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로 살기] 이기적인 변명이자 자위적인 글쓰기
엄마는 아프다
내가 어릴 적부터 엄마는 많은 약을 시간 맞춰 먹어야 했다. 아침약, 점심약, 저녁약이 모두 달랐고 가족끼리 외출을 할 때마다 엄마는 다른 짐보다 약을 먼저 챙기셨다. 혹여나 외출 일정이 예정보다 길어져 여분 약이 떨어지면 일정과 상관없이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하지만 엄마가 왜 그렇게 많은 약을 먹는지, 왜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안 되는 건지 난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의 병을 아는 것이 무서웠고 애써 모른척했다. 내 눈앞에서 발작을 하며 쓰러지는 엄마를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봐 왔기 때문이다.
처음 엄마의 발작을 본 날은 아마도 엄마아빠가 크게 다툰 날이었을 거다. 싸움 때문에 약을 먹는 것을 잊었거나, 혹은 일부러 먹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어린 나에게 부모님의 다툼도 큰 공포였지만, 엄마의 발작은 그보다 훨씬 무서운 공포였다. 그렇게 종종 부모님의 싸움 끝에 엄마의 발작을 봐야 했다. 부모님이 크게 다투는 날에는 긴장했다. 공포스러운 엄마의 모습을 또 보고 싶지 않아서 내 방에 숨어있었다.
지금도 난 주전자에 물이 끓을 때 나는 휘슬소리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건 엄마가 발작을 일으킬 때의 소리와 흡사했다. 어릴 때의 나는 엄마가 발작을 할까 봐 무서워 엄마랑 단 둘이 있을 땐 놀이터에 혼자 나가는 날도 많았다. 그때부터 어쩌면 서서히 엄마와 마음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병과 이기적인 딸
훗날, 중학생쯤이었을까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진 후에야 엄마의 병을 알게 되었다.
'뇌전증', 흔히 말하는 간질병.
엄마의 병을 알고 난 후에는 두려웠다. 혹시 유전은 아닌지 뒤졌다. 그동안 나도 엄마처럼 발작을 일으키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도 성인이 되면 엄마처럼 발작을 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었고 나도 모르게 주눅 들었다.
나이 많은 옛날 사람들은 뇌전증을 귀신 들린 병이라고도 했다. 학창 시절 부모님과 따로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간질환자를 그렇게 불렀고 그 뒤로 그 교회를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다.
사춘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엄마와 단 둘이 있는 것이 힘들었다. 다행히 엄마와 단 둘일 때 발작한 적은 한번 도 없었지만 여전히 두려웠고 엄마의 발작 앞에서 난 8살 꼬마가 되었다.
어릴 적 그 모습을 지켜본 나에게 누군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은 엄마의 병을 나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땐 나도 다른 어른들처럼 엄마의 병을 숨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내 또래 친구 엄마들보다 20살 가까이 많았지만 철없던 소녀에게는 나이 많은 엄마보다 엄마의 질병이 치부가 되었다.
내가 결혼한 후 엄마는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결혼하던 그 해 내 생일, 엄마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첫째 아이를 낳고 백일을 준비할 때, 엄마는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둘째 아이 백일쯤엔 엄마가 계단에서 넘어져 큰 수술을 했고, 그 뒤부터 계속 친정집엔 요양보호사가 출근했다.
원래부터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던 엄마는 보청기를 껴도 전혀 들리지가 않는 것인지,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물어도 항상 멍한 눈빛으로 "응, 괜찮아", "밥 먹었어", "좋아" 정도가 대화의 전부였다.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빈혈, 류마티스...흔하게 들어 본 이름만 기억할 뿐 엄마의 정확한 병명도 알지 못한 채 친정에 갈 때마다 점점 몸의 기능을 상실해 가는 엄마를 마주해야 했다. 그런 엄마를 아빠 혼자 돌보셨다. 자식이라곤 나 하나였는데, 그런 나도 멀리서 어린 자식을 돌봐야 하는 처지였기에.
그런 와중에 지난해 엄마가 위암 조직을 절제하는 시술을 해야 했다. 남들에겐 간단한 시술이 엄마에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간단한 시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혈소판 수치가 낮았고,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인 '골수이형성증후군'때문이라 했다. 혈액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질병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엄마의 병은 엄마가 갖고 있던 것의 극히 일부였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이미 아주 오래전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자주 아팠고, 한 달에 몇 번씩 검사를 받으러 병원을 다녔던 것이다.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만 할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두 아이를 돌보며 풀타임 근무하는 워킹맘으로 사는 내게는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없었다. 지금의 일상을 포기하고 생활 터전을 옮기는 일도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아빠는 그런 내게 '엄마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 너는 신경 쓰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무척 고맙기도 하면서 너무 미안했고,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아빠 나이 80.
누군가를 간병할 연세가 아니었다. 아빠 역시 당뇨, 고혈압, 협심증 환자다.
얼마 전엔 일하는 중에 뜬금없이 친정 근처 대학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의 항문질환이 심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수술을 권했겠지만, 엄마는 기저질환이 너무 많아 수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호자로 오시는 아빠가 연로하셔서 그런 상황을 이해를 잘 못하시는 것 같으니, 젊은 따님이 보호자로 같이 오시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거라면 내가 간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안다. 아빠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게 아니라 엄마를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드신 거라는 걸. 의사도 그걸 알기에 이제는 연로한 아버지가 아닌 딸인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사의 전화를 받은 뒤 한동안 난 무기력했다. 일상이 버거울 정도로 우울하고 눈물이 났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첫째도, 아직 6살인 둘째도 엄마를 필요로 했고, 나의 엄마도 딸을 필요로 했으나 난 모두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난 아픈 엄마 앞에서 든든한 마흔이 아닌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는 꼬마가 되었고, 엄마를 마음속에서 내려놨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기적인 딸이 되기로 했다. 훗날 내 자식들에게 너도 이기적으로 살라고 해야겠다 다짐하면서.
시어머니도 아프다
최근 들어 시어머니도 몸이 안 좋아지셨다. 언제부턴가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몸 한쪽이 저리고 무감각해지셨다. 나는 이미 엄마 만으로 벅찼기에 친정엄마보다 한 세월은 젊으시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시어머니의 질병은 내겐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별일 아닌 듯 그저 나이 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노환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집안에서 나뿐이었다.
집 근처 대학병원에 모시고 가기 위해 남편은 여러 번 휴가를 썼고, 유명한 대학병원 의사를 찾아다녔다. 시동생과 남편이 번갈아 가며 병원을 모시고 갔고 진료 결과, 진행상황, 관련 정보들을 시댁 가족 채팅방에 자세히 공유했다.
채팅방 속에서 난 불편했다. 나는 누구의 가족으로 살고 있는 걸까.
대화를 볼 때마다 친정부모님이 생각났다. 난 거리가 멀어서, 시간이 없어서, 아이들을 돌봐야 해서, 휴가가 없어서 병원조차 동행하지 못하고 있는 의사도 한심하게 여기는 이기적인 딸로 사는데. 시댁에서는 어머니의 병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하는 자식 며느리가 되어야 했다.
자식들의 열열한 지지 속에 치료를 받고 계신 시어머니를 보면서, 하나뿐인 자식에게 조차 의지하지 못하고 이 모든 싸움을 외롭게 감당하고 있는 친정 부모님이 생각 나 마음이 무너진다.
우리 엄마 아빠는 자식 없는 사람처럼 살고 계시구나. 나 정말 이기적인 딸이구나.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사와 안위를 확인하는 전화 한 통으로 미안한 마음을 달래고 달력을 보면서 다음 달엔 언제쯤 친정에 갈지 계획을 세우는 것뿐이다.
앞으로 딸로 사는 날보다 며느리로 살게 될 날이 더 많을 테니까 지금은 친정의 가족으로만 살고 싶다. 어차피 난 이기적인 딸이니까 이기적인 며느리가 되어야 우리 엄마한테 덜 미안하니까. 그리고 시어머니에겐 나처럼 이기적이지 않은, 최선을 다해 엄마를 보필하는 보호자가 둘이나 있으니 나는 제삼자처럼 채팅창을 바라본다.
이렇게 오늘도 철 모르는 딸로 마흔의 내 삶을 산다.
이기적인 딸로 살 수 있게 기꺼이 희생하고 있는 아빠에게 고마워하면서.
미래의 내 아이들에게 난 나의 삶을 살테니 너도 너의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