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위한 프롤로그 (Prologue)

by 마치

빛바랜 나무 문에 달린 반질반질한 손잡이를 잡아 돌린다. 천천히 문을 열면 정면에 걸려 있는 프렌치도어 스타일의 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달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와 벽면의 책장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천장에 닿을듯한 높이로 온통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다. 무늬나 곡선 없이 투박하지만 칸마다 원하는 높이로 조절할 수 있어서 사회초년생 시절 첫 월급으로 샀던 애착 책장이다. 책은 세로로 반듯하게 꽂힌 것도, 가로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것도 있다. 대부분 읽고 싶은 것, 읽고 있는 것들이 가로로 쌓여있는 편이다.


책장에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가득한데 동네 산책하다 도서관도 들르고, 중고서점도 기웃거리면서 읽고 싶은 책들을 집어든다.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첫 문장이 멋스러워서, 어디선가 재밌다고 본 책을 마침 발견해서, 작가의 생일이 나와 같아서 (미국의 작가 존 윌리엄스의 생일을 보고 집어든 책이 바로 『스토너』였다),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지적허영심에 부질없는 책 욕심을 부리는 건가 싶다가도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라 이내 안심한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출처: tvN <알쓸신잡>

책장을 마주 보고 있는 벽면에는 등받이가 긴 폭신한 안락의자가 작은 스툴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밝은 겨자색깔의 의자 팔걸이에는 항상 가을단풍빛 체크무늬 담요를 둔다. 노란 의자와도 잘 어울리지만 책을 읽을 때 배 위에서 소리 없이 따뜻함을 전하는 느낌이 다정하다. 여기에 앉아 나는 미국에도 가고 포르투갈에도 가서 금발머리의 부잣집 도련님도 만나고 남편의 속박에 지친 주부의 하소연도 듣는다. 때로는 말하는 코뿔소도 마주치며 전쟁이 터진 도시에 있는 동물원의 동물이 되어 보기도 한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작은 인덱스를 곁에 둔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내 가치관과 맞는 생각들 그리고 이렇게 묘사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동받다 못해 필력이 부럽기까지 한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인덱스를 붙인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당연하고 구매한 책에도 나는 밑줄을 긋거나 글씨를 쓰지 않는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을 때 그런 흔적들이 내 생각과 느낌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 흔적 남기기는 최대한 피한다. 일례로 고등학생 때 읽었던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당시 읽으면서 주인공 홀든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같은 10대로서 그때만의 방황과 혼란에 공감했다. 하지만 20대가 되고 한창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읽은 책에서의 주인공은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서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처럼 매달 베스트셀러 목록이 바뀌듯 내 생각과 시야도 다채롭게 변한다. 책을 통해 이런 상황, 저런 사람을 만나본 덕분이다.


내가 구매한 책은 인덱스를 붙여 놓은 채 보관하다 읽고 싶을 때 꺼내 읽으면 그만이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다르다. 반납 전 인덱스는 모두 제거해야 하는데 그냥 떼어내 버리기에는 내 감상과 여운을 저 멀리 보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작은 일인용 책상에서 독서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서랍이 없는 직사각형의 심플한 나무 책상이다. 책상 위에는 가장 좋아하는 책 몇 권과 다이어리, 각종 크기의 수첩들이 한쪽 책꽂이에 기대어있다. 동그란 연필꽂이에는 가장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과 사각사각 소리가 매력적인 2B연필 그리고 자주 쓰는 형광펜 몇 개를 넣어둔다. 모두 독서노트 작성을 위한 준비물로 도서관의 책들은 여기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독서노트를 쓰며 인덱스를 떼어내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인다. 몇 달이 지나고 다시 독서노트를 꺼내면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 난다.


이제 여기, 매거진 《자기만의 책장》을 온라인 독서노트로 삼으려고 한다. 지극히 주관적이라 내보이기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관적이기 때문에 공유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쳤다. 첫 노트를 어떤 책으로 하면 좋을까 고민이 많았다. 처음이니까 유명한 고전작품이 좋을까, 즐겨 읽는 일본 추리소설이 흥미를 끌 수 있을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봤던 SF소설로 할까. 내 어지러운 책장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해지지만 즐거운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버지니아 울프를 따라 나만의 책장을 갖고 싶었던 17살의 나에게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첫 책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