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들과 그것들의 기원, 합성, 연관, 추상에 관하여
왜냐하면 만약 진리가 완전히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다면, 진리가 매우 심오하고 난해한 상태로 있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위대한 천재들이 더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좌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 없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허영과 자만으로 평가되고도 남을 것은 확실하다. 나는 내가 펼쳐 보이려는 철학에 그와 같은 장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천명하며, 만약 나의 철학이 매우 쉽고 명료하다면 그와 반대로 그것을 완강한 억측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 이처럼 불가능하다는 것이 인간학의 결함으로 평가된다면, 감히 단언하건대 철학자들의 강단에서 배양되었건 아니면 가장 미천한 장인들의 일터에서 이루어진 것이건 가릴 것 없이, 그 결함은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모든 학문과 방법이 공통적으로 갖는 결함이다. 그 학문과 방법들 가운데 경험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으며, 또 경험의 권위에 기초를 두지 않는 어떤 원리를 정립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다.
오성과 정념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하나의 연쇄적 추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이 자연스러운 구분의 이점을 기꺼이 이용하였다. 내가 다행히도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윤리학, 정치학, 비평 등에 대해 계속 검토함으로써 인간 본성에 관한 이 논고를 완결할 것이다. 대중의 동의를 내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의 판결이 어떻든 나는 그것을 나의 최고 교훈으로 삼을 생각이다.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은 서로 다른 두 종류로 환원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인상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들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유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바로 이 논고의 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일반적인 명제, 즉 처음 현상하는 단순 관념들은 단순 인상들로부터 유래하는데, 이 단순 인상들은 단순 관념들에게 대응하며, 단순 관념들은 단순 인상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명제를 확정하는 데 만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인상이 관념이 선행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에서 내가 확립한 제1원리이며, 그 모양새가 단순하다고 해서 이 원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 이제 이 논변들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철학자들이 더욱 생생한 다른 지각이 관념에 선행하며 관념은 그 지각으로부터 도출되고 그 지각을 재현한다는 것만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물음을 명료하게 진술하는 것이 본유 관념에 대한 모든 논쟁을 소멸시키고, 우리의 추론에서 그 원리를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쓸모 있게 하리라고 믿는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정념, 욕구 그리고 감정 등과 같은 반성의 인상은 주로 관념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인상부터 먼저 검토하는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즉 인간 정신의 본성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상을 다루기에 앞서 관념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여기서 관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어떤 인사이 정신에 현전했을 때, 그 인상이 다시 관념으로 정신에 현상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인상은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따라 나타날 것이다. 철째, 그 인상이 새로 현상함에 있어서 인상이 그것 최초의 생동성을 상당한 정도로 유지한다면, 그것은 인상과 관념 사이의 어떤 중간자이다. 둘째, 그 인상이 그 생동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 그것은 관전 관념이다. 우리가 인상을 첫째 방식으로 반복하는 직능을 기억이라고 하며, 둘째 방식으로 반복하는 직능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상상력의 직능보다 자유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원리를 은근한 힘으로 간주하고자 할 뿐이다. 복합 관념으로 합일되기에 가장 적합한 단순 관념을 자연이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가리켜 주므로, 이 힘은 일상적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언어들이 서로 아주 엇비슷하게 대응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합을 일으키고, 또 정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질들은 유사, 시간이나 장소의 인접, 그리고 원인과 결과 등 세 가지이다.
내가 차이를 다른 관계들에 결부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예상될 만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이를 실재적이거나 긍정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계의 부정으로 간주한다. 차이는 동일성에 반대되거나 유사성에 반대되는 두 종류이다. 전자는 숫적 차이라고 일컬어지며 후자는 류적 차이라고 일컬어진다.
실체의 관념이 감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면, 나는 어떤 감관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를 묻겠다. 그 관념이 눈을 통해서 지각되면 그 실체는 색이 틀림없고, 그 관념이 귀를 통해서 전달된다면 그 실체는 소리이며, 혀를 통해서 전달된다면 맛이며, 다른 감관에 의해 전달되어도 그 감관에 상응하는 지각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실체가 색이나 소리 또는 맛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실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실체의 관념은 반성의 인상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반성의 인상은 정념과 정서로 환원된다. 아마 이 정념과 정서들 가운데 어떤 것도 실체를 결코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적 성질들의 집합에 관한 관념과 구별되는 실체의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체에 관하여 말하거나 추리할 때 어떤 다른 의미도 갖지 못한다.
복합 관념의 주요 요소로 여겨지는 합일의 원리는 뒤에 나타나는 모든 성질들에 이르는 통로를 제공하며, 이 성질들도 먼저 나타났던 다른 성질들과 마찬가지로 합일의 원리에 의해 복합 관념에 포함된다. 이 원리가 양태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은 양태의 본성을 고찰해 보면 분명하다. 양태를 형성하는 단순 관념이 재현하는 성질들은 인접이나 인과에 의해 합일되지 않았지만 상이한 대상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것들이다. 또는 그 단순 관념들이 모두 함께 합일되어 있다면, 합일하는 원리는 복합 관념의 기초로 간주되지 않는다. … 그 양태를 식별해 주는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그와 같은 복합 관념들이 왜 새로운 어떤 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정신이 추상 관념들을 표상할 때, 그 관념들이 일반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가 하는 것은 추상 관념들 또는 일반 관념들에 관해 제기되어 온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한 위대한 철학자는 바로 이것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용인된 견해를 논박하고, 모든 일반 관념은 어떤 술어에 수반된 개별 관념 들일뿐이며 술어는 그 관념들에 더욱 폭넓은 의미를 부여하고 때에 따라 그 관념들이 자신들과 닮은 다른 개별 관념들을 상기하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질이나 양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고, 어떤 질이나 양을 생각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둘째, 정신의 역량이 무한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질과 양의 가능한 모든 정도에 대한 관념을 동시에 형성할 수 있고, 또 이 관념을 적어도 불완전하나마 모든 반성과 대화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런데 어떤 선분의 정확한 길이는 선분 자체와 다르지도 구분되지도 않으며, 어떤 성질의 정확한 정도 또한 성질 자체와 다르지도 구분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관념들은 구분될 수도 없고 차이가 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관념들은 사유에서 서로 결합된다. 우리의 모든 추상과 치밀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선분의 일반 관념이 서로 다른 질과 양의 정도를 갖는 다른 것들을 재현할 수도 있지만, 그 일반 관념은 정신에 현상할 때에는 질과 양의 정확한 정도를 갖는다.
둘째, 어떤 대상도 감관에 현상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질과 양의 정도가 모두 결정되지 않고는 어떤 인상도 정신에 현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앞에 자주 나타나는 여러 대상들 사이에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했을 때, 그 대상들의 질과 양의 정도에서 우리가 어떤 차이를 관찰할 수 있거나 그 대상들 사이에 다른 차이가 나타나더라도, 우리는 그 대상들 모두에 대해서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습관을 얻은 다음부터 그 이름을 듣는 것은 그 대상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재생하며, 상상력은 그 대상의 모든 개별적 여건들과 비율로서 그 대상들을 표상하게 된다.
우리가 추리하는 개별 관념을 정신이 산출한 다음에 우리가 우연히 어떤 추리를 한다면, 일반 명사 또는 추상 명사에 의해 재생된 그 부대 습관은 그 개별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어떤 개별 관념을 쉽게 암시하는데, 현재의 관심사에서 이것은 아주 특이한 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관념들은 그 본성에서는 개별적이지만, 그 자신이 재현한 것에서는 일반적이다라는 역설에 대하여 해명한다. 개별 관념은 일반 술어에 동반됨으로써 일반적으로 된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 관념은 습관적 결부로부터 많은 다른 개별 관념들과 관계하며, 또 상상력 안에서 다른 개별 관념들을 쉽게 상기시키는 하나의 술어에 동반됨으로써 일반화된다.
이 주제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어려움은 분명히 습관과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개별 관념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 개별 관념을 동반시키는 어떤 단어나 소리에 의해 떠오르는 모든 개별 관념을 매우 쉽게 상기시키는 것은 습관이다. 내 의견이지만, 정신의 이러한 작용에 대해 만족스러운 해명을 할 수 있다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유사한 다른 사례와 그 작용의 실행을 촉진하는 다른 원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심적 작용의 궁극적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과 유비에서 그 작용들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주제를 마치기에 앞서, 강단에서 아주 많이 이야기되면서도 거의 이해되지 않고 있는 이성의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야기한 원리들을 사용하겠다. 형태와 형태를 갖는 물체 사이에, 또 운동과 운동하는 물체 사이에 이런 종류의 구별이 있다. 이 구별을 설명함에 있어서 어려움은 앞서 설명했던 모든 관념은 서로 다르며, 분리될 수 있다는 원리에서 생긴다. 여기서 형태가 물체와 다르면 그 관념들은 분리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별될 수 있어야 하며, 그 관념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그 관념들도 분리되거나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구별이 차이도 분리도 함축하지 않는다면, 이성의 구별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관념에 일종의 반성을 더하는데, 대개 습관은 우리가 그런 반성을 감지할 수 없도록 한다. 흰 대리석 공의 색을 생각하지 않고 그 공의 형태만 고찰하기를 요구하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우리가 색과 형태를 함께 고찰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검은 대리석 공 또는 다른 어떤 색이나 물질로 된 공과 흰 대리석 공의 유사성을 주시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