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by 셸리 리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어차피 모두 죽음이라는 같은 인생의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사는지 고민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 미국 콜로라도 주에 사는 열일곱 살의 소녀 빅토리아는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볼만한 여유가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과 식사준비를 하고, 아버지를 도와 과수원에 일손을 보태며, 난폭한 남동생은 빅토리아에게 왠지 모를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한 소년을 만나 지독한 사랑의 대가를 치르며 빅토리아는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에 집중“한다.
50대에 첫 소설을 쓴 작가 셸리 리드의 데뷔작 그리고 제노사이드 (genocide, 집단학살)에 대하여
주인공 빅토리아가 사는 마을은 콜로라도주의 도시 아이올라로, 작가 또한 서부 개척 이주민으로서 현재까지 콜로라도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작가는 빅토리아가 바라보는 콜로라도 산맥의 풍경, 소년과 밀회를 즐기는 숲의 정경 및 콜로라도 강을 따라 이어지는 자연을 세밀하고 입체적으로 묘사했다. 마치 작가가 모든 상황과 사건을 직접 겪어 정확히 알고 쓴 것 같았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빅토리아 곁에서 그녀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이 책은 출간 전부터 원고를 미리 읽어본 출판업계에서 이미 베스트셀러를 예감했다고 한다. 출간 전에 17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고 하니 모두에게 공감과 감동을 준 대단한 작품이 분명하다. 더 놀라운 것은 작가 셸리 리드가 50대에 쓴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50대라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강물처럼』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그녀가 부지런히 쌓아온 생각과 경험을 엿보고 싶었다. 작가는 50대 데뷔에 대해 “오랜 시간 ‘형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 좋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형성이라는 개념’이 미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원주민에게, 나아가 편견과 차별받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작가는 소설 도입부에서 빅토리아를 통해 말한다.
“불어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킬 때 이곳의 기쁨과 고통까지 모조리 앗아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그 풍경이 내어주고 앗아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어 우리 가슴에 남고, 그렇게 우리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마을에 있는 블루 메사 저수지 아래 세 개의 마을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당시 그 마을의 주민들이 얼마나 큰 상실과 고통을 겪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는 곧 소설의 밑그림이 되었고 주인공 빅토리아는 곧 저수지에 잠길 마을, 아이올라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 서부 확장의 역사는 원주민 박해와도 이어진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제노사이드에 대해 강조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진 소년, 윌슨 문을 통해 진지하게 드러냈다.
주인공 빅토리아의 삶이 근원이 된 소년, 윌슨 문
인디언 마을 출신인 윌슨 문은 아이올라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니 차별과 멸시를 받다 끝내 살인까지 당하는 비운의 캐릭터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처럼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이 등장하는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 많지 않지만 그는 끝까지 빅토리아 속에서 그녀가 하루를 살아내고 버티는 삶의 튼튼한 뿌리가 되어준다.
윌슨 문의 할아버지가 윌슨에게 한 말이지만 이는 빅토리아에게 더 큰 깨달음이 되어 역경과 고난을 버티게 해 주었다.
윌슨은 첫 만남부터 빅토리아에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고 나는 눈에 그려지고 몸으로 느껴지는 묘사에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 사이에 생기는 긴 침묵을 수다로 채워야 할 어색한 그릇으로 여기지” 않는 윌슨의 배려와 여유로움 그리고 지혜까지 알 수 있는 문장이었다.
빅토리아의 난폭한 남동생 세스에 대해 빅토리아는 “입술을 스치는 윌의 이름이 달콤한 맛이었다면 세스의 이름에서는 쓰디쓴 맛이 났다.”라고 한 반면, 윌슨은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라며 빅토리아를 조용히 위로했다.
빅토리아와 윌슨의 아기, 그리고 완벽한 결말
빅토리아는 뱃속에 윌슨과의 새 생명이 찾아왔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윌슨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인디언의 아이를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나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홀로 출산을 한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고, 천둥이 치면 치는 대로 받고, 거센 바람과 따뜻한 햇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연을 목격하며 빅토리아도 살기 위해, 아기를 위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를 악물고 버틴다. 하지만 굶주림에 시달리며 더 이상 아기를 책임지기 어려워지자 빅토리아는 우연히 마주친 부부에게 아기를 보내기로 결심하고 부부 몰래 아기를 눈에 띄는 곳에 둔다. 이미 남자 아기를 키우고 있던 부부는 다행히 또 한 명의 아기를 갖고 싶어 했고, 우연히 마주한 빅토리아의 아기를 데려가 키우기로 결심한다.
빅토리아가 아기를 보내기로 결심할 때부터 흐르던 눈물은 아기를 보낸 직후 빅토리아의 모습을 읽으며 절정으로 치닫아 읽는 내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내 아기와 생이별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안 되다가도, 오직 아기의 건강과 행복만을 염두한 결정에 그녀를 안고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
이제 빅토리아는 다시 혼자 남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가 다시 사랑스러운 웃음을 짓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소설은 그녀가 매일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아들이 약속 장소에 오는 것으로 끝난다. 어느덧 성인이 된 아들은 그녀에게 “상실과 외로움과 전쟁을 알고서도 나를 만날 용기를 내 여기까지 와준 남자.”였다. 그동안 겪은 고난을 모두 잊게 해 주는 순간이었으리라.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깊게 남았다. 빅토리아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곁에서 또는 멀리서도 그녀를 묵묵히 지탱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첫사랑 윌슨 문은 물론이고 무뚝뚝하지만 끝까지 딸을 찾아다녔던 아버지, 아들을 그리워하며 지내는 그녀에게 힘이 되어 준 친구들, 20년 동안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준 은인. 이 모든 것들이 촘촘히 쌓여 빅토리아에게 결국 희망이 있는 삶을 선물해 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