 '선분'이 과연 다른 것인가? 전연 그렇지 않다. 고로 우리는 선분이 선분이도록 하는 본질적 요소와 선분이라는 일반 관념 아래서 개별 선분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정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일반 관념 아래 존재하는 개별 관념에 대해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반 관념의 본질적 요소는 해치치 않는다.

그런데 어떤 선분의 정확한 길이는 선분 자체와 다르지도 구분되지도 않으며, 어떤 성질의 정확한 정도 또한 성질 자체와 다르지도 구분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관념들은 구분될 수도 없고 차이가 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관념들은 사유에서 서로 결합된다. 우리의 모든 추상과 치밀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선분의 일반 관념이 서로 다른 질과 양의 정도를 갖는 다른 것들을 재현할 수도 있지만, 그 일반 관념은 정신에 현상할 때에는 질과 양의 정확한 정도를 갖는다.


 "정신이 질과 각각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질과 양에 대하여 어떤 관념도 형성할 수 없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두 번째 논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앞서 인상은 감각을 통해서 정신에 현전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로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것이 외부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일정한 정도의 질이나 양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앞서 예로 든 선분을 다시 예로 들어보면, 우리는 학교에서 선분이나 직선의 두께가 0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두께가 0인 직선이나 선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께가 0이면 우리 눈에는 직선이나 선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감각으로 인식하고 그 감각으로 인해 인상이  우리 정신에 현전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우리가 감관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일정한 정도의 양이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관념은 항상 인상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므로, 인상이 어떠한 물체가 일정한 정도의 질이나 양을 지니고 있어야만 정신에 현전한다는 규칙은 관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둘째, 어떤 대상도 감관에 현상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질과 양의 정도가 모두 결정되지 않고는 어떤 인상도 정신에 현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신이 질과 각각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질과 양에 대하여 어떤 관념도 형성할 수 없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세 번째 논변은 다음과 같다. 모든 물체는 어떠한 정도의 성질이나 양을 갖는다. 하지만 일반 관념은 그러한 일정 정도의 성질이나 양을 상정하지 않는다. '선분'이라는 일반 관념을 우리가 얘기한다면, 그 선분의 길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1m일 수도 있고, 1,000km일 수도 있으며, 10cm 등등 선분이 가질 수 있는 양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일정 정도의 성질이나 양을 상정하지 않은 어떠한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 길이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선분을 한번 생각해보라.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관념을 생성할 때에 그 관념이 어느 정도의 성질이나 양을 지니지 않은 관념은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생각할 수 없는 관념인 일반 관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이 생각하는 일반 관념, 추상 관념은 결국에는 일정한 정도의 양이나 성질을 가진 개별 관념에 불가하다.


 다음으로는 "정신의 역량이 무한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질과 양의 가능한 모든 정도에 대한 관념을 동시에 형성할 수 있고, 또 이 관념을 적어도 불완전하나마 모든 반성과 대화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흄이 어떻게 증명하는지 살펴보겠다.

우리 앞에 자주 나타나는 여러 대상들 사이에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했을 때, 그 대상들의 질과 양의 정도에서 우리가 어떤 차이를 관찰할 수 있거나 그 대상들 사이에 다른 차이가 나타나더라도, 우리는 그 대상들 모두에 대해서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습관을 얻은 다음부터 그 이름을 듣는 것은 그 대상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재생하며, 상상력은 그 대상의 모든 개별적 여건들과 비율로서 그 대상들을 표상하게 된다.

 우리가 여러 대상들 사이에 유사성을 발견하면 그러한 유사성을 가진 대상들에 대해서 동일한 이름을 짓게 된다. 이것이 바로 흄이 말하는 '습관'이다. 그리고 이 습관을 얻은 다음부터는 그 단어를 들으면 그 수많은 대상들 중 하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 습관을 얻은 다음부터는 그 단어를 들으면 바로 그 습관에 대해서도, 즉 그 단어가 대상들이 어떠한 유사성을 가졌기에 우리가 그러한 이름을 붙인 것인지 떠올리도록 한다. 삼각형을 예로 들어보자. 세상에는 수많은 삼각형이 있다. 직각삼각형, 둔각 삼각형, 예각 삼각형, 이등변 삼각형 등등 이러한 많은 삼각형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공통점은 바로 각을 세 개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각을 세 개 갖고 있는 도형에 대해서 '삼각형'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삼각형'이라는 단어를 말하게 되면 그 즉시 수많은 삼각형 중에서 하나의 삼각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또한 동시에 우리가 삼각형 모양의 도형들에 대해서, 도대체 그 도형들이 어떠한 유사성을 지녔기에 우리가 삼각형이라는 공동의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인지, 그 습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과 관련하여 흄은 또 다른 특성을 설명한다.

우리가 추리하는 개별 관념을 정신이 산출한 다음에 우리가 우연히 어떤 추리를 한다면, 일반 명사 또는 추상 명사에 의해 재생된 그 부대 습관은 그 개별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어떤 개별 관념을 쉽게 암시하는데, 현재의 관심사에서 이것은 아주 특이한 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흄이 예로 든 것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 누군가가 우리에게 "삼각형의 세 각은 모두 같아요."라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습관'에 의해 얻게 된 일반 관념이나 추상 관념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나 추상 명사를 듣게 되면 개별 관념을 떠올리는 '부대 습관(attendant custom)'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삼각형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 하나의 삼각형이 정삼각형이라고 한다면 '다행히도' 저 말은 타당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다른 삼각형을 떠올리며 저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책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개인적 견해로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한다.


 어쩌면 추상 관념이나 일반 관념에 대한 명제, 위에서 말한 "삼각형의 세 각은 모두 같아요."라는 명제를 들었을 때 그 명제가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흄이 말한 저러한 예외적인 개별 관념을 떠올리지 않고, 그 명제에 대해 증명하는 것 또한 저 명제가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삼각형의 예를 들면, 삼각형의 결정 조건, 즉 필요충분조건인 '두 변의 길이의 합이 나머지 한 변보다 길어야 한다.'를 생각하여 이러한 결정 조건에는 "세 각이 같아야 한다."는 명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혹은 삼각형의 결정 조건을 증명하는 과정을 사고에서 재생시키며 저 명제의 타당성에 대해 판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러한 '수고로움', '귀찮음'을 우리는 기꺼이 감수하지는 않는다. 설사 귀찮음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만약 일반 관념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 일반 관념의 명제에 대해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흄이 말한 것처럼 처음 떠올렸던 개별 관념에 더해 다른 개별 관념을 떠올리는 것이 더욱 '효적'이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는, 저러한 일반 관념, 추상 관념의 명제에 대해 오류를 갖는 것을 더욱 효율적으로 피하기 위해 되도록 특정한 일반 관념이나 추상 관념을 더욱 포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개별 관념을 떠올리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 두 묶음의 그림들이 바로 그 예가 될 수 있다.


 각각 삼각형과 인간이라는 일반 관념에 관한 어떤 명제의 타당성을 판단하기에는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편리하다. 만약 어떤 이가 '삼각형'이라는 일반 관념에 대한 대표적 개별 관념으로서 오른쪽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삼각형의 세 각은 모두 같아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왼쪽의 삼각형을 개별 관념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보다 더욱 빨리,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삼각형이라는 일반 관념에 대한 명제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


 다음의 흄의 설명이 어쩌면 이 절에서 여태까지의 논의를 정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관념들은 그 본성에서는 개별적이지만, 그 자신이 재현한 것에서는 일반적이다라는 역설에 대하여 해명한다. 개별 관념은 일반 술어에 동반됨으로써 일반적으로 된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 관념은 습관적 결부로부터 많은 다른 개별 관념들과 관계하며, 또 상상력 안에서 다른 개별 관념들을 쉽게 상기시키는 하나의 술어에 동반됨으로써 일반화된다.


 흄은 앞서 설명한 습관과 관련하여 이러한 우리 사고의 습관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원인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단지 이러한 사고작용과 비슷한 다른 예들을 설명하고 그러한 예들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 밝혔다시피 여기서도 이러한 흄의 설명방식은 데카르트 같은 합리론 철학자가 자신의 사상을 개진하는 방식과 뚜렷한 차이가 난다고 보여진다. 합리론 철학자의 경우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파고들어갔을 테지만 흄의 경우 "경험과 유비에서 그 작용들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이 주제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어려움은 분명히 습관과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개별 관념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 개별 관념을 동반시키는 어떤 단어나 소리에 의해 떠오르는 모든 개별 관념을 매우 쉽게 상기시키는 것은 습관이다. 내 의견이지만, 정신의 이러한 작용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명을 할 수 있다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유사한 다른 사례와 그 작용의 실행을 촉진하는 다른 원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심적 작용의 궁극적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과 유비에서 그 작용들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그 첫 번째 설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주 큰 수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1,000 혹은 10,000 등과 같은 수들 말이다. 이러한 숫자들이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1,000이 어느 정도의 수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가? 나의 경우에는 1,000이라는 숫자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수인지 생각해보라고 하여 둥그런 물체가 차례대로 1,000개가 줄 세워져 있는 것을 생각하였지만, 이로써는 만족할만한 '관념'을 형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1,000을 10의 세제곱으로 생각해보자. 앞서 나의 경우로 예를 든 것처럼 1,000개의 물체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10개의 10의 10개' 혹은 '10을 세 번 곱한 수'라는 조금은 더 명확한 관념이 떠오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즉 1,000이라는 개별 관념에 대해서는 명확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1,000은 10의 세제곱이다', '100이 총 10개가 있으면 1,000이다'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일반 관념, 추상 관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 일반 관념이나 추상 관념이 지니고 있는 명확한, 모든 개별 관념에 대해서는 불완전하게 파악하더라도 사고에서 수행하는 어떠한  추론에는 '완전하게' 작용할 수, 다시 말하자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둘째, 우리가 외우고 있는 영화 대사, 노래 가사 혹은 너무나 감명 깊게 들어서 그 단어들의 울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떤 이들의 인터뷰의 일부나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그 전체를 기억할 수 있다. 예를 어 2016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기억하는 이는 '자괴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박근혜의 대국민 담화 중 일부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며, 영화 『타짜』를 좋아하는 이라면 '마포대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이 새끼야."라는 곽철용의 대사를 기억할 것이고, 신해철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라는 가사의 일부를 보았을 때 그 뒤를 이어 '나는 그대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라고 흥얼거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사고작용은 어떠한 단어, 즉 '삼각형'과 같은 일반 명사를 들었을 때 그와 관련된 습관이나 삼각형의 본질을 떠올리는 것과 유사하다.


 셋째, 우리는 어떠한 복합 관념을 나타내는 단어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 단어가 어떠한 개별 관념들의 집합으로서 복합 관념을 형성하는지 일일이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런던'과 '아시아'라는 복합 관념을 나타내는 명사가 있을 때, "런던은 아시아에 있어요."라는 명제를 우리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복합 관념을 나타내는 명사에 대해서 그 명사가 포함하는 모든 개별 관념을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떠한 '관계'를 포함하고 있어 그와 관련된 추론의 타당성에 대해서 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앞서 유사한 대상들에 대하여 동일한 이름을 붙이고, 이러한 유사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습관'이라고 칭한다고 했고 그러한 습관이 형성된 이후부터는 그에 대응하는 일반 명사를 들었을 때 그러한 습관과 개별 관념을 떠올리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각형'이라는 일반 명사는 우리로 하여금 삼각형들이 가지는 유사성, 무엇이 삼각형이 되게 하는지, 그리고 수많은 삼각형 중 하나의 삼각형을 떠올리도록 한다.


 넷째, 흄이 애초에 이러한 논의를 시작한 이유는 바로 앞서 누누이 설명한 습관을 오성을 사용해서는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은 우리가 앞서 생생함을 잃어버린 인상이 정신에 현전하여 만들어지는 관념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말해 인상이 우리의 정신에 현전할 때 '기억'이라는 사고 행위를 제외한 모든 사고 행위는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너무나도 빠르다. 예를 들어 이렇게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나의 책장에 있는 "최후의 유혹"이라는, 카잔차키스가 쓴 예수의 일대기를 모티프로 한 소설책을 보고 부지불식간에 십자가를 진 예수를 떠올릴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의 원인에 대해서, 이러한 사고능력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흄은 이 절의 마지막에 '이성의 구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 주제를 마치기에 앞서, 강단에서 아주 많이 이야기되면서도 거의 이해되지 않고 있는 이성의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야기한 원리들을 사용하겠다. 형태와 형태를 갖는 물체 사이에, 또 운동과 운동하는 물체 사이에 이런 종류의 구별이 있다. 이 구별을 설명함에 있어서 어려움은 앞서 설명했던 모든 관념은 서로 다르며, 분리될 수 있다는 원리에서 생긴다. 여기서 형태가 물체와 다르면 그 관념들은 분리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별될 수 있어야 하며, 그 관념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그 관념들도 분리되거나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구별이 차이도 분리도 함축하지 않는다면, 이성의 구별은 무엇을 뜻하는가?

 『오성에 관하여』 1부는 이 '이성의 구별'을 마지막으로 끝마치고자 한다. 우리는 앞서 구분될 수 있는 사물들은 사고 안에서 모두 분리될 수 있다고, 즉 그 사물에 대응하는 관념들은 모두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로 사물에서 얻은 인상에서 산출된 모든 관념들은 서로 분리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흄이 든 예를 그대로 설명해보자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어떤 '물체'와 그 '물체의 운동'을 구별하며, 또 어떤 물체의 '형태'와 '색'을 구별한다. (만약 혹자가 우리가 그러한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제시할 것이라면, 왜 물체와 물체의 운동은 다른 언어로, 그러니까 각각 '물체'와 '물체의 운동'으로 불리는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라. 저 창밖의 도로에서 달리고 있는 자동차와 그 자동차의 움직임, 운동을 과연 구별할 수 있는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흰색 공의 '형태'와 '흰색'을 구별할 수가 있는가? 한번 달리고 있는 자동차에서 '달린다'는 운동을 자동차와 떼어내어 보려고 노력해보라. 아마 그 노력은 허사일 것이며, '달린다'는 운동을 떼어내려는 시도는 오히려 달리고 있는 차를 생각하도록 할 것이다. 흰색 공도 이와 마찬가지로 흰색 공에서 흰색 공의 형태만 남겨놓고 흰색이라는 색을 떼어내려고 하면 둥그런 형태의 흰색을 생각하도록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공연히 저렇게 분리할 수 없는 관념들을 분리하고 있다. 즉, 물체에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별 관념들을 서로 분리해서 사용하고 있다.


 흄은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단 하나의 물체에서 그 물체의 개별 관념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맞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흰색 공의 양옆에 검은색 공과 흰색 상자를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우리는, 흰색 공과 검은색 공은 형태에서는 유사하지만 색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제서야 흰색 공에서 색과 형태를 구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태에 대해서도 흰색 공과 흰색 상자는 색은 유사하지만 형태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흰색 공에서 색과 형태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개별 물체 안에서는 분리할 수 없는 개별 관념들을, 다른 물체와의 '유사성'을 통해 그 개별 물체의 개별 관념을 분리하는 것을 흄은 '이성의 구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이성의 구별'이라는 반성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훈련을 거치게 되며 결국에는 아무런 수고로움도 들이지 않고 '이성의 구별'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관념에 일종의 반성을 더하는데, 대개 습관은 우리가 그런 반성을 감지할 수 없도록 한다. 흰 대리석 공의 색을 생각하지 않고 그 공의 형태만 고찰하기를 요구하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우리가 색과 형태를 함께 고찰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검은 대리석 공 또는 다른 어떤 색이나 물질로 된 공과 흰 대리석 공의 유사성을 주시한다는 것이다.


"『오성에 관하여』 해제 1부" 끝.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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