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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Oct 25. 2019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부조리에서의 인간의 모습

※책 제목: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원제: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작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옮긴이: 김연경

※출판사: 민음사


1.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세계

 19세기는 세계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에 힘입어 유럽과 미국에 퍼졌고,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가 아닌 맑스를 필두로 한 ‘과학적 사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또한 철학에 있어서도 이전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인간을 규정지었던 이성주의 철학이 칸트(비록 분류하자면 ‘이성주의’이지만 그 한계에 대해서 지적했다는 의미에서), 쇼펜하우어, 니체 등에 의해 비판이 가해지고 해체되었던 시기이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차르’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전제왕권이 위협받던 시기로, 이의 대체물로 사회주의가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도 근대적 제도의 수용, 구시대적 제도의 폐지(농노제 폐지)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러시아의 격변의 시기를 살며 러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기존 가치체계의 해체를 문학작품으로서 녹여낸 이가 바로 도스토옙스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을 간질에 시달렸고, 또한 가난에 찌들어 살았지만 도박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항상 머리맡에 성경을 두고 잤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었는데, 이 때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총살당하기 직전 살아난 사건이 그것인데, 당시 차르인 니콜라이 1세는 애초에 도스토옙스키를 총살할 마음은 없었으며 단지 겁만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도스토옙스키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매우 깊어진다. 이와 같은 ‘구원’의 체험은 그의 『백치』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알료샤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죄와 벌』 『악령』, 그리고 최후의 작품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치밀한 심리묘사, 생생한 현장감,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에 담겨있는 사상의 위대함으로 칭송되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수많은 작품 중『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친부살해, 돈을 둘러싼 암투, 종교와 인간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위의 중심사건들 중에는 ‘인간의 실존’, ‘사랑’, ‘종교의 개혁’, ‘근대제도의 수용’등 많은 사상들이 집약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카라마조프’의 의미

 ‘카라마조프’는 터키어 ‘카라’와 러시아어 ‘마조프’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에 따라 해석해보면 그 뜻은 ‘검은 피’이다. 검은 피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호색한에 술주정뱅이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그리고 이런 아버지와 닮았으면서도 돈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드미트리는 추악한 욕망과 맞닿아있다. 이반과 알료샤도 각각 형과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카라마조프적 기질’을 타고났다고 소설의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혹은 도스토옙스키가 설정해놓은 ‘검은 피’라는 제목이 그리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라마조프 가는 일단 제쳐놓고 주변인물을 살펴보면, 완고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사실을 고집하는 ‘그리고리’, 드미트리보다 자신이 높은, 고상한 존재임을 느끼기 위해 드미트리를 곁에 두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천박한 심성을 지닌 ‘카체리나’, 모욕당한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악랄하게 행동하는 ‘그루셴카’, 가십거리를 좋아하고 매사에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 험담을 좋아하는 ‘호흘라코바 부인’ 등 마을 사람들 역시 검은 피를 가진 카라마조프 일족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혹은 훨씬 더 추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바, 도스토옙스키는 이 ‘카라마조프’라는 성을 통해 다른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카라마조프가의 일원들에 대해 어떠한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는데 그 공통점이란 바로 엄마가 없다는 것이다.(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엄마가 없다는 사실은 알 수가 없지만 가족관계상의 ‘엄마’가 아닌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가슴을 찢는 물음, 즉 내 집처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고 자문하는 절실한 물음(카뮈, 김화영역, 『알베르 카뮈 전집 5』, 책세상 , 2010년 5월)’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엄마’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드미트리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예 있지도 않고, 배다른 동생인 이반과 알료샤는 엄마를 어렸을 적에 보았지만 넷 중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이는 알료샤 밖에 없다. 그렇다면 엄마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우연이며 그 누구도 한 인간이 태어난 것에 어떠한 목표의식이나 정당성을 상정해 놓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표현한 것이고, 밀란 쿤데라는 (인간 실존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목표를 상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의 행동에 대해서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고 말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목표를 홀로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 무한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고독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스레 도피처를 찾게 되고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드미트리는 술과 여자에서 그 도피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어릴 때에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어 고독하다는 느낌을 잘 갖지 못하거나 그런 감정이 유보된다. 이처럼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간직한 알료샤는 비교적 온화한 상황에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런 기억을 지니고 있지 않은 드미트리는 술과 여자, 그리고 돈에 몰두해 격정적인 삶을 살고, 이반은 그의 철학적 물음을 비장할 정도로 밀고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통해, 나머지 세 사람이 알료샤를 두고 ‘게루빔’이라던지 ‘천사’라던지 하는 찬양의 말을 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 사람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따뜻한 기억을 지닌 알료샤를 통해 잠시나마 그런 상황에 지친 자신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쾌락에 빠진 아버지에 의해 내팽개쳐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도덕이나 종교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버지를 보며, 형제들에게는 문제가 생긴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흔히들 말하는 ‘도덕’이나 ‘인륜’,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로 대표되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당연히 가져야 할 선악의 기준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한 행동을 보며, 아들들은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쳐해 있는지(즉, 엄마가 없이 그 누구 하나 나를 돌봐주지 않고) 의문을 던지며 자기 자신조차 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닮아가는 것이고, 그 생각은 ‘삶이 너무나 고독하고 힘든 것으로 보나 세계의 역사(터키에서 일어난 잔혹한 일들)를 살펴보나 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은 없다.’는 생각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며, 또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생각중 하나이다.


 신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뜻이며, 인간이 옳다고 믿는 모든 것이 의심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논리에 대해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딜레마는 미덕을 갖추면서 비논리적이 되던지, 아니면 논리적이 되면서 범죄자가 되든지 해야한다는 데 있다.

                              

 이 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달팽이를 자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생명을 사랑하라.”라는 격언에 맞추어보면 달팽이를 자르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라.”는 격언의 타당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생명은 자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하는)신이 없다면, 혹은 달팽이를 자른 것에 대해 단죄할 내세가 없다면 왜 굳이 저 격언을 지켜야하는가? 신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혹은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미덕들이 전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왜냐하면 그 미덕들은 모두 ‘신’으로 대표되는 교설이나 도덕, 인륜에서 그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없다’는 논리에 따르면서 달팽이를 자르는 것은 저 격언에 따르면 사회에서 말하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신은 없다’는 논리 자체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달팽이를 자르지 못한다면 저 논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비논리적’이면서 미덕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은 “지옥에 갈고리가 없다면 이것을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해.”라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비논리적이거나, 범죄자가 되거나’의 양자택일에서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을 카뮈는 ‘부조리’라고 칭했다. 이 부조리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은 신의 이름으로 점철된 , 근거 없이 옳다고 주장되어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그 기준들로 인해 고통이 생겨난다는 이유에서, 기존의 가치관들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야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책의 예를 들자면 이반은 자신이 ‘비석’들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이 비석들이 바로 기존 가치관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들인 것이며, 동시에 기존 가치관들이 무너진 ‘잔해’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나온다. 책에는 “카라마조프적인 대지의 힘 - 광포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힘이 도사리고 있어요.”로 표현되는 기존의 가치관, 교설, 신을 부수는 힘이 바로 ‘카라마조프적인’ 힘인 것이고, 그 힘을 지닌 이들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인 것이다. 이 힘은 드미트리의 대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살고 싶다. 정말 살고 싶다. 어떤 길을 향해, 내게 손짓하는 저 새로운 빛을 향해 떠나고 싶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 얼른, 어서 빨리, 지금, 지금 당장!

                              

이 대사처럼 생에 대한 의지임과 동시에, 살아가려고 하면 (부조리 때문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너는 무엇을 해야한다(have to)'라는 비늘로 덮인 용”(니체, 정동호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 2000년 8월)과 “사자”가 싸우는 힘이 바로 카라마조프 적인 힘인 것이다.


 그렇다면 드미트리와 이반 그리고 알료샤는 부조리에 맞서서 까라마조프적인 힘을 지니고 어떠한 행동을 보이는지 알아보자.


3. 드미트리: 욕망의 최대한의 충족

 드미트리는 부조리의 상화에서, 종교 규율 등과 같은 자신이 얽매일만한 족쇄가 없기 때문에 생의 의지, 즉 자신의 욕구를 최대한 많이 충족시키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치맛자락’에서 다른 ‘치맛자락’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술도 흥청망청 즐기고,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때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동생 이반이 드미트리와 같은 행동을 보이는 아버지에 대해 “우리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돼지 새끼만도 못한 인간이었지만 사상 하나는 옳았어.”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정당화된다. 부조리의 상황에서 드미트리처럼, 표도르 파블로비치처럼 행동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지만 중요한 것은 드미트리 자신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데에 있다.


 드미트리는 마을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흥청망청 살지만 마을에 돌아온 직후 카체리나와의 돈 문제로 죄책감을 느끼고 끊임없는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루셴카라는 여인을 통해 정착을 하려고, 구원을 받으려 하지만 이마저도 아버지의 훼방 때문에 가로막히게 된다. 바로 여기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유형을 선고받는데, 그는 이 유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속죄하려한다. 그러나 이는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를 통해 속죄를 한다는 측면에서 어리석고, 자신의 속죄를 위해 신의 이름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한 속죄를 하지 못하고 그루셴카와 아메리카로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어쩌면) 진정한 구원을 받게 된다.


4. 이반: 부조리에 대한 대결

 이반은 형제들 중 부조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끝까지 탐구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터키에서 인간이 보여준 잔학함을 예로 드는데 이는 매우 흥미롭다. 아이들은 성경의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상태와 같다. 아이들은 선과 악을 초월한 존재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은 그들에게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 중 어떤 아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갓난아기 동생에 대해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과 악을 알지조차 못하는 아이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사실에 이반은 무척이나 괴로워한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이반은 “신이 있다면 대체 왜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고 신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반의 논리는 한 치의 오류도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있다면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도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다. 혹여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은 위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잔혹하고 인간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그런 악독한 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반을 더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떠한 형태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을 나서며 벌거벗은 자신들을 보고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이 ‘부끄럽다’라는 생각은 ‘너’와 ‘나’의, 즉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신이 유리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에덴동산에서의 세계와 일체되어있는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상태와 같다는 측면에서 아이들은 세계와 일체되어있는 존재이다.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아이들은 자기한테만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다는 것을 통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유아기를 벗어난 인간들은 세계와 유리되어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부조리는 위의 질문을 하는 인간과 대답이 없는 세계의 끊임없는 대결의 상황인 것이고, 이반은 이 대결상태를 ‘카라마조프적인 힘’으로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해결될 수 없는 대결의 상황은 이반에게 조시마 장로가 하는 말을 통해 극명히 드러난다.

                                          

긍정적인 쪽으로 해결될 수 없다면, 부정적인 쪽으로도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마음이 이런 속성을 지녔다는 건 당신 자신이 잘 아실테지요. 그리고 바로 여기에 당신의 고뇌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했던 그조차도 막상 자기가 설파하고 다닌 그 논리에 의해 아버지가 죽자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미쳐가는 와중에도 결국 자신이 형 대신 벌을 받으려 한다. 이반의 논리를 통해서 보면 자신의 가문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전혀 이상할 일이 없는 것이지만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이 의심을 품었던 그 ‘미덕’을 실천하려 한다.


5. 알료샤: 사회주의 운동과 종교에의 귀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제사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2장 24절로, 지극히 알료샤를 겨냥해 도스토옙스키가 인용한 구절이다. 원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알료샤가 혁명가가 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은 프롤로그 성격의 소설이라고 한다. 또한 수도원에서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에게 끊임없이 “너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 지상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알료샤가 천상의 세계인 수도원을 떠나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떨어져 죽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과연 알료샤가 어떤 혁명가가 될 예정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책에는 “이와 마찬가지로 그(알료샤)가 불멸과 신은 없다고 단정 지었다면 당장에 그는 무신론자와 사회주의의 길로 나갔을 것이다.(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노동의 문제 내지는 소위 제4계급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주로 무신론의 문제요 무신론의 현대적 구현의 문제이며 땅에서 하늘에 다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땅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그야말로 신 없이 건설되는 바벨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알료샤는 수도원에 몸을 담고 있고, 두 형과는 다르게 비교적 격정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에서 벌어지는 형들과 얽힌 사건을 겪으며, 조시마 장로의 신성이 모욕당하는 경험을 하며, 그리고 특히 이반의 말을 들으며 부조리에 대한 생각을 키워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독실한 신자였던 알료샤가 ‘무신론의 현대적 구현’인 사회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인생과 맞닿아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죽을 뻔했지만 결국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이러한 경험으로 종교에 더욱 심취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구상은 알료샤가 결국에는 ‘신성(神聖)’을 깨닫고는 다시 종교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소설 『악령』에서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한 마을이 대혼란에 빠지는데, 이처럼 도스토옙스키는 사상(특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이 하나의 타락의 증후라고 보았다.(『공산당선언』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악령’이라는 제목을 공산주의를 겨냥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타락은 종교의 힘을 빌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도스토옙스키는 말하는 것이다.


6. 종교를 통한 부조리의 치유

 위의 형제들 모두 (도스토옙스키의 입장에서)‘타락’하지만 결국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또는 구원은 받지 못하더라도(미쳐버린 이반과 같이) 종교에서 말하는 ‘덕’을 실천하려 한다는 점은 유념할만하고, 또한 이 같은 ‘종교를 통한 치유’는 도스토옙스키의 많은 작품에 나타난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아파한다. 동시에 자신이 노파와 죄 없는 여인을 둔기로 내리쳐 죽였다는 생각에 죄의식을 느낀다. 또한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바로 이 ‘신은 없다’며 자위를 한다. ‘신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며 불면증에 시달리며, ‘신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이 기구한 운명이 『죄와 벌』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 바, 사람을 구하려 불길에 뛰어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 자선을 하는, 땅바닥에 키스를 퍼붇는 그의 행동은 ‘신은 없다’라는 생각과 상치된다. 유형지에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여인이 항상 그를 돌봐주고, 그 또한 자신의 죗값을 치르면서 결국 그는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또한 『악령』에서는 ‘키릴로프’라는 이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 나온다. 그는 ‘신은 없다.’고 주장하며 매우 냉소적이고 표독스러운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주인집의 아기가 가지고 놀던 공이 장롱 밑에 들어가자 이를 꺼내주려 허리를 굽혀 공을 꺼내 아이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위의 언급된 인물들과 더불어 카라마조프 형제는 모두 같은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가난과 간질에 시달렸고, 러시아에 벌어지는 혼란, 그리고 인류역사를 되뇌이며 자신이 그토록 믿어왔던 ‘성령’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위의 예들 때문에 어쨌든 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인간은 키릴로프와 같이 선량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얼마든지 신성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소설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쨋든 신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주장은 실용주의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파스칼의 내기’를 떠올리게 한다.


7. 종교와 덕행

 파스칼은 ‘신이 존재해야만 하는가?’(왜 ‘존재하나’라고 하지 않았는지 유념하라.)라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무도회에 심취하면서도 기독교에 심취했던,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와 비슷한 인물인데 그도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신은 분명히 존재‘했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삶이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렇지 아니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뼈저린 아픔을 느꼈다. 결국에는 촛불을 보다 성령을 깨닫고는 기독교로 마음이 기우는듯하지만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그가 진정으로 의심을 멈추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팡세』의 유명한 구절이자 ‘파스칼의 내기’로도 불리는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도저히 이론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으니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어차피 일종의 도박을 할 수 밖에 없다.”라는 구절이 그 의심을 말해주는데, 그 도박이란, 신을 믿으면 잃을 것이 없고, 신을 믿지 않으면 사후에 불경죄로 지옥불에 떨어질 수 있으니 신을 믿는 것에 ‘판돈’을 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파스칼과 도스토옙스키는 모두 실용적 측면에서 신이 존재해야만 하고 인간은 그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반과 키릴로프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한번 신에 대해서 의심을 한 이들이 조시마 장로의 ‘믿어야 한다!’라는 외침을 듣는다면 이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모두 동의하고 싶었지만 자기 자신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괴로워한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신은 없다.’는 논리의 결론으로 허무주의에 빠져 잔혹하기로 유명한 『소돔의 120일』에서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들은 이반의 논리에 따라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죽인 스메르쟈코프와 같이 부조리에서 오는 복수심에 잔혹한 일들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덕행을 실천하려 했다. 이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무신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부조리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찾아오는 것이며 내가 부조리에서 고통 받는만큼(아닐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부조리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을 ‘고결하다’고 표현한다.) 남들도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자신이 그런만큼 남들도 똑같은 아픔을 겪는다는 ‘공감’과 더불어 그로 인한 타인에 대한 ‘연민’이 덕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시마 장로는 타인에 대해 자기 자신은 항상 죄인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실상 ‘공감’과 ‘연민’(에서 오는 ‘용서’)은 기독교에서 설파하는 감정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또한 ‘파스칼의 내기’에서 신을 믿는 것에 거는 ‘판돈’이 과연 인간에게 가벼운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드는데, 이 ‘판돈’이라는 것이 매주 내는 헌금, 성당(교회)에 가는 시간만을 뜻하는 것인가? ‘판돈’에는 인간으로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살인이 일어난 서양 중세시대의 ‘암흑시대’, 인간을 구속하는 종교의 논리들이 바로 그 ‘판돈’에 속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오히려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들을 구속하는 규율, 도덕, 허례허식을 뛰어넘어 자유로울 수 있고, 그러한 (자신을 심판할 존재가 없는)자유로운 상황에서 덕행을 행하기에 인간이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는 것이다. 니체가 그 일생동안 설파했던 ‘초인’은 바로 (종교를 초월해)자유롭게,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삶을 향유하는, 『악령』에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의무를 행하는 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삶의 모든 1분이, 삶의 모든 순간이 인간에겐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꼭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무인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율법입니다. 숨겨져 있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친부살해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부조리에 맞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치밀한 묘사를 통해 나타난다. 모두에게 똑같이 찾아오는 부조리는 언뜻 보면 지극히 비관적이고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스메르쟈코프처럼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허무주의를 넘어서기만 한다면 그 어떤 사상보다도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인간이 말하는 그 모든 덕행들을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서 행한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며 소설의 이반처럼 부조리에 대해 설파한 카뮈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영생을 거부한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원초적인 삶, 그것뿐이다. 삶의 의미가 없어져도 여전히 삶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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