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눈물

홍매화의 마지막 봄

by 마침내



단양의 작은 마을 끝에 선배의 별장이 있다. 소박한 그 집 마당에는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뒤곁 작은 텃밭 옆에는 오래된 홍매화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습자지처럼 얇은 겹꽃잎들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함께 떨리곤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짙은 분홍빛에 마음을 빼앗겼다.

“찐분홍이다. 색이 이렇게 섹시해도 되는 거에요? 분홍색이 이런 느낌이었나?”

첫 만남부터 나는 그 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선배를 만났을 때 홍매화가 잘 있는지 물어봤다. 선배는 여름 강풍에 가지가 생으로 부러졌다고 했다. 뿌리 박고 있는 나무만이라도 살리고 싶었던 마음으로 부러진 가지를 톱으로 잘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신비한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잘려지는 가지에서 분홍빛 가루가 날리는 거야. 햇살에 그것들이 반짝이며 날리는 모습이 얼굴에 분가루 바를 때 날리는 것처럼 얼마나 곱던지.”


다시 생각해도 뭘 본건지 모르겠다며, 선배는 그 모습을 기억하듯 먼 곳을 바라봤다. 나는 햇빛에 반짝이며 흩날리는 분홍 분가루를 상상했다. 그해 가을과 겨울을 서울에서 보낸 선배가 이듬해 봄, 비워둔 집 정리를 하러 간다고 했다. 나는 홍매화가 궁금해서 따라나섰다.


단양으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자동차 라이트에 비친 안개가 마치 분홍빛 분가루처럼 흩날려 나는 그날의 환상을 떠올렸다. 도착하자마자 차문도 닫지 않은 채 뒤꼍으로 달려갔다. 홍매화를 보는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머릿카락이 쭈뼛 서고, 소름은 귀 옆에서 어깨와 팔, 발끝까지 퍼져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꺾인 가지나 고꾸라진 모습이 아니라, 뿌리 박은 나무와 부러진 가지마다 회색과 흰빛의 작은 곰팡이버섯이 잔뜩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는 남은 가지라도 살리려 애썼지만, 홍매화는 그 마음을 외면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나무의 몸통은 곰팡이로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가느다란 가지 끝에는 마지막 생명력이 모인 꽃이 피고 있었다. 죽음을 알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삶이란 것이, 생명이란 것이 이렇게도 질기고 미련한 것일까. 처절하게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바늘로 후벼파는 듯 아려왔고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부러진 가지들은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뿌리박은 너는 살아 있어야 했잖아. 버텼어야지.’, ‘하긴, 팔다리가 생으로 부러졌는데… 어쩌면 잘려 나간 가지에 먼저 곰팡이가 퍼졌는지도 모르겠네. 옆에서 보는 것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슬픔이 뒤엉킨 무수한 말들이 돌아다녔다.


거실에 모여 있던 일행에게 나무 이야기를 했다. 그중 나무공예를 하는 선생님이 내 말을 듣자마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뒤꼍으로 향했다. 나도 뒤따라 나갔다. 선생님은 가지를 이리저리 들춰보며 말했다.

“손가락 굵기의 가지는 잘 말려 조각하고, 더 굵은 건 양초 받침으로도 괜찮겠네.”


선생님은 어느새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톱이 나무에 닿았다. 누군가 내 가슴에 바늘을 꽂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톱날이 홍매화의 살점을 파고들자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고, 톱질에 맞춰 작은 진동만 느껴졌다.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공포 영화를 보듯 내 시선은 오직 나무와 톱날에 고정되어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울지 마. 뭐 그리 서럽게 우냐. 내가 얘들로 예쁜 거 만들어 줄게.”

선생님의 목소리에도 담담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톱질이 반복되며 홍매화의 속살이 드러났다. 둥글납작하게 잘려 나간 나무 토막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떨어졌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선배가 말했던 분홍빛 분가루가 아니었다. 잘려진 단면에서 선홍빛 물이 천천히 스며 나오고 있었다.

‘분홍색 눈물이다.’


강풍에 꺾이고 동강 난 몸으로 여름과 가을, 추운 겨울까지 버텨 낸 생명이었다. 봄이 되면서 빨아들인 수분으로 다시 꽃을 피우려 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곰팡이마저 제 몸의 일부인 양 꽃보다 먼저 피워 낸 홍매화. 천천히 배어 나오는 그 붉은 눈물은, 삶의 마지막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듯한 고요함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쨍한 햇살 속의 홍매화들을 마주한다. 그때마다 곰팡이를 두른 채 꽃을 피웠던 나무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배가 이야기했던 분홍빛 분가루는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그 나무를 기억한다. 죽어가는 나무에서 피던 꽃의 강렬함은 건강한 나무의 꽃보다 더 짙고 강렬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도 이런 것 아닐까. 인생의 가장 화려한 막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 그 해, 홍매화의 모습은 생명이 가지고 있는 삶의 힘과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준 모습이었다.




죽어가는 나무에서 피어난 꽃은 왜 더 짙고 강렬했을까요?

생명이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빝은 회색 배경에 분홍 매화꽃 1280_800 이미지로 만들어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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