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파버 1221 빈티지는 1930년대 독일에서 생산되었다. 사람 나이로 말하면 90살이 넘은 것이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연필이다. 보통 연필심은 단단하면 색이 흐려지고, 부드러워지면 색이 짙어진다. 그런데 이 녀석은 돌연변이다. 심의 단단하기는 바위 같고, 부드러운 필기감은 혀 위에서 녹는 초콜릿 같다. 색은 너무 진하지도 흐리지도 않아 딱 내 취향이다. 종이 위에 글씨를 쓱쓱 쓰다 보면 배시시 미소 짓게 되어 기분까지 좋아진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연필.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 나도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 만남은 연필 가게를 구경면서 시작되었다. 빨간색의 옷을 입고 선명하지 않은 금빛으로 이름이 새겨진 모습이 첫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나 좀 됐어.’하며 의기양양하게 있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샘플로 나와 있는 연필을 들어 탁자에 놓인 메모지에 줄을 그었다. 농도 진한 물감을 만지는 촉감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머리 위로 폭죽이 발사되고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상기되었다. 진열대에 놓인 여러 가지 연필은 ‘이런 느낌 처음이야’를 안겨줬던 빨간 연필의 필기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연필을 썼지만 신선함 그 자체였다.
투명한 유리컵 안에 꽂혀 있는 연필을 몽땅 집어 드니 그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탱탱하게 부풀었던 흥분이 ‘펑!’하고 풍선처럼 터졌다. ‘자루, 2만 원’ 아무리 90년 된 연필이지만 손에 꽉 움켜줬던 것들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망설임 끝에 두 자루를 쥐었다.
첫 자루를 쓰면서 더 사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품. 절. 이라는 글자를 읽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다시 구매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아쉬움과 그동안 사용했던 연필 중에 대체할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연필을 쓰면서 연필깎이로 깎을 때마다 짧아지는 연필을 보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닮고 싶었던 연필이 사라지는 모습에 괜히 나까지 사라지는 듯 하여 섭섭했다. 아깝지만 자꾸 손이 가니 그만큼 짧아지는 중이다. 책상에서 떨어지면 ‘아이쿠’ 심이 부러지면 ‘악’ 갖가지 소리가 튀어 나왔다.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연필도 모두 다른 필기감과 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용하기 위해서 깎고 다듬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도 마찬가지로 깎이고 다듬어질 때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연필을 깎는 시간에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연필깎기로 깎고 심은 다시 다듬어야 하고, 칼로 깍아도 천천히 예쁘게 마무리를 해야 한다. 골드파버 1221은 다른 연필보다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수 있게 한다.
얼마 후 몽당연필이 되어 보관함에 들어가게 될 연필을 들여다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입처 홈페이지에 다시 들어가보았다. 품.절.이라는 글씨가 사라졌다. 얼굴에 열이 오르며 흥분되기 시작했다. 12자루 한 상자를 사고 싶으나 수량이 모자라 장바구니에 담지 못했다.(멋지게 이렇게 말하고 싶으나 현실은.....) 마트에서는 잘 열리지 않는 지갑이지만 일단 세 자루를 장바구니에 담고 잠깐, 아주 잠깐 고민을 했다. 다섯 자루를 담고 10만 원, 10만 원, 10만 원을 몇 번 중얼거렸다. 필통에 있는 다른 연필을 보며 너도 괜찮은데, 아, 너도 괜찮아. 필기감 좋은 연필이 많이 있었고, 그중에는 빈티지 연필이어도 가격이 높지 않아 상자로 사들인 것들도 있었다. 수량을 두 자루로, 세 자루로 몇 번을 바꿔가며 고민 끝에 세 자루를 구매했다. 6만 원이 연필을 사기에 효율적인 소비인가를 고민하는 척했으나 손가락은 번개보다 빠르게 결제 버튼은 눌렀다.
처음은 단연코 매력넘치던 필기감에 홀렸지만 연필을 쓰는 시간동안 ‘나도 너처럼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내 안으로 들어와 더 큰 애정을 갖게 했던 것은 아닐까. 가계부에 ‘오늘 지출 연필 6만 원’을 기록하면서 고민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행복했다. 좋아하는 연필이 온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연필이 온다. 90년을 살아 낸 세월이 온다. 닮고 싶은 연필이 온다. 설렌다.
'그래,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